독서는 힙하다! 텍스트 힙의 시대

오한별 객원기자 2024. 10. 16. 09:0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쇼츠와 릴스에 지배당하는 요즘, 디지털 광야를 이끈 Z세대들이 ‘텍스트힙’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독서 트렌드를 만들고 있다. 이는 단순한 취미를 넘어 자신만의 스타일과 지적 취향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텍스트에 매료된 디지털 네이티브

‘독서가 곧 휴가’. 모델 카이아 거버의 책 읽는 모습.
지난 2월, 영국 매체 '가디언’은 "Reading is so sexy(독서는 섹시하다)"라는 도발적인 제목으로 Z세대가 책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는 기사를 보도했다. 세계적인 모델 카이아 거버가 최근 독서 클럽 '라이브러리 사이언스’를 만들면서 "독서는 정말 섹시하다"고 말한 인터뷰를 인용한 것이다. 기사는 1997년부터 2012년 사이 태어난 세대에서 종이책을 읽는 유행이 퍼지며 지난해 영국에서만 6억6만9000권이 팔렸다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영국출판협회가 16~25세 2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중 48%가 '북톡(책+틱톡)’에서 소개한 책을 산 경험이 있다고 답했고, 플랫폼 내 영문 해시태그 '#booktok’을 단 게시물의 조회수만 2980억이 넘어간다.
두아리파는 북 클럽 ‘service95’를 설립했다.
한국의 Z세대도 독서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글자를 뜻하는 '텍스트’와 개성 있고 쿨하다는 뜻의 '힙’을 합성한 이른바 '텍스트힙(text hip)’이라는 신조어가 Z세대 사이에서 대세다. 책, 독서, 기록과 같은 아날로그 콘텐츠를 힙하다고 여기는 문화가 지금 Z세대의 추구미인 것. 올해 6월 열렸던 국내 최대 규모 책 축제 '2024 서울국제도서전’에서도 텍스트힙 열풍을 체감할 수 있었다. 도서전에는 무려 15만 명이라는 사상 최대 인파가 다녀갔다. 주최 측인 대한출판문화협회 자체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도서전을 찾은 총관람객 13만 명보다 약 15.4% 증가한 수치다. 그곳을 찾은 상당수는 2030 세대였다. 책을 읽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 사회 흐름과 역행하는 장면이다. 이처럼 텍스트힙 열풍은 평범한 것을 거부하고, 주류에 편승하지 않으려는 Z세대 특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텍스트힙은 SNS를 타고

올해 4월,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열린 미우미우의 문학클럽 ‘Writing Life’. 19세기와 20세기의 대표적인 여성 소설인 ‘여성(A Woman)’과 ‘금지된 공책(Forbidden Notebook)’을 조명했다.
책은 아날로그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아이템이지만, 최근 텍스트힙 트렌드를 이끄는 주무대는 오히려 SNS다. 자신이 읽고 있는 책을 공유하고 책의 일부를 찍어 올리는 '인증 샷’이 인기. 독서 중인 모습을 셀카로 찍어 올리는 데 그치지 않고, '줄 치며 읽기’와 '필사하기’도 유행이다. 필사한 문장 옆으로 자기의 생각을 더해보기도 한다. 또 취향이 가득한 자신의 책장을 공개하거나, 구매한 책을 언박싱하거나, 신작 도서를 리뷰하는 것을 릴스, 쇼츠, 틱톡에 공유한다. 이러한 흐름 덕분에 텍스트 기반 플랫폼인 블로그도 부활했다. SNS에 자신이 읽고 있는 책을 인증하거나 좋았던 구절을 기록하기에 가장 적당한 그릇이 블로그이기 때문이다.
구매한 책을 언박싱하거나 신작 도서를 리뷰하는 틱토커들.
또 독서 덕후들의 성지에 들러 인증 샷을 찍고 SNS에 게시하는 것도 하나의 힙한 문화로 정착했다. 대표적으로 조용히 술을 마시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심야 서점 '책바’는 소설에 등장하는 술을 소개하거나 소설 제목이 이름인 칵테일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책과 술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인증 샷을 남길 수밖에 없다. '카페 콤마’는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운영하는 북 카페다. 갓 구운 빵과 맛있는 커피, 잔잔한 음악은 물론 출판사의 진심이 담긴 도서 큐레이션이 이곳의 별미다. 김훈 작가, 신형철 평론가 등이 직접 추천한 책들도 구경할 수 있다. 독서의 즐거움을 2배로 끌어올려 줄 굿즈도 눈길을 끈다. 유명 작가들의 얼굴을 위트 있게 표현한 티셔츠부터 책갈피, 언제 어디서든 꺼내 볼 수 있도록 포켓용으로 만든 시집 등 독서 덕후들의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유니크한 아이템이 가득하다.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고민인 사람들을 위해 출판사에서는 뉴스레터나 팟캐스트, 오디오 북, 문장 수집 앱 등 다양한 부가서비스도 선보이고 있다. 이처럼 텍스트힙의 본질은 단순히 독서 행위를 넘어 '공유’와 '소통’을 중요시하는 현상으로,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가고 있다.

그들이 읽으면 나도 읽는다

글래드호텔 x 다산북스가 선보인 ‘글래드 북스테이 패키지’(왼쪽). 술 마시며 책을 읽을 수 있는 심야 서점 ‘책바’.
텍스트힙의 시대가 도래하게 된 데는 셀럽의 영향력이 크다. 무려 10년 전 펴낸 800쪽짜리 철학서 '불안의 서’는 배우 한소희가 읽는다고 알려지면서 품귀 현상을 겪었고, BTS RM이 읽은 책으로 입소문을 탄 '요절’은 18년 만에 재출간돼 단숨에 베스트셀러 자리에 오르는 등 파급력을 보여줬다. 걸 그룹 르세라핌 멤버 허윤진은 MBC '전지적 참견 시점’ 출연 당시 대기실에서 틈틈이 책을 읽고 필사하는 모습으로 큰 화제를 모았다. 출국길 공항에도 책을 들고 나타나 '공항 패션’ 대신 '공항 책’이라는 트렌드를 이끌기도. 아이브 멤버 장원영은 웹 예능 '살롱드립2’에 출연해 독서를 즐긴다고 밝히며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를 읽었다고 짤막하게 언급했다. 방송 직후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는 올 상반기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다.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운영하는 ‘카페 콤마’
Z세대를 대표하는 아이콘 두아 리파는 카이아 거버보다 훨씬 먼저 북 클럽을 창설했다. 글로벌 스타일, 예술 및 소셜 플랫폼이자 '궁극의 문화 컨시어지’라고 표현하는 북 클럽 'Service95’에서는 두아 리파가 고른 다양한 책을 읽고 의견을 나눈다. 세대와 국가를 뛰어넘어 파워풀한 이야기와 메시지를 담은 책도 읽을 수 있다.
텍스트힙은 모두가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셀러브리티의 독서와 팬덤의 디토 소비, 지적 호기심, 자기 과시 욕구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트렌드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보여주기식 '패션 독서’라고 폄훼하기도 한다. 최근 MBC '손석희의 질문들’에 출연한 황석영 작가는 이러한 텍스트힙 현상에 대해 "독서는 그런 식으로 시작하는 것"이라며, "작은 아령부터 시작해 근육을 키워나가는 것처럼, 독서력도 일단 책을 읽는 것부터 시작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독서의 동기가 무엇이건 다양한 방식으로 읽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면 그걸로도 충분한 것 아닐까?

#텍스트힙 #북스타그램 #디지털디톡스 #여성동아

‌사진출처 인스타그램 틱톡 
‌사진제공 글래드호텔 미우미우

오한별 객원기자

Copyright © 여성동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