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속의 역사] 88 비운의 인용사

김인문은 신라 30대 문무왕의 동생이다. 인문은 무열왕의 아들 신분으로 당나라에 20여년이나 머물며 신라 삼국통일을 견인한 숨은 주역이다.
김인문은 무열왕의 아들이자 문무왕의 동생으로 고귀한 지위에 있었지만 당 황실에 숙위하는 신분으로 신라에 머무는 시간보다 당나라에 머무는 시간이 더 길었다고 할 정도다. 학자이자 무인이기도 했던 그는 당나라의 정보를 신라에 보고하면서 백제와 고구려 전쟁에 직접 참여해 공을 세웠다.

◆신화전설 : 삼국통일의 숨은 주역 김인문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자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은 신라 삼국통일의 숨은 주역으로 공이 크다. 그는 진덕여왕 당시부터 무열왕, 문무왕, 신문왕대까지 당나라에 숙위로 머물며 22년간 온갖 풍상을 겪어야 했다.
김인문은 진평왕 51년인 629년에 신라 서라벌에서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둘째 아들로 탄생했다. 진덕여왕 5년, 651년 23세의 나이로 처음 당나라에 들어가 국왕의 호위와 외교 업무를 담당하는 등의 관직으로 설명되는 숙위의 역할을 맡게 됐다. 이때 당 고종의 신임을 얻으며 평생에 걸친 눈부신 대당 외교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무열왕 7년인 660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정벌하는 전쟁 당시 대당 외교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당나라 황제로부터 소정방대군의 부군대장군으로 임명되어 백제와의 전쟁에 앞장서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문무왕 집권기기인 661년부터 668년 사이에도 인문은 당나라 황제의 명을 받아 당나라 군을 인솔하며 고구려 정벌 전쟁에 참여했다. 형인 문무왕을 도와 여러 차례 당나라를 오가며 군사 지원을 요청하고 연합군 체제를 공고히 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668년 고구려 평양성 함락 당시에도 현장에서 큰 역할을 수행했다.
나당연합군이 고구려를 정벌하고, 신라를 삼키려던 당나라에 맞서 신라는 죽을 힘을 다해 전쟁에 임했다. 이 때문에 당나라 황제는 신라 문무왕의 관작을 박탈하고 김인문을 신라 왕으로 책봉하려 했다. 그러나 김인문은 끝내 이를 거절했다. 당 고종은 그를 옥에 가두어버렸다.
나당전쟁도 끝나고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했지만 김인문은 당나라에 억류돼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신라의 명필 강수가 당나라 황제에게 김인문의 석방을 호소하는 글을 올렸다. 강수의 명문장에 감동해 눈물까지 흘리며 당 황제는 인문의 석방과 신라로의 귀국을 허락했다.
그러나 김인문은 효소왕 3년인 694년 고국으로 돌아가는 날을 앞두고 당나라 수도 장안에서 향년 6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평생 7차례나 신라와 당을 오가며 외교적 헌신을 다한 그의 유해는 신라로 운구돼 경주 서악동에 안치됐다. 그의 무사귀국을 빌기 위해 지은 인용사는 관음도량에서 그의 사후 명복을 비는 아미타도량으로 전환했다. 효소왕은 그를 태대각간에 추서했다.

◆흔적: 인용사와 김인문묘
-인용사: 월성 남쪽 인왕동에서 발굴한 인용사가 있던 자리는 '경주 인왕동 사지(사적 제533호)'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 사찰 이름이 적힌 명문 기와 등이 직접 발견되지는 않았으나, 삼국유사 등의 기록을 유추하면서 학자들은 이곳을 인용사 터로 강력히 추정하고 있다.
인용사는 문무왕 당시 신라와 당나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당나라에 머물고 있던 김인문이 옥에 갇히는 등 위기에 처하자 그의 무사 귀환과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신라 사람들이 세운 원찰이다. 처음에는 김인문이 살아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관세음보살에게 기도하는 도량으로 건설했다. 694년 김인문이 결국 당나라 장안에서 죽어 유해가 신라로 돌아오자,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아미타불을 모시는 도량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발굴된 석탑 부재에는 팔부신중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어 통일신라 석조 예술의 진수를 보여준다. 아(亞)자형 건물지가 중문 자리에서 보기 드문 형태로 확인되어 건축사적으로도 매우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 다양한 석탑 소재와 함께 금동보살입상과 지진구 18점을 비롯 8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김인문은 당나라에서 신라의 이익을 대변하다 끝내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지만 신라 사람들은 인용사를 통해 그를 잊지 않고 기렸다. 월성 남쪽에 남아 있는 이 절터는 통일신라의 화려한 건축미와 함께 한 영웅을 향한 그리움이 서린 역사의 현장이다.

◆스토리텔링: 측천무후의 김인문
김인문은 진덕여왕 당시 23세의 혈기 넘치는 나이에 당나라 황실로 들어갔다.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해 당당한 신라의 땅을 구축하기 위해 당나라의 힘을 빌리기 위한 목적이 가장 큰 이유였다. 인문은 무엇보다 누이와 매부를 죽인 백제를 멸해야 하는 복수의 전쟁이 아버지 김춘추만큼이나 간절했다. 복수를 위해서는 당나라의 군사적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김인문은 아버지 춘추와 어머니 문희의 탁월한 신체적인 우성인자를 그대로 물려받아 마주하는 사람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흠모의 대상이 됐다. 그의 뛰어난 말재주와 친화력은 주변에 항상 많은 사람들이 머물게 했다.

백제가 한수와 뱃길을 가로막아 신라가 당나라로 오기 어렵다고 했다. 특히 당의 권세를 우습게 생각하는 고구려를 치려면 대륙으로 먼 길을 돌아오는 것보다 백제를 치고, 이어 바다와 신라를 통해 아래 위에서 합공을 하면 쉽게 이길 수 있다고 세뇌하듯 설득했다.
인문의 이러한 끈질긴 노력으로 측천무후는 드디어 백제를 공격하는 일에 당의 대군을 보내주기로 약속했다. 고종은 인문을 측천무후와 간격을 두기 위해 백제와 고구려를 정벌하는 전쟁에 김인문에게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겨 부대장군으로 임명했다.

674년, 당나라 황제 고종의 노여움은 하늘을 찔렀다. 신라가 당나라의 지배를 거부하고 나·당 전쟁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고종은 신라 문무왕의 모든 관작을 박탈하고, 곁에 있던 숙위 김인문을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의 형 법민(문무왕)은 배은망덕하다. 군사를 내어 도와주었더니 오리혀 황제의 군사를 공격하다니. 이제 내가 너를 신라의 새 왕으로 세울 것이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네 나라를 다스려라."
이는 김인문에게 주어진 가장 가혹한 형벌이었다. 형을 몰아내고 왕이 되어 금의환향할 것인가, 아니면 반역자가 되어 당나라 감옥에서 썩을 것인가. 당나라 황제는 화려한 어차와 황금 갑옷, 그리고 수만 명의 대군을 김인문에게 내주었다. 당나라 군사들은 김인문을 '신라 국왕'이라 부르며 압박했다.
김인문은 황제 앞에 엎드려 울면서 말했다. "제가 어찌 형님의 자리를 빼앗고 조국에 칼을 겨누는 왕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왕관이 아니라 저를 옭아매는 쇠사슬입니다"면서 신라의 왕이 될 수 없다고 매달렸다. 그리고 그는 병을 핑계로 더 이상 황제 앞에 나아가지 않았다. 신라로 향하는 당나라 군대를 돌리기 위해 밤마다 황제에게 표문을 올렸다. "신은 왕이 될 재목이 아니오니 부디 형님을 용서하시고 저를 다시 감옥으로 보내주소서."
측천무후도 이번만큼은 고종의 뜻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결국 인문은 왕관 대신 차디찬 옥방을 선택했다. 그 소식을 들은 신라의 문무왕은 아우의 깊은 뜻에 눈물을 흘리며 인용사를 지어 동생의 무사귀환을 축원하라고 명했다.
인용사의 종소리가 남천을 건너 들려올 때마다 신라 백성들은 권력의 유혹보다 조국과 형제를 먼저 생각했던 진정한 왕자 김인문을 떠올리며 그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빌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이 글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 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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