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책임자는 치어리더"…제자가 말하는 베이커 교수의 이유 있는 노벨상
'단백질 설계' 분야 대가로 2024년 노벨 화학상을 거머쥔 데이비드 베이커 미국 워싱턴대 교수. 그가 이끄는 연구실인 '베이커랩(bakerlab)'은 전 세계 단백질 설계 연구를 선도하는 곳이다. 베이커랩을 거친 제자들은 전 세계 곳곳에 흩어져 후학을 양성하거나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제자들은 베이커 교수에 대해 "이미 학계의 유명 인사였음에도 어디서나 연구원보다 자신을 앞세운 적이 없고, 수백명의 연구원과 일일이 대화하는 것이 취미일 정도로 상사라기보다 동료에 가까웠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노벨상 수상 이후에도 베이커 교수는 이전과 다름없는 모습을 보일 것이라는 게 그들의 한결같은 의견이다.
베이커랩에서 2021~2023년 연구원으로 일했던 이상민 포스텍 화학공학과 교수는 "베이커 교수가 '연구 책임자는 치어리더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던 것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베이커랩에는 300명이 넘는 사람이 있다.
제자들의 기억에 따르면 베이커 교수의 취미는 연구실을 돌아다니면서 연구원 한명 한명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매일 연구원에게 "지금 무슨 연구를 하고 있어?", "잘 안 풀리는 부분이 있어?" 등 질문을 건네며 연구원들을 북돋곤 했다.
2012년부터 2021년까지 베이커랩에서 박사후연구원과 연구 조교수를 지냈던 박한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뇌과학연구본부 선임연구원은 "연구실 규모가 매년 커져 연구원이 수백 명까지 늘어났다. 그런데도 변함없이 모든 연구원의 연구 내용과 연구 방향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고 각 연구에 맞게 조언을 해주는 모습에 무척 놀랐다"고 했다.
베이커 교수의 대화는 이야기 나누기에서 그치지 않고 협력을 이끌어낸다. 2012년부터 2015년까지 베이커랩에서 연구원 생활을 했던 박근완 KIST 강릉분원 천연물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연구원의 이야기를 들으며 부족한 부분이 발견되면 이를 보완해줄 수 있는 연구원을 찾아서 연결해줬다"면서 "단백질 설계는 이론적으로 단백질을 설계하는 것과 설계대로 단백질이 만들어지는지 실험하는 것이 유기적으로 빠르게 잘 연결돼야 하는데 그 연결을 도왔던 것이 베이커 교수"라고 말했다.
이 교수도 "베이커 교수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역할이 자신의 주된 역할이라고 생각했다"면서 "연구실에서 연결하는 게 부족하면 다른 연구실에서라도 찾아서 연결해줘서 협력해보라고 했다"고 했다.
베이커랩 공식 홈페이지는 "단백질 설계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이를 사용하여 의학, 기술 및 지속 가능성의 과제를 해결하는 분자를 만든다. 계산과 실험실 실험을 반복하면서 우리는 단백질 설계 방법을 지속적으로 개선한다"면서 "우리는 개방적이고 협력적인 과학을 믿으며, 항상 우리의 노력에 동참 할 새로운 사람을 찾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또 제자들은 베이커 교수가 스스로를 끝까지 '연구자'로 정의했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박근완 연구원은 "베이커 교수는 연구 동료라는 느낌이 강했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2, 3주마다 베이커랩에서는 학생들이 자신의 연구에 대해 발표를 하는 시간에 베이커 교수는 빠지지 않고 발표에 참여했다.
연구책임자라고 해서 맨 처음 발표하지 않았고, 연구 주제에 따라 정해진 순서를 지켰다. 외부에서 연구실 연구 방향에 결정적인 중요한 정보나 연구를 알게 되면 꼭 이 시간에 설명했다.
이 교수는 "베이커 교수는 성공 확률이 적어보이는 연구 주제가 떠오르면 제자한테 시키지 않고 직접 시도하곤 했다"면서 "직접 실험부터 코딩까지 했다"고 했다.
베이커 교수가 지향하는 수평적이고 도전적인 문화는 창의적인 연구 성과로 이어졌다. 베이커 교수를 따라 자유롭게 도전하는 문화가 있었던 것이다.
박한범 연구원은 "베이커랩은 성공을 했지만 실패도 많이 했다. 그만큼 연구원들이 많은 시도를 했기 때문"이라면서 "다양한 시도가 있어야 혁신적인 성과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박한범 연구원은 베이커랩에서 단백질로 이뤄진 모터인 '단백질 모터'를 설계해서 만드는 모습을 보고 도전적인 자세가 무척 놀라웠다고 말했다. 베이커랩은 코로나19 백신, 분무형 백신 등 개발을 진행 중이다.
백민경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도 2019년 5월 베이커랩에 합류해 2022년 7월까지 일했다. 베이커 교수는 불과 3년 전인 2021년 백 연구원과 함께 구글의 단백질 구조 예측 AI '알파폴드'에서 영감을 받아 단백질 설계 AI 모델인 '로제타폴드'를 만들었다.
수 분 내로 복잡한 단백질 구조를 해독해 로제타폴드는 2021년 사이언스의 ‘최고의 연구 성과’로 선정될 정도로 획기적인 결과였다. 베이커 교수의 제자들은 이같은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베이커랩 특유의 자유로운 분위기였기에 나올 수 있었던 성과라고 강조했다.
베이커랩의 문화는 한국에서도 하나 둘 꽃피울 준비를 하고 있다. 이 교수는 "베이커랩에서 배운 연구실 문화를 한국에 만들고 싶어서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박한범 연구원도 "베이커 교수를 통해 연구책임자라면 연구원들이 연구에 가장 잘 집중하도록 돕고 스스로도 연구에 몰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는 것을 배웠다"고 했다.
[이채린 기자 rini11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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