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가영이라는 이름 앞에는 언제나 ‘당구 여제’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그만큼 이 선수에게 요구되는 기준은 높고, 기대치는 늘 최고점에 맞춰져 있다. 그래서일까. 이번 LPBA 9차 투어 32강전에서 김가영이 보여준 모습은 단순한 16강 진출 이상의 의미를 남겼다. 결과만 놓고 보면 승부치기 끝에 어렵게 올라간 경기였지만, 과정을 들여다보면 지금 김가영이 어떤 국면에 서 있는지, 그리고 왜 여전히 김가영인지가 또렷하게 보인다.

경기 출발은 김가영다운 흐름이었다. 전지연을 상대로 1세트를 11대 2, 그것도 7이닝 만에 끝내며 경기장을 단숨에 장악했다. 초반 배치, 스트로크 리듬, 공 선택 모두 깔끔했다. ‘오늘은 쉽게 가겠다’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당구는 늘 그렇듯, 특히 LPBA 무대에서는 흐름이 한순간에 뒤집힌다. 2세트에서 김가영의 큐는 갑자기 무뎌졌다. 9이닝 동안 단 1점에 그쳤고, 전지연은 실수를 놓치지 않으며 11점을 채웠다. 스코어는 순식간에 1대 1이 됐다.
더 뼈아픈 장면은 3세트였다. 김가영은 중반까지 8대 5로 앞서 있었다. 평소라면 안정적으로 마무리했을 상황이다. 하지만 마지막 문턱에서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전지연의 뱅크샷이 살아났고, 남은 점수들이 연달아 들어갔다. 결국 8대 11 역전패. 세트스코어 1대 2. 한 세트만 더 내주면 탈락이었다. 이 장면은 최근 김가영의 시즌 흐름과도 닮아 있었다. 압도적인 기량은 여전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경기가 길어지고, 승부가 복잡해지는 모습 말이다.

그러나 김가영은 여기서 무너지지 않았다. 4세트 초구부터 달랐다. 4점, 다시 4점, 그리고 남은 점수를 한 번에 정리하며 11대 0 완봉승을 거뒀다. 점수보다 인상 깊었던 건 태도였다. 서두르지 않았고, 과하게 공격적이지도 않았다. 필요한 공만 정확하게 처리했다. 이 세트는 ‘당구 여제’라는 별명이 왜 아직 유효한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위기에서 스스로를 다시 세우는 힘, 그게 김가영의 가장 큰 무기다.
승부는 결국 승부치기로 이어졌다. 승부치기는 기술보다 심리가 더 크게 작용하는 영역이다. 선공과 후공, 단 한 번의 선택, 단 한 번의 스트로크가 모든 것을 바꾼다. 첫 번째 승부치기에서 두 선수 모두 1점에 그쳤고, 두 번째 승부치기에서는 전지연이 먼저 2점을 올렸다. 김가영은 3점 이상을 넣어야 이길 수 있는 상황에 몰렸다. 이 순간이야말로 경기의 백미였다. 김가영은 흔들리지 않았다. 뱅크샷 한 방을 포함해 정확히 3점을 채웠다. 결과는 4대 3. 숫자만 보면 박빙이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경험과 계산이 담겨 있었다.

같은 시간, 차유람의 경기에서는 정반대의 드라마가 펼쳐졌다. 차유람은 오수정을 상대로 2세트까지 완벽하게 앞섰다. 1세트와 2세트 모두 내용과 결과가 좋았고, 누구나 16강행을 예상했다. 하지만 3세트부터 흐름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리드를 잡고도 마무리를 하지 못했고, 오수정의 뱅크샷이 연달아 터지며 세트는 뒤집혔다. 4세트 역시 비슷한 그림이었다. 결국 세트스코어 2대 2, 승부치기. 그리고 단 한 점 차로 차유람은 고개를 숙였다.

이 장면에서 김가영과 차유람의 현재 위치가 교차된다. 두 선수 모두 기량은 충분하다. 하지만 긴 호흡의 승부에서 마지막 한 발을 쏠 수 있는 사람은 아직 김가영이다. 차유람에게 이번 탈락은 분명 아쉬운 결과지만, 동시에 LPBA 무대가 얼마나 냉정한지를 다시 한번 보여준다. 2대 0도, 흐름도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 끝까지 버틴 사람이 이긴다.
김가영에게 이번 16강 진출은 단순한 한 경기 승리가 아니다. 최근 정규투어에서의 부진, 64강 탈락이라는 낯선 경험, 그리고 팀리그에서의 반등과 MVP 수상, 윤곡 여성체육대상 대상까지. 감정의 고저가 극명했던 시즌 속에서 그는 다시 개인 투어에서 살아남는 법을 증명했다. 완벽하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 김가영다웠다. 모든 경기를 쉽게 이기는 선수는 없다. 중요한 건, 무너질 것 같은 순간에도 다음 샷을 준비하는 태도다.

이제 김가영은 16강에서 오수정을 만난다. 오수정 역시 차유람을 꺾고 올라온 기세가 만만치 않다. 하지만 분명한 건, 김가영은 이미 가장 큰 고비 하나를 넘었다는 점이다. 이런 경기 하나가 흐름을 바꾸기도 한다. 승부치기에서의 뱅크샷 한 방은 단순한 득점이 아니라, 자신에게 보내는 신호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신호 말이다.
LPBA 9차 투어의 이 한 경기는 결국 이렇게 남는다. 김가영은 또 한 번 벼랑 끝에서 살아 돌아왔고, 차유람은 다음을 기약하게 됐다. 그리고 팬들은 다시 확인했다. 왜 이 무대에서 김가영이라는 이름이 여전히 가장 무거운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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