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군대의 부대명에 숫자 ‘4’가 사라진 이유?

[이영훈의 노래가 품은 역사]
"4·3사건 진압" 거부하며 벌인 여순사건
희생자 가정의 심정을 담은 '여수야화'
"민심에 악영향" 이유로 최초의 금지곡돼
19살 백순례 처형 당한 사연의 '산동애가'
박정희는 남로당 조직원 색출 때 발각돼

10월 19일은 여순사건 76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날 여수시는 이순신광장에서 ‘상생으로 피운 동백, 미래의 빛으로’라는 주제로 희생자 합동추념식을 개최했다. 순천시는 18일부터 31일까지 영동1번지와 남문터광장 등에서 '평화와 치유의 울림'을 주제로 여순사건 주간 인문행사를 열고 있다.

대한민국 최초의 금지곡

여순사건을 소재로 한 대표적인 대중가요로는 ‘여수야화’(麗水夜話)가 있다.

‘여수야화’는 김초향이 노랫말을 짓고 이봉룡이 곡을 붙여, 남인수가 부른 노래다. 이 노래는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에 불복종해 반란을 일으킨 ‘여순사건’으로 인해 집과 가족을 잃은 한 가정의 모습을 구슬프게 담아내고 있다.

무너진 여수항에 우는 물새야
우리 집 선돌 아범 어데로 갔나요
창 없는 빈집 속에 달빛이 새여들면
철없는 새끼들은 웃고만 있네
가슴을 파고드는 저녁 바람아
북청 간 딸 소식을 전해 주려무나
에미는 이 모양이 되었다만은
우리 딸 살림살인 허벅지더냐
왜놈이 물러갈 땐 조용하더니
오늘엔 식구끼리 싸움은 왜 하나요
의견이 안 맞으면 따지고 살지
우리 집 태운 사람 얼굴 좀 보자

남인수가 부른 '여수야화'

‘여수야화’는 노래가 나온 지 얼마 안 지난 1949년 9월 1일에 대한민국 최초의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여수야화’가 가사가 불순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민심에 악영향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음반판매와 공연을 금지시킨 것이다. 이후 악보 출판과 방송 등도 금지되었다.

1949년 이후 ‘여수야화’는 가요계에서 완전 사라졌다. 심지어 1960년대 이후 금지곡을 지정 관리했던 정부기관인 ‘공연윤리위원회’(공윤)와 ‘방송윤리위원회’(방윤)의 금지곡 목록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작품의 존재 자체가 기록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경찰을 타도하자” 14연대의 반란

‘여순사건’은 한때 ‘여수·순천 반란사건’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지금은 ‘반란’이라는 용어를 잘 쓰지는 않는다. 다른 명칭으로는 진영에 따라 ‘여순군란’, ‘여순폭동’, ‘여순항쟁’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순사건’의 시작은 여수에 주둔한 국방경비대(국군 전신) 제14연대의 반란에서 시작됐다. 1948년 10월 15~16일 육군본부는 제주 4·3사건 진압을 목적으로 14연대의 제주도 파병 계획을 하달했다. 이는 14연대 내 남로당 조직에도 전파되었다.

좌익계 군인에 대한 숙군 불안감과 제주도 파병에 대한 반발감이 겹치면서 연대 내의 남로당 조직원들은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정한다. 10월 19일 오전 7시 육군본부로부터 제주도 출항 명령이 하달됐다. 이날 저녁 인사과 선임하사관 지창수 상사는 장교들이 부재한 틈을 타 부대원들을 연병장에 소집시킨다. 그는 연단에서 “경찰을 타도하고,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하자”라며 부대원들을 선동한다.

지창수를 따르는 병사들이 곳곳에서 “옳소! 옳소!”하면서 동조했다. 당시 3명의 장교와 하사관이 나서 “지창수 너 어쩌자는 거냐? 여러분, 불순분자의 선전에 넘어가서는 안됩니다”라며 반대했지만 그 자리에서 모두 사살됐다.

지창수를 신임 연대장으로 추대한 반란군은 즉시 여수로 진격했다. 이때 반란에 참여한 인원은 1,000~2,000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사실상 무방비 상태와 다름없던 여수는 반란군의 공격에 손쉽게 함락되었다.

여수의 주요 공공건물에는 일제히 대형 인민공화국 깃발이 게양됐다. 반란군은 또 ‘인공 수립 만세’, ‘제주도 출동 반대’ 같은 성명서를 여수 읍내 곳곳에 붙였다. 당시 설치된 여수인민위원회의 결정서 6개항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인민위원회의 여수 행정기구 접수를 인정한다.
2. 조선인민공화국에 대한 수호와 충성을 맹세한다.
3. 대한민국 분쇄를 맹세한다.
4. 남한 정부의 모든 법령을 무효로 선언한다.
5. 친일파, 민족반역자, 경찰관 등을 철저히 소탕한다.
6.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실시한다.

반란군은 다시 병력의 대다수를 열차를 이용하여 순천으로 이동시켰다. 순천 경찰은 반란군에 맞서 응전했으나 패퇴했다. 20일 오후 순천도 함락되었다. 이 과정에서 순천에 파견 나와 있던 홍순석의 2개 중대와, 광주 제4연대 소속 진압군이 반란군에 합류했다. 사기가 높아진 반란군은 주변 지역으로 공격을 속행했다. 그 결과 22일에는 전남 동부 지역의 6개 군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진압 작전으로 불 타고 있는 여수시내.

시가전 끝에 반란군 제압한 국군

제14연대의 반란 소식이 상부로 전해지기 시작한 것은 19일에서 20일로 넘어가는 새벽이었다. 20일에 개최된 미 군사고문단 수뇌부 회의에서는 광주에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를 조직할 것을 결정했다. 진압군 지휘는 육군총참모장 송호성이 맡았고, 거의 1개 사단 규모가 진압작전에 나서게 되었다.

10월 21일 정부에 의해 여수와 순천 지역에 계엄령이 발효되었다. 순천시가지 수복작전은 21일 오후 10시부터 시작되었고, 첫 교전이 서면 학구리에서 벌어졌다. 여기에서 승기를 잡은 진압군은 그대로 시내로 진격했으며, 하루가 넘는 교전 끝에 23일에는 순천을 완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반란군의 주력은 순천에서 도주했고, 진압군에 대항한 것은 잔여 병력과 무장한 시민들이었다. 이후 진압군은 기세를 몰아 인근 광양과 보성까지 수복했다. 이어서 이틀간에 걸친 시가전 끝에 여수도 10월 27일 완전히 진압군에 의해 장악됐다. 이로써 여순사건은 종결되었다.

초기 진압작전의 실패로 궁지에 몰린 군은 강경한 작전을 구사하였으며, 민가에 대한 철저한 수색을 통해 반란군 협력자를 모두 색출하고자 했다. 당시 천일고무공장에서 생산한 ‘찌까다비’(일할 때 신는 신발)를 신었다는 이유, 머리를 짧게 깎았다는 이유, 국방색 러닝셔츠나 팬티를 입었다는 이유, 손에 기름때가 묻었다는 이유 등이 ‘반란군’ 가담자 또는 협력자의 기준이 되기도 했다.

순천지역의 들판에 내버려있는 시신들. 사진은 미국의 Life지 기자였던 칼 마이던스(1907~2004)가 여수와 순천의 사건 현장에서 직접 찍었다. 사진=지영사/연합뉴스

이때 이른바 ‘손가락총’이 등장한다. 부역자를 색출하기 위해 학교 운동장에 모인 사람들의 생명을 좌우하는 것은 손가락질이었다. 이 과정에서 반란군과는 무관한 민간인 상당수가 희생되었다. 이를 보도한 1948년 10월 29일자 조선일보 기사다.

“손가락이 한 번 가르쳐진 사람은 사정없이 끌려 나간다. 끌려 나간 사람들은 또다시 그 집단 속에서 자기와 같이 행동을 했던 사람들을 지목하도록 명령을 받는다. 손가락질 한 번에 끌려 나오면 생명의 위험을 직감하게 되는 것이요, 변명하려해도 아무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 자식아 눈깔이 뒤집혔느냐’, ‘내가 언제 폭도에 가담하였느냐’ 고함을 쳐보지만, 소용없는 짓이요. 당장에 경찰관에게 제지당하고 만다.

이리하고 있는 동안에 학교 마당 남쪽 구덩이에 15명의 청년이 포박된 채 끌려 나와 선다. 경관대가 한 사람씩 맡아서 약 10미터 뒤에 선다. ‘카빈’총의 발사와 함께 그들은 앞으로 꼬꾸라진다. 제2탄, 제3탄이 쓰러진 그들에게로 다시 발사 되였다. 운동장 안의 각 집단에서는 약속한 듯이 눈을 감고 손으로 얼굴들을 가린다.”

한편 여수를 포기하고 지리산으로 입산한 반란군은 11월경부터 진압군과 간헐적인 교전을 벌이는 등 빨치산으로서 활동하였다. 이에 국군은 이듬해까지 토벌작전을 전개하여 여순사건의 주모자인 김지회, 홍순석, 지창수 등을 잇달아 생포하거나 사살했다.

남로당 조직원 불고 풀려난 박정희

여순사건은 결과적으로는 이승만 대통령의 철권통치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부는 여순사건을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일어난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이라고 비난하며, 반란 주동에 직·간접적으로 관계되어 있던 좌파 계열에 대한 대대적 공세에 나섰다. 아울러 정부의 위기감은 군내의 좌파 세력을 색출하고자 하는 숙군사업의 강화로 이어졌다. 1948년 12월1일 국가보안법이 제정됐다.

이 무렵 박정희 전 대통령도 육본 정보국에 체포되었다. 남로당 군총책 이재복에 이어 비서 겸 군사연락책인 김영식이 붙잡혔는데, 김영식의 남로당 군 장교 명단에 ‘박정희 소령’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체포된 박정희에게 헌병 둘이 달려들어 바지 벨트를 풀고 상의를 벗겼다. 이어서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팼다. 박정희의 코에서 코피가 쏟아졌다. 거친 군화발이 쓰러진 그의 허벅지와 옆구리를 밟고 머리도 짓밟았다.

이후 박정희는 수사 과정에서 사실을 순순히 시인하면서 군내 남로당 조직원 약 300명의 명단을 제공한다. 이 공로로 그는 사형을 면하고 군복을 벗게 된다. 이 과정에서 백선엽, 정일권, 장도영, 김창룡, 원용덕 등이 박정희 구명에 힘을 썼다. 백선엽 회고록 ‘군과 나’의 한 대목이다.

“어느 날 방첩대의 김안일 소령이 박정희 소령을 나에게 데려왔다. 박 소령은 한참을 묵묵히 앉아 있다가 입을 열었다. ‘나를 한 번 도와주실 수 없겠습니까.’ 작업복 차림의 그는 측은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면담 도중 전혀 비굴하지 않고 시종 의연한 자세를 취했다. 어려운 처지에서도 침착한 그의 태도가 일순 나를 감동시켰다. ‘도와 드리지요.’ 참으로 무심결에 이러한 대답이 나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여순사건 이후 안 그래도 죽을 사(死)와 발음이 같아 불길한 숫자 취급을 받던 ‘4’는 대한민국 육군의 독립 부대명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14연대는 당연히 없어졌고, 일부가 반란에 가담한 4연대는 20연대(현 제20기갑여단)로 재편되었다.

열아홉 살 처녀의 마지막 노래

여순사건과 관련된 노래는 ‘여수야화’ 외에 ‘산동애가’라는 노래가 있다. 전남 구례군 산동면에 살고 있던 당시 열아홉 살 처녀 백순례. 그녀는 둘째오빠 백남승이 여순사건 관련자로 처형되고, 셋째오빠 백남극까지 처형될 위기에 처하자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스스로 오빠 대신 경찰에 끌려가 처형됐다.

경찰에 의해 처형장으로 끌려가면서 그녀가 마지막으로 애절하게 불렀던 노래가 바로 ‘산동애가’였다고 한다. 이 노래는 이후 촌로의 입을 통해 가까스로 구전됐다.

잘 있거라 산동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열아홉 꽃봉오리 열아홉 꽃봉오리
피워 보지 못한 채로
화엄사 종소리에 병든 다리 절며절며
달비 머리 풀어 얹고 원한의 넋이 되어
노고단 골짜기에 이름 없이 쓰러졌네

이효정이 부른 '산동애가'


이영훈 가요연구가는 국제신문, 동아일보 등에서 신문기자로 20여 년간 근무하다 방송으로 옮겨 10년째 기자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채널A 보도본부에 근무하면서 메인뉴스 편집데스크와 디지털뉴스부장을 지냈고 쾌도난마, 뉴스톱텐 등 여러 시사 프로그램의 제작데스크로 일해 왔다. 보도본부 선임기자를 거쳐 현재는 심의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는 <파벌로 보는 한국야당사>, <한국정치, 바람만이 아는 대답>, <유행가는 역사다>, <그 노래는 왜 금지곡이 되었을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