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란은 1977년 영화 '처녀의 성'으로 대종상 신인상을 받으며 눈도장을 찍었다.


이후 드라마 '옥녀'를 시작으로 브라운관에서 맹활약하며 1980년대 최고의 사극 전문 여배우로 자리 잡았다.


조선왕조 오백년 시리즈부터 '용의 눈물'까지 조선시대 주요 여인들을 거의 모두 소화했다.

김영란은 당시 최고 인기 드라마였던 '전원일기'에도 출연했다.
김회장의 둘째딸 역할을 맡아 시청자들에게 친근한 이미지로도 사랑받았다.

1983년, 김영란은 4살 연상의 사업가와 첫 번째 결혼을 했다.

남편은 전라북도 종갓집의 장손이었다.
수많은 제사와 차례, 집안 대소사를 챙겨야 하는 종갓집 문화는 스물일곱 어린 신부에게 큰 부담이었다.
밤늦게 촬영을 마치고 돌아온 집에서조차 가족들의 배려는 없었다.
자신의 잠을 깨우는 TV 소리에 당혹스러워하며, 딸로서의 삶과 며느리로서의 삶의 차이를 절실히 느꼈다.

첫 이혼의 아픔을 딛고 1990년 사업가 출신 두 번째 남편을 만나 재혼했다.
슬하에 아들과 딸을 두고 새롭게 가정을 꾸렸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두 번째 이혼 당시에는 양육권과 친권 모두 남편에게 넘어갔다.
김영란은 방송에서 당시를 회상하며 "변호사조차 양육권을 가져올 방법이 없다며 울어보라고 했을 정도였다"고 담담히 털어놨다.
결국 아이들은 아버지와 지내야 했고, 김영란은 멀리서 자식들을 바라보며 마음을 졸이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두 번째 이혼 후 아이들의 유학을 위해 김영란은 10년 넘게 '기러기 엄마'로 살아야 했다.
당시엔 '기러기'라는 말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도 아이들을 위해 묵묵히 한국에서 홀로 살았다.

동네 작은 사우나에서 반찬을 싸 가 이웃과 밥을 먹으며 외로움을 달랬다고 회상했다.
밤마다 시차를 고려해 전화기를 베개 옆에 두고 자식들의 연락을 기다리던 날들이 이어졌다.

오랜 홀로 생활 속에서도 김영란은 긍정적인 태도를 잃지 않았다.
최근 방송에서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 한다. 혼자 있는 것도 이젠 편하고 즐겁다"며 미소 지었다.
또한 무기력증을 이겨내기 위해 여행을 떠나고, 자연 속에서 새로운 에너지를 얻으려 노력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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