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영웅까지는 아닌 것 같고... 그냥 ‘나가서 금메달 따야지’라는 생각으로는 그렇게 못할 것 같아요. 선배 언니들로부터 대대로 내려온 책임감 때문에 준비도 더 철저히 하는 것이고요. 양궁은 무조건 금메달이라는 인식이 있지만 저희는 도전자들이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게 항상 무섭더라고요. 1점 차이로 이기고, 한 발 승부로 이기고, 그렇게 이기는 거지 단 한 번도 금메달이 당연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안녕하세요! 로빈후드 5기입니다.
여러분은 ‘양궁’ 하면 어떤 선수가 떠오르시나요? 수많은 선수와 지도자들이 모여 오랜 세월 동안 한국 양궁을 빛내었습니다. 하지만 최고의 선수가 동시에 최고의 지도자로 남은 사례는 찾기 힘듭니다. 그리고 오늘은 그 불가능한 일을 해내신, 선수로서도, 지도자로서도 금메달이었던 대한민국 양궁의 전설 박성현 감독님의 발자취를 돌아보겠습니다.

괴물 신예 박성현
선생님께서 양궁을 추천해주셨어요. 당시에는 양궁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지만, 재미있고 흥미로울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의 저를 만들어주신 그 선생님께 정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2000년 대한민국 여자 양궁은 최고의 한 해를 보냈습니다. 양궁 ‘GOAT’ 김수녕 선수가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이후 8년 만에 대표팀에 복귀하여 유럽 그랑프리에서 우승했고,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 단체전 올림픽 4연패, 개인전은 윤미진 선수가 금메달, 김남순 선수가 은메달, 김수녕 선수가 동메달을 획득하며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12년 만에 포디움 스윕을 달성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양궁 국가대표 선발전의 난이도가 올림픽보다 어렵다고 하죠, ‘시드니 신화’를 완성 했던 윤미진, 김남순, 김수녕 세 선수 모두 2001년 태극마크를 달지 못했습니다. 2001년 베이징 세계선수권에 출전할 선수들의 이름은 최남옥, 최진,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카메라를 무려 두 번이나 명중시킨 후 은퇴했다가 3년 만에 돌아온 김경욱 선수 그리고 만 18세 박성현 선수였습니다. 무명 선수였지만 생애 첫 국제대회였던 코리아 오픈 단체전 우승의 1등 공신은 박성현 선수였습니다. 9발 중 6발을 10점에 적중킨 박성현의 활약에 힘입어 대한민국은 시드니 올림픽 결승에서 맞붙었던 우크라이나를 한 번 더 격침시키고 포디움 정상에 올랐습니다.

박성현 선수의 활약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그 해 7월에 열린 ‘피터스 애로우’ 대회에서 대한민국의 최진에 이어 은메달을 획득하였고, 2001년 하이라이트인 베이징 세계선수권에서 1996 올림픽 챔피언 김경욱 선수를 두 번의 연장전 끝에 이기고 금메달을 획득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이 세계선수권 여자 개인전 3연패 타이틀을 차지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제 박성현 선수의 수식어는 신예, 무명이 아닌 ‘월드 챔피언’이었고, 그 해 박경모 선수와 함께 2001년 대한양궁협회에 의해 우수선수로 선정되었습니다.

2002년 박성현 선수는 한 번 더 태극마크를 지켰습니다. 시드니 올림픽에서 여자 대표팀의 대활약으로 양궁에 대한 기대가 높아진 때에, 박성현 선수와 호흡을 맞춘 대표팀 선수들은 박희윤, 김문정 2000 올림픽 챔피언 윤미진 선수였습니다. 다시 한 번 최고의 엔트리를 구성한 여자 대표팀은 유럽 그랑프리 대회에서 단체전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이 대회 개인전에서 우리 대표팀 4명의 선수가 모두 4강에 진출하였지만 박성현 선수는 그 중 4위였고, 2002 부산 아시안게임에서도 예선 5위로 개인전에 출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박성현 선수는 단체전에서 자신의 몫을 100% 해내며 김문정, 윤미진 선수와 함께 대만을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2003년은 다시 세계선수권이 열리는 해였고, 박성현 선수는 그 해 열린 종별선수권 대회에서 50M (350/360), 개인종합 (1,388/1,440), 단체전 (4,101/4,320, 비공식)에서 세계신기록을 수립했습니다. 국제대회에서는 이현정 선수, 소속팀 동료 박미경 선수, 이전 시즌 호흡을 맞춘 윤미진 선수와 함께 세계선수권 단체전 금메달을 획득하였습니다. 개인전에서는 결승까지 진출하였고, 박성현 선수의 은메달과 함께 윤미진 선수가 금메달, 이현정 선수가 동메달을 따며 우리 대표팀은 사상 첫 세계선수권 포디움 스윕까지 이루어냈습니다. 그 해 있었던 프레올림픽(올림픽 1년 전 개최지에서 올림픽과 똑같은 방식으로 치르는 대회)에서 개인전 동메달, 그리고 대구 세계대학경기대회에서 마침내 대한민국 국민들이 지켜보는 대회에서 개인전 정상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은메달은 윤미진 선수, 동메달은 이현정 선수로 다시 한 번 대한민국 대표팀은 포디움 스윕을 달성했습니다.
챔피언 박성현

스스로를 통제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아무리 자세나 타이밍이 좋아도, 너무 감정에 휩싸이거나 긴장하면 단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것을 망칠 수 있습니다. 대회에서는 모든 선수가 경쟁자가 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경기 중에는 제가 싸우는 유일한 상대는 저 자신이죠.
2004년은 박성현 선수의 선수 시절 커리어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한 해일 것입니다. 이제 대한민국 대표팀 에이스 박성현 선수에게 다가올 무대는 2004 아테네 올림픽이고, 대표팀은 올림픽 디펜딩 챔피언 윤미진 선수와 신예 이성진 선수로 구성되었습니다. 세계 최강 여자 대표팀은 올림픽 전초전인 그랑프리 대회에서 두 개의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예열을 마쳤습니다. 박성현 선수는 올림픽공원 경륜장에서 열린 특별 훈련에서도 팀 내 1위에 오르며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기간 박성현 선수의 담력을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 대표팀은 아테네 근처 코린트 운하에 방문했는데, 감독까지 포함해서 모든 선수들이 무려 120m 위에서 번지점프를 해야 했습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죠. 서거원 감독은 '누가 뛰어내릴래?'라고 선수단에게 물어봤고, 가장 먼저 손을 든 선수는 박성현 선수였습니다.

최고의 담력을 가진 박성현 선수는 아테네 올림픽에서 자신의 기량을 100% 발휘했습니다. 랭킹 라운드에서 720점 만점에 682점으로 세계신기록을 세웠고, 2015년 기보배 선수가 경신하기 전 까지 11년 동안 깨지지 않았습니다. 이후 개인전에서 박성현 선수를 상징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박성현 선수는 64강부터 16강까지의 경기(180점 만점)에서 평균 27점 차이로 상대를 압도했고, 8강도 111-101이라는 여유 있는 점수 차이로 4강에 진출했습니다.

그리고 4강전 3엔드 첫 번째 발을 과녁 한가운데에 적중시키며 과녁 중앙에 달린 카메라를 격파했습니다. 1996년 김경욱 선수 에 이어 8년 만에 대한민국 선수가 다시 한 번 ‘카메라 브레이커’의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결과는 110-100, 8강과 똑같이 10점 차이로 승리를 거두고 결승에 올라갔습니다. 결승전에서도 우리나라의 이성진 선수를 꺾고 110-108로 개인전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대한민국의 여자 개인전 6연패를 달성하는 최고의 순간이었지만, 박성현 선수 본인은 기쁨보다는 팀워크도 잘 맞고 준비도 열심히 했는데, 후배를 꺾고 금메달을 딴 것이 미안했다고 밝혔습니다.

제가 우승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여기까지 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만 생각했어요. 경기가 끝났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이 나왔고,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을 안 뒤에야 기쁨이 느껴졌습니다.

2004년처럼 팀워크가 좋았던 적이 없었어요.
이어진 단체전에서도 박성현 선수의 활약은 계속되었습니다. 우리 대표팀은 ‘무조건 금메달’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역대 최고의 전력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중국과의 결승전은 팽팽했습니다. 마지막 순간, 9점을 쏘면 지는 상황에서 박성현 선수는 승리를 확정짓는 10점을 쏘았고, 단체전 올림픽 5연패의 1등 공신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박성현 선수는 1988 김수녕, 1992 조윤정, 1996 김경욱, 2000 윤미진에 이어 또 한 명의 대한민국의 올림픽 2관왕 계보에 이름을 올렸으며, 김수녕 선수(1988 올림픽, 1989 세계선수권)과 윤미진 선수(2000 올림픽, 2003 세계선수권)에 이어 역대 3번째로 올림픽과 세계선수권을 모두 석권한 대한민국 선수가 되었습니다.
그거 아세요? 제가 10점을 노렸다면 아마 못 쐈을 거예요. 운명에 맡기고 마음을 내려놓았고, 그때서야 차분함을 되찾았습니다. 상대 선수 중 가장 인상깊은 선수는 장쥐안쥐안입니다. 베이징 때 다시 만나고 싶네요.

1년 내내 언터쳐블의 모습을 보여준 박성현 선수의 활약은 올림픽보다 어렵다는 전국체전에서도 계속되었습니다. 박성현 선수는 1,440점 만점에 1,405점(평균 9.76점)을 쏘며 세계 최초로 ‘1,400 배지’를 수여받았는데, 2026년 현재까지 이 배지를 수여한 사람은 전 세계에 단 3명(박성현(2004), 유수정, 안산(이상 2020))이라고 합니다. 전국체전 MVP도 당연히 이 대회에서 5개의 금메달을 딴 박성현 선수의 차지였고, 이후 양궁 선수가 전국체전 MVP를 차지한 사례가 나오기까지 10년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2014년 오진혁 선수). 이 1,405점이라는 기록은 개인전에서 카메라를 깨는 장면, 단체 전에서 10점에 꽃힌 마지막 화살과 함께 박성현 선수를 상징하는 장면으로 꼽힙니다.
리더 박성현
2005년 박성현 선수는 코리아오픈 대회에서 우승하였고, 마드리드 세계선수권에서 단체전 금메달과 개인전 동메달을 획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해 열린 아시아선수권에서 우승하며 아시아 챔피언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듬해 2006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다시 한 번 2관왕에 오르며 양궁 사상 첫 그랜드슬램을 달성했습니다. 그랜드슬램이란 양궁 4대 대회(올림픽 - 2004년 우승, 세계선수권 - 2001년 우승, 아시아선수권 - 2005년 우승, 아시안게임 - 2006년 우승)을 모두 우승하는 것으로, 전 세계에 박성현 선수와 김우진 선수만 그랜드슬램을 달성했습니다.

2007년은 박성현 선수의 가치가 가장 빛났던 해 중 하나입니다. 그저 10점을 많이 쏘고, 많은 메달을 따왔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대표팀에는 올림픽 챔피언 김경욱 선수와 윤미진 선수가 고참으로서 팀을 이끌었지만, 이 해 대표팀 멤버는 대표팀 1년차 최은영 선수와 만 15세 이특영 선수로, 최고참 박성현의 역할이 중요한 해였습니다. 박성현 선수는 시즌 첫 대회였던 울산 코리아오픈에서 우승했는데, 이 대회 결승전에서 또 한 번 과녁 정중앙에 화살을 명중시키며 카메라를 깼습니다. 상대 또한 대한민국의 최은영 선수였는데, 최은영 선수 역시 카메라를 깨며 국제대회 결승전에서 두 명의 한국 선수가 모두 카메라를 깨는 명장면이 나왔습니다.

단체전에서는 리더 박성현 선수를 비롯해 최은영 선수와 이특영 선수 모두 환상의 호흡을 보여주며 안탈리아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를, 라이프치히 세계선수권에서 대만을 상대로 단 한 차례의 위기도 없이 단체전 우승을 차지했고, 박성현 선수는 개인전에서도 4년 만에 결승에 올라 은메달을 획득함과 함께, 세계선수권 4개 대회 연속 개인전 메달 획득과 함께 ‘올 포디움’ 기록을 수립했습니다. 그리고 시즌 마지막 대회였던 베이징 프레올림픽에서도 우승하며 금빛으로 시즌을 마무리했습니다.

2008년은 베이징 올림픽이 열리는 해로, 박성현 선수는 포레치 월드컵과 안탈리아 월드컵에서 모두 개인전 동메달, 마지막 월드컵인 보에 월드컵에서 금메달을 획득합니다. 이 보에 월드컵 우승은 박성현이 국제대회에서 마지막으로 이룬 개인전 우승입니다. 단체전에서는 첫 올림픽에 출전하는 주현정과 윤옥희에 이어 마지막 주자를 맡았습니다. 중국 홈 관중의 일방적인 응원에도 불구하고 작년 세계선수권에서 보여준 리더십을 이번에도 보여주었고, 대표팀은 중국을 224-215로 꺾으며 단체전 6연패를 달성했습니다. 아테네 올림픽 금메달을 확정짓는 10점에 이어, 이번에도 우승을 확정짓는 엑스텐 또한 박성현 선수의 손에서 나왔습니다.

박성현 선수는 개인전에서 승리한 5경기에서 평균 12점 차이로 결승에 진출하여 은메달을 획득하였고, 그 해 월드컵 파이널에서 생애 첫 파이널 메달인 은메달을 획득하며 국가대표 경력을 마무리했습니다. 이렇게 박성현 선수는 박경모 선수에 이어 3대 이벤트(올림픽, 세계선수권, 월드컵 파이널)에서 모두 메달을 획득한 두 번째 대한민국 선수가 되었고, 박성현 선수의 2008 시즌은 올 포디움 시즌이었고, 전국체전에서 70M 금메달을 따내며 여전한 기량을 과시했습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더 잘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제 마지막 올림픽이라 금메달에 대한 욕심이 너무 컸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훈련했고, 후회는 없습니다.
2009년 전국체전에서도 70M와 30M 정상에 올랐고, 특히 30M에서 만점에 딱 1점이 모자른 359점으로 대회 신기록을 경신합니다. 또한 2008 체전에서는 32강에서 탈락했지만 2009년 체전에서는 모든 경 기에서 110점 이상이라는 고득점으로 동메달을 획득하며 아쉬움을 털어냅니다. 동메달 결정전에서 박성현 선수를 상대한 선수는 2012년 런던을 빛낼 진해시청의 최현주 선수였습니다. 이듬해 박성현 선수는 2010 종별선수권에 출전해서 1329점으로 21위를 기록했습니다. 대통령기에서 30M, 50M, 종합 1위, 대학실업양궁대회에서 3개의 은메달과 종합 1위, 실업연맹회장기에서 1356점으로 13위, 대통령기에서 1354점으로 36위, 전국체전에서 1360점으로 17위에 올랐습니다. 2011 전국체전 64강에서 부산도시공사 조은애 선수를 6-0으로 꺾은 경기가 커리어 마지막 승리, 32강에서 허윤정 선수에게 연장전 끝에 5-6으로 패한 것이 ‘선수 박성현’의 마지막 경기였습니다.
지도자 박성현
제가 2012 런던 올림픽에 갈 수 있도록 가장 크게 일조하신 분이 저희 그때 감독님이시거든요. 제가 그만둘 생각을 하면 "성진아, 양궁 그만두면 뭐 하려고?"라고 잡아주시고 저를 정말 많이 걱정해주셨어요. 그 때 저를 잡아주시지 않았다면 런던의 저는 없었을 거예요.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박성현 선수가 금메달을 땄을 때 결승 상대는 이성진 선수였습니다. 이성진 선수는 2005 세계선수권과 세계대학경기대회에서 연달아 우승하며 세계 랭킹 1위에 올랐습니다. 올림픽이 열리기 1년 전이었던 2007년에도 아시아선수권에서 우승하며 베이징 올림픽을 정조준했지만, 어깨 부상으로 인해 수술대에 올라가야 했습니다. 온 나라가 베이징 올림픽에 열광할 2008년 이성진 선수는 힘든 재활의 터널을 거쳐야 했으며, 1년 휴식을 취한 후 첫 대회인 2009 종별선수권에서 39위, 거리별 순위는 역시 30-40위권이었고, 두 번째 대회였던 대통령기에서는 예선을 48위로 마쳤고, 본선에서는 첫 경기였던 64강의 벽을 넘지 못했습니다.
감독님께서 한 번 진짜 제 정신을 차리게 해주신 적이 있어요. 부상에서 복귀한 후 첫 대회 성적이 너무 안 좋아서 엄청 울었어요. ‘내가 이걸 보려고 양궁을 다시 시작했나’라는 생각도 들었는데 박성현 감독님께서 “복귀하자마자 1등 하기를 바란 거야? 그럼 남들의 노력은 뭐가 되냐.”라고 말씀해주셔서 그때 딱 정신을 차리게 된 것이죠. 올라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양궁은 감으로 쏘는 것인데 어느 순간 몸이 조금 회복되면 감은 쉽게 잡을 수 있어요. 이성진 선수가 저를 믿어줬다는 것이 오히려 고맙죠.
이후 박성현 선수의 도움 끝에 일어선 이성진 선수는 2012 런던 올림픽 대표팀에 승선하여, 한국 양궁 최초로 부상으로 올림픽 선발전에서 탈락한 후 올림픽 대표팀에 재승선한 선수가 되었습니다. 이성진 선수는 단체전에서 맨 첫 주자로 올림픽 7연패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세상은 박성현 선수와 이성진 선수를 라이벌이라고 불렀지만, 사실 두 선수는 눈빛만 봐도 아는 사이이자 함께 한국 양궁의 발전을 이룬 동반자였습니다.

이성진 선수가 런던을 빛내는 동안 런던 지하철은 전 세계 스포츠 스타 361명의 이름을 따서 역에 이름을 붙였는데, 우리나라는 박태환 선수와 함께 박성현 선수가 선정되었습니다. 즉 올림픽 기간 런던에 가면 ‘박태환 역’과 ‘박성현 역’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박성현 본인은 ‘박성현 역에 가 봤는데, 내 얼굴이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없었다’라며 웃음을 보였습니다.

2012년 선수 시절 몸담은 전북도청에 부임한 박성현 감독의 지도를 받아 국가대표로 발탁된 선수도 있습니다. 2016년 계명대학교를 졸업한 전인아 선수는 2017년 전북도청에 입단하였고 2019년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습니다. 이후 전인아 선수는 도쿄 프레올림픽에서 김우진 선수와 호흡을 맞추어 16강부터 결승까지 단 한 점도 내주지 않으며 혼성 단체전 금메달을 획득하였습니다. 또한 2018년 전국체전에서 메달 5개를 딴 광주여자대학교 곽진영 선수 또한 전북도청에 입단한 후 2020 국가대표로 선발되었습니다.

박성현 감독은 지도력을 인정받아 2022년 여자 국가대표팀의 사령탑을 잡았고, 여자 대표팀은 홈에서 열린 광주 월드컵에서 단체전, 개인전에서 모두 정상에 오르며 국민들을 행복하게 해주었습니다. 그 해 여자 대표팀은 안산, 강채영, 최미선, 이가현으로 구성되었는데, 광주 월드컵에서 광주여대 출신 최미선 선수가 정상에 오른 데 이어 파리 월드컵에서 동메달 하나를 보탰고, 메데진 월드컵에서 안산, 이가현, 강채영이 단체전 우승과 함께 개인전 포디움 스윕까지 달성하여 우리 대표팀은 박성현 감독과 함께 최고의 한 해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지도자 박성현’을 상징하는 선수도 있습니다. 2008년 전국체전에서 박성현 선수의 70M 점수는 317점으로 1위였고, 박성현 선수와 함께 금메달을 수상한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 선수는 6살 어린 소속팀 동료 오유현 선수였습니다. 당시 만 19세였던 오유현 선수는 해당 전국체전에서 30M에서 금메달(355점)을 획득하며 2관왕에 오를 정도로 출중한 기량을 뽐냈지만, 몇 년 후 어깨 부상을 입어 은퇴의 위기에 놓였습니다. 그러던 중 오유현 선수는 컴파운드 전향을 고려받았습니다.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가대표 선발전 에서 몇 년 동안 한 끗 차이로 태극마크를 놓쳤지만, 2018년 컨케스트 컵 동메달 획득을 시작으로 국제대회 커리어를 시작했습니다. 부상으로 은퇴를 고민하던 선수를 박성현 감독이 잡아주었고, 결국 새로운 국가대표가 탄생한 것입니다.

박성현 감독님께 금메달을 꼭 걸어드리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너무 아쉽고 죄송합니다.
이후 오유현 선수는 한때 다른 선수들이 은퇴를 고민하는 32세 때인 2021년 아시아컵, 아시아선수권에 출전하였고, 2022년에는 월드컵, 2023년에는 메이저 대회인 세계선수권과 아시안게임에 출전해서 두 대회에서 모두 단체전 동메달을 획득하였습니다. 또한 국내 최고 권위 대회인 현대자동차 정몽구배 한국양궁대회에서 컴파운드 부문 초대 챔피언에 오르며 2020년대 대한민국 컴파운드 양궁의 주요 전력으로 자리잡았습니다. 2026년 올해에도 오유현 선수는 국가대표 선발전을 4위로 통과했고 월드컵에 출전하며 태극마크를 지켰습니다.

양궁인 박성현의 마지막
저는 제가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선수들도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저만큼 긴장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저는 다른 사람들보다 운이 좋았죠. 언젠가 '올림픽 금메달은 하늘이 내려주시는 것이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금메달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 코치님, 스태프,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받은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하늘이 내려주신 선물은 올림픽 금메달이 아니라 박성현 감독님이 아니었을까요? 선수 시절 박성현 선수는 어떤 선수보다도 ‘끝’이 익숙한 선수였습니다. 박성현 선수가 경기의 끝을 장식하면, 국민들은 환호했습니다. 그러나 지도자 시절 박성현 감독은 선수들이 쉽게, 허무하게 끝을 마주할 수 없도록, 자신의 제자들이 국민들에게 환호받았던 그 자리로 오를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리고 2026년 6월, 양궁인 박성현은 또 하나의 끝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선수로서, 지도자로서 모두 만점이었던 양궁인 박성현은 2026년 대통령기를 마지막으로 양궁계를 완전히 떠나 미국으로 이민을 가신다고 합니다.
언제나 대한민국 양궁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박성현 감독님,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