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태풍에 잠겼던 포항제철소...'침수 80일' 쇳물이 콸콸 쏟아진다

11월 23일 포스코 포항제철소 직원들이 3고로에서 출선하고 있다.(사진=포스코)

고로에서 시뻘건 쇳물이 강물처럼 쏟아졌다. 무엇이든 녹여버릴 기세였다. 23일 오전 포스코 포항제철소 3고로에서는 용광로에서 쇳물을 뽑아내는 출선 작업이 한창이었다. 섭씨 1500도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쇳물은 고로에서 빠져 나와 토페토카(쇳물을 담아 옮기는 차량)로 옮겨진 후 제강 공장으로 운반됐다.

이날 3고로의 출선 현장은 평시와 다를 게 전혀 없었다. 하지만 79일 전인 지난 9월 6일 3고로를 비롯해 포항제철소의 전역이 초강력 태풍 '힌남노'로 침수 피해를 입었다. 3고로의 조업 현장은 성인 남자 허리 높이까지 물이 찼던 것으로 전해졌다. 폭우와 함께 토사물이 덮쳤던 3고로는 포스코와 민관의 복구 노력으로 제 모습을 찾고 있었다.

김진보 포항제철소 선강부소장(상무보)은 30년 가까이 근무했지만, 이번처럼 아찔하고 막막했던 경험을 한 적이 없었다고 전했다. 그는 1992년 엔지니어로 입사해 고로가 쇳물을 잘 뽑아낼 수 있게 관리하고 있다. 그는 만약 고로를 휴풍(가동 중단)하지 않았다면 포항제철소 전 공정이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을 것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당시 김학동 포스코 부회장과 이백희 포항제철소장 등 경영진은 힌남노 북상을 앞두고 제철소 내 모든 고로의 휴풍을 결정했다. 1973년 포항제철소 가동 이래 고로를 휴풍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2003년 태풍 '매미'가 북상했을 때에도 고로를 휴풍시키지 않았다. 포항제철소 임직원은 경영진의 대응이 과하다고 생각했다.

김 부소장은 "고로 가동 50년 동안 태풍이 수십개는 지나갔는데, 고로를 휴풍하겠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며 "막상 이런 사고가 나고 힘들게 복구하다 보니 포스코는 조상이 지켜줄 정도로 운이 좋은 회사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어 김 부소장은 "만약 휴풍하지 않았다면 고로 안에 있던 6000톤의 쇳물이 다 굳고, (쇳물이 나오는) 풍구는 쇳물찌꺼기로 다 막혀서 회복 불능이 되었을 것"이라며 "휴풍하지 않았다면 제철소를 복구하는 데 수 년이 걸렸을 것"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김 부소장의 말처럼 경영진이 고로 휴풍을 결정하고, 현대제철이 토페토카를 보내 포항제철소 고로의 쇳물을 실어 옮겨줬다. 그 결과 포항제철소의 고로는 이미 평소처럼 가동되고 있다. 3고로의 고로 조업을 모니터링하는 상황실도 평소와 같았다. 쇳물 생산과 관련해 고로의 빅데이터를 취합해 표시하는 상황판도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이날 상황실에 있던 엔지니어는 당시 상황을 설명하면서 "천운"이라고 입을 모았다.

포항제철소 근로자가 침수 설비를 복구하고 있다.(사진=포스코)

3고로와 달리 2열연 공장은 여전히 복구가 한창이었다. 침수된 지 2달이 지났지만 배관에 낀 토사를 제거하고, 각종 부품을 분해한 후 재조립하는 과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공장에는 각종 설비가 설치돼 있고, 수십개의 배관이 복잡하게 설치돼 있었다. 침수 당시 부력으로 대형설비가 떠오르면서 배관이 변형된 사례도 있었다.

당시 열연 2공장은 완전히 침수됐다. 지하는 물에 잠겼고, 지상 1층 허리 높이까지 물이 찼다. 지하 바닥에는 여전히 물이 완전히 빠지지 않아 축축했다. 벽을 손으로 쓸면 진흙이 묻었다. 침수 피해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열연 공장에서는 쇳물을 가공해 만든 슬라브(Slab)를 롤(Roll)에 넣어 압연(슬라브를 얇게 만드는 공정)한 후 냉각 과정을 거치고, 코일 형태로 만든다. 열연 강판은 용접성과 가공성이 뛰어나 산업 전반에서 다양하게 활용된다.

포항제철소 열연 2공장은 전기차용 모터에 탑재되는 전기강판과 스테인리스강 등 다양한 산업에서 쓸 핵심 소재를 만든다. 2열연 공장은 다양한 산업에서 쓰는 철강재를 생산해 가동이 중단될 경우 국내 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히 크다.

2공장에는 슬라브를 압연하기 위한 13대의 대형 모터가 설치돼 있다. 모터 한대 무게가 170톤이 넘는다. 이를 해체하고 재조립하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이라고 포스코의 1호 명장인 손병락 상무보는 말했다. 그는 전동기 기술 분야의 1인자로 꼽힌다. 손 상무보는 열연 2공장의 모터를 직원과 함께 수리하고 있다. 13대의 대형모터 중 11대를 무사히 복구해냈다.

복구에 실패했다면 해외에서 일일이 부품을 주문한 후 조립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특수기계인 만큼 부품이 잔존하고 있는지 발주시 언제쯤 배송될지 확인조차 불가능했다. 손 명장의 기술력으로 전동기는 90% 이상 복구됐으며, 열연 2공장은 수해 복구는 점차 예전의 모습을 찾아갈 것이다. 그는 "열연 2공장이 중단되면 후방 산업에 미칠 영향이 상당히 커 최단 기간 내 살려야 한다는 마음으로 복구에 임했다"고 말했다.

포항제철소는 조강생산량 기준 세계 6위인 포스코의 '심장부'이다. 포스코(당시 포항제철)는 1968년 4월 1일 설립됐으며, 설립 1896일 만인 1973년 6월 9일 7시 30분 한국 최초의 쇳물이 포항제철소의 용광로에서 쏟아졌다. 이후 1만7987일 동안 포항제철소는 가동을 이어갔는데, 태풍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자료=포스코)

초강력태풍인 힌남노로 인해 인근 냉천이 범람, 여의도 면적에 달하는 생산라인이 침수됐다. 김학동 부회장 등 경영진은 힌남노 상륙 1주일 전부터 자연재난대책본부를 가동했으며, △하역 선박 피항 △시설물 결속 △배수로 정비 △방수벽 설치 등 사전 대비 태세를 강화했다. 급기야 창사 후 처음으로 고로 3기를 휴풍시켰는 결단을 내렸다.

하지만 '자연의 힘'은 상상이었고, 이를 대응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8개의 압연공장 일부가 침수됐고, 선강 및 압연공장에 설치된 모터 3만3000대 중 약 31%가 침수피해를 입었다. 변전소 등이 침수되면서 공장 내 에너지공급이 중단됐고, 재고 130만톤 중 96만톤(78%)이 침수됐다.

포항제철소 가동 이래 전무후무한 초유의 재난이었다. 포스코그룹과 협력사 임직원이 일평균 1만5000명씩 복구에 매달렸다. 공장 곳곳의 토사물을 제거하고, 각종 기계는 분해 후 세척했다. 고로는 선제적으로 휴풍한 덕에 4일 만에 정상 가동에 들어갔고, 18개의 압연공장 중 7개는 가동을 시작했다. 현재 1열연·1냉연 공장이 정상 가동 중이다. 포스코는 연내 모든 제품을 정상 생산하는 목표로 복구하고 있다.

포항제철소의 공장 곳곳에는 힌남노의 '상흔'이 남아 있었다. 공장 한켠에는 토사물을 담아놓은 포대자루가 쌓여 있었다. 구슬땀을 닦아내며 복구 작업을 하고 있는 임직원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복구 작업 중인 임직원에게 가져다 줄 도시락을 운반하는 직원의 모습도 찾아 볼 수 있었다. 이전의 포항제철소를 되찾기 위해 밤낮없이 매달리는 직원들 앞에 '세대의 벽'도 '원하청의 벽'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정상 가동 중인 포항제철소 1열연 공장.(사진=포스코)

이날 수십명에 달하는 국내 취재진은 포항제철소를 방문해 공장 곳곳을 둘러봤다. 포스코는 예전 모습을 찾아가고 있는 포항제철소를 조금이라도 더 보여주기 위해 냉천·3고로·2열연·1열연 공장을 보여주는 일정을 마련했다.

포항제철소를 떠나기 직전 방문한 1열연 공장은 침수됐는지 모를 정도로 복구가 완료된 상태였다. 1차 압연을 거친 30~40미리 두께의 열연강판이 연속 공정을 따라 옮겨졌고, 1.8미리 두께까지 압연하기 위해 7개의 롤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스팀이 1열연 공정을 자욱하게 덮고 있었고, 공장 한 켠에 두루마리 휴지처럼 돌돌 말린 코일이 있었다. '산업의 쌀'이 될 코일은 운송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