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적 상상력 극명…현상의 문제들 재해석

전시장 입구에 설치된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 ‘창원의 봄’

‘…전…중략/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둥글게 둥글게 길은 깎아내고 있어요/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큰 사과가 소리 없이 깎이고 있네요/구멍가게 노망 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

위 지문은 시 일부다. 김혜순 시인의 ‘잘 익은 사과’라는 시작품이다. 지난 9월28일 전시를 보러 가는 길이었는데 이 시 한편에 꽂힌 것은 올해 일곱번째로 열리는 ‘창원조각비엔날레’ 때문이다. 감독이 현시원씨다. 현 감독은 지난해 10월 위촉장 수여 당시 전시 기획 등 미술현장 경험뿐 아니라 학술과 출판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조각 장르를 현대 미술의 다양성 속에서 이해하는 시각을 갖춘 점 때문에 그를 낙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과껍질이 깎이며 나선형의 길을 만들어낸다는 시인의 상상력처럼 이번 비엔날레에서 도시와 조각, 관객들이 스스로 길을 내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이 시를 주목했음을 내비쳤다. 이번 ‘창원조각비엔날레’의 주제는 ‘큰 사과가 소리 없이’다. 시문의 일부 구절을 그대로 차용해 주제로 삼은 것이다. 주제는 관람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더욱이 다른 비엔날레와 달리 특정 장르만을 위한 전시이니까 더 관심이 갈 수밖에 없던 듯하다.

이번 ‘창원조각비엔날레’는 16개국 86명(63팀)이 출품한 가운데 9월 27일 개막돼 오는 11월 10일까지 45일간 성산아트홀을 위시로 성산패총, 창원복합문화센터 동남운동장,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등 4곳에서 관람객 맞이에 나섰다.

출품작들은 회화 등 일반 전시와는 달리 작가적 상상력이 극명하게 갈리면서 호불호가 갈렸던 것은 사실이다. ‘창원조각비엔날레’는 전지구적 위기보다는 현상의 문제들에 대한 접근이 두드러졌다.

성산아트홀 전시동 입구에 들어서면 ‘창원의 봄’이라고 하는 백남준의 작품이 먼저 관람객들을 압도한다. 모니터로 쌓은 일종의 탑이다. 정문으로 들어오든, 후문으로 들어오든, 앞뒷문으로 입장하든 이 작품과 조우할 수 밖에 없다. 백남준의 작품이 얼굴마담을 하는 격이었다. 이번 창원조각비엔날레 역시 세태와 무관치 않은 작품들이 눈에 띄었다.

먼저 2층 복도에 설치된 주재환의 신작 ‘축구만세’는 요즘 파벌과 변화를 거부하는 요지부동으로 팬들의 지탄을 받고 있는 한국축구협회를 상기시켰다. 이 작품은 유머와 비판을 동시에 겸비한 작가가 트랙처럼 둥글게 이어지는 전시장에 13편의 축구시(詩)를 제시해 관람객들의 발길을 잡기에 충분했다. 동시대 시인들에게 축구 시를 제안해 작업이 가능했다는 후문이다. 주제는 평화와 승부를 함의하는 가운데 공중에 매단 빨간 공 1개가 있는데 이는 축구를 상징화한다. 축구 한 팀 11명에 맞춰 신작시 11점과 2점이 출품됐다.

<@1><@2>정희성 시인은 ‘축구선수’라는 시를 통해 ‘어린 시절 나는 공을 차는 꿈을 자주 꾸었다/축구 선수가 꿈인 시절도 있었다/지금도 그 꿈 버리지 못해 야밤 중에/곁에 자는 집사람을 발로 차서 혼난 일이 있다’고 노래했고, 박시교 시인은 ‘삶이 그렇듯이’라는 시를 통해 ‘쓰러지고 넘어지고/몇백번의 헛발질 뒤/마침내 맞게 되는 그 짜릿한 골인 맛/삶 또한/그렇지 않던가/한순간의 환희’라고 읊고 있다. 시인의 기발난 상상력과 축구가 갖는 함의를 예술적으로 재해석하고 재결합한 작가적 상상력이 빛났다.

전체 타이틀이나 주재환의 작품 등은 전체 전시 관람을 하는데 더욱 집중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은 맞다.

주재환의 작품과 달리 종에 관한 작품이 발길을 붙들어 맸다. 온다 아키의 이 작품은 타원형의 좌대 위에 조용히 온갖 종을 모아 진열했다. 그 종은 유리로부터 도자와 흙으로 만든 것까지 다채롭다. 종종 다른 예술가들과 함께 설치 작업에서 퍼포먼스로 구현되기도 했다. 멈춰있는 소리들을 일정한 간격으로 주저 앉혀 놓아 구도의 맥락을 사유하게 만들었다.

<@3><@4>홍영인의 ‘반향의 짜임’은 대형 태피스트리로 구성됐다. 태피스트리는 무늬 양탄자를 말한다. 이 양탄자에 뒤집어지거나 파편화된 단어와 문장이 새겨졌다. 이는 작가가 해체적 글쓰기를 시도했기 때문이다. 그 텍스트들은 1970∼1980년대 섬유공장에서 일했던 여직공들의 말을 인용한 것이어서 남성 중심의 거대 서사에 가려져 있던 여성 노동자들의 개별적 서사를 조명하고 있다. 광주 또한 방직공장의 서사가 정립되기보다는 해체부터 되고 있으니 이 작품을 바라보는 시각이 남다를 수 밖에 없었고, 또 한편으로는 씁쓸한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전시장 1층에서 만난 통 원먼의 ‘충칭 잡초’는 충칭지역의 잡초의 종과 이름을 조사하고 식물이 자라는 흙으로 만든 점토에 그 식물의 정보를 도자기 접시에 글과 함께 새겨넣었다. 이 작품은 잡초의 위태로운 삶을 통해 인간의 삶을 반추한다. 인간 역시 언제 깨질 지 모르는 위태로운 삶속에 놓여 있어서다,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져 있어 마치 숲이나 조경수들을 연상하게 만들었다.

이외에 한국의 민중운동 관련 보도 사진에서 추출한 실루엣이 드로잉과 자수를 거쳐 악보가 된 일종의 사진 악보 작업인 홍영인의 ‘자유를 위한 비상’ 등과 야외에 설치된 심이성의 ‘봄의 길’도 샘솟는 생명력을 느낄 수 있어 주의깊게 볼만한 작품들이었다.

<@5>성산 패총 출품작들인 야철지 내 정서영의 ‘세계’와 유물전시관 내 최고은의 ‘에어록’은 이곳의 시간과 결부된 작품들이었다.

성산 패총 인근의 동남운동장에는 잡초가 자라난 공간에 작품 5점을 설치했다. 첨탑 같은 정현의 ‘목전주’는 17m 높이의 나무전봇대 네개가 세워져 있어 단박에 압도했다.

이들 세 공간은 서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했지만 문신미술관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심정수와 문신 크리스 로 권오상 정소영의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다만 전시공간마다 공통된 편의시설이 태부족했으며 출품작들과 연관된 아트샵 관련 공간이 없었다. 또 일부 전시공간은 도저히 주차할 공간이 없어 몇번을 돌고도 자리를 잡지 못해 애를 먹었다. 야철지 내 작품 명제처럼 연관성이 떨어진 위치에 작품설명이 부착돼 헷갈리기 쉬웠다. 편의시설 등 전시 외적인 것들이 미흡해 작품만 감상하고 발길을 돌려야 하는 구조여서 다소 아쉬웠다. 동남운동장은 고도의 큐레이팅보다는 즉흥적 전시같은 공간의 형태를 탈피하지는 못했다. 문신미술관 전시는 임팩트가 강하게 다가오지는 않았고, 오히려 문신미술관에 관한 도슨트의 설명이 더 끌렸다. 작품에 대한 해박한 설명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선주 기자 rainidea@gwangn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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