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도생’에 진심인 전희철과 김기만… “우리는 동업자 아닌 동반자”[유재영의 전국깐부자랑]

유재영 기자 2024. 2. 24.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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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척하면 척, 다른 듯 닮은’
프로농구 SK 전희철 감독- 김기만 수석코치
프로농구 SK 전희철 감독(오른쪽)과 김기만 수석코치. 감정공동체인데 이익공동체로도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다. 감독과 수석코치로 호흡을 맞추는 3번째 시즌인데, 우승 한 번에 준우승 한 번. 그리고 이번 시즌도 플레이오프 진출이 유력하다. 용인=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예전부터 정말 친한 친구끼리는 동업하지 말라고 했다. 친구는 감정 공동체인데 동업은 이익 공동체다. 친구는 관심사나 성격이 서로 맘에 들어 맺어진 관계다. 그런데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조직에서 친구가 이익 공동체 관계로 놓이다 보면 서로 감정이 상하거나 의견이 충돌해 급기야 관계가 깨지는 경우를 흔히 본다. 친한 친구끼리 돈 거래 하지 말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익 공동체에서도 절친 관계가 유지되려면 각자의 캐릭터, 성격에 대한 이해심과 인내심 이 필수다. 같은 목표를 달성해가는 과정에서‘내가 더 열심히 노력을 했다’‘너보다 더 기여했다’ 식의 지분 따위를 계산하고 따지지도 말아야 한다. 각자 역할을 분명히 정하고, 그 역할에 대해 서로가 인정하고 존경해줘야 한다. 물론 이익 공동체에서 나와 감정 공동체가 되는 시간도 많이 가져야 한다.

프로농구 SK의 전희철(51) 감독과 김기만(48) 수석코치는 이익 공동체와 감정 공동체를 오래 넘나들었는데 우정이 안 깨지고 더 깊어지는 오랜 ‘깐부’다. 둘은 감독과 수석코치로 최근 두 시즌 동안 팀을 프로농구 우승과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이번 시즌도 6강 플레이오프 진출이 유력하다. 전 감독은 역대 프로농구 감독 중에서 가장 빠른 시간 안에 100승을 달성하는 기록까지 세웠다. 전 감독은 그 공을 김 수석에게 많이 돌린다.

전 감독(92학번)과 김 수석(96학번)도 고려대 선후배다. 전 감독은 1990년대 폭발적인 농구 인기를 주도한 여학생 팬, ‘오빠부대’의 선봉장이다. 김 수석이 예비 대학 새내기로 고려대 훈련에 합류했을 때 전 감독은 이미 ‘에어본’으로 불린 슈퍼 스타였다.

‘오빠부대’를 몰고 다닌 고려대 재학 시절, 스포츠신문에 난 자신의 기사를 보고 있는 전 감독. 1면 기사가 ‘전희철’로 도배돼 있다. 김기만 제공.
김 수석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지만, 악착같은 플레이가 인상적이어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미국프로농구(NBA) 레전드 데니스 로드맨과 외모와 패기의 농구 스타일이 닮았다고 해서 ‘로드만’이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김기만’하면 모르는 사람도 ‘로드만’ 하면 안다. 몇 년 전 방송 농구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대학 시절 미국에서 현주엽 선배의 심부름을 받고 햄버거 프랜차이즈 ‘드라이빙 스루’에 가서 차량 사이 틈을 비집고 들어가 맨 몸으로 대기한 에피소드를 공개해 화제가 된 바 있다.

어렵다면 어려운 사이인데 희한하게 동반자 느낌이 강하게 풍긴다. 전 감독은 일에 관해서는 매사에 섬세하고 꼼꼼하면서도 카리스마가 있어 후배나, 선수들이 쉽게 다가서기 어려운 스타일이다. 그런데 코트 밖에서는 본인 스스로를 무장 해제를 하고 먼저 사람에게 다가가는 성격이다. 공과 사가 매우 뚜렷한데 속내는 마음의 입, 출구를 다 열어 놓은 사람이다.

김 수석은 이런 ‘전희철’을 아주 유연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다. 일하는 ‘전희철’을 기다릴 줄 안다. 코트 안팎 ‘전희철의 시간표’를 기가 막히게 알고 있다. 감독이 말하기 전까지 그의 심리적 공간에 성급하게 끼어드는 법이 없다. 감독 중심으로 생각하는 습관이 배어 있다. 권력을 양보할 줄도 안다. 굳이 조언과 위로를 하려 애쓰지 않는다. 대신 장난과 놀이, 위트로 ‘전희철’ 옆에 있다. 그것을 발휘할 시간과 타이밍을 잘 안다. 한 명을 위한 맞춤‘동반’ 기술이다.

●별 걸 다 기억하는 ‘김기만’, 형이 되다

본인 자신도 잊고 있던 인생 스토리를 잘 알고 디테일을 잘 포장해주는 사람을 누구든 안 좋아할 리 없다. 기억은 관심이다. 김 수석은 전 감독과 같이 있던 순간이 기억의 총량 우선순위에 있다. 그것이 전 감독에게 우정과 신뢰로 천천히 쌓였다.

김 수석은 원래 나이로는 95학번으로 입학해야 했다. 그런데 명지고에서 1년 유급을 해서 96학번으로 입학했다. 95학번이었으면 대학 최고의 농구 스타 반열에 올라섰던 전 감독과 1년을 대학 무대에서 같이 뛸 수 있었다.

“만기가 1년 일찍 왔으면 나한테 죽었죠. 하하.”

전 감독은 평소 사석에서 ‘기만’수석을 ‘만기’라고 부른다. 고려대 시절부터 선후배들에게 친근감 있고, 부르기도 쉬워서 그렇게 불렸다는데 전 감독도 SK에서 김 수석을 만나고부터 애칭처럼 쓰고 있다.

-김 수석은 대학 입학하고 전 감독을 우러러봤겠어요. 대면한 건 그 때가 처음이었죠?

“보통 고3 학생들은 대학 입학식 하기 전해 겨울에 훈련에 합류하잖아요. 그 때 전 감독님은 졸업 직전이었죠. 당시 스타니 당연히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기도 힘들었죠. 아, 첫 인상이 아주 강렬했습니다. 겨울에 군산에서 농구대잔치 경기가 있었는데 예비 새내기들도 팀에 합류했었죠, 당시 1학년들이 경기 하루 전날 술을 먹자는 거예요. 저희 동기들은 뭣도 모르고 쫒아갔죠. 1차를 하고 끝냈어야 하는데 군산 바닷가 옆에 나이트클럽까지 끌려간 거예요. 그리고 다음날 아침 운동을 가는데, 고려대 선수들은 큰 버스가 아니고 미니버스로 이동을 했어요. 좁은 버스 안이니 술 냄새가 진동을 하고, 아니나 다를까 감독님한테 딱 걸렸죠. 점심 식사하고 숙소 한 방으로 집합이 되서 1학년들은 머리 박고 있고… 하하. 그런데 여기서 대단한 일이 벌어집니다.”

“김 코치, 나도 술을 좋아하지만, 경기 전날에는 안 마셨어.”

전 감독이 말을 자르든 말든 김 수석은 그 때 그 순간으로 빠져든다.

“당시 감독님이 ‘지기만 져봐’라면서 엄포를 놓으시더라고요. 상대가 한양대였는데 지면 큰 일 나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당시 전력은 고려대가 앞섰잖아요. 이길 줄 알았는데 웬걸, 막판까지 시소 접전이었어요. 벤치에서 1학년들이나 신입생들은 벌벌 떨고 있고, 하하. 종료 시간은 얼마 안 남았는데 아예 3점을 지고 있었어요. 그 때 저희들은 ‘죽었구나’ 했어요. 박한 감독께서 마지막 작전 타임을 부르시더니 그 때 ‘희철이! 3점 쏴’ 라고 하셨는데 절망에서 빛을 본 거죠. 그래서 감독님이 들어가서 가운데 자유투 서클 밖에서 3점 슛을 쏘는데….”

“김 코치, 오른쪽 45도 지점이야.”

“아, 그래서 감독님이 슛을 쏘는데 상대 (이)흥섭(DB 사무국장) 형이 파울을 한 거예요. 그래서 자유투 3개를….”

“솔직하게 파울은 아니었어요. 지금으로 따지면 플라핑(파울을 유도하는 액션)이었죠.”

“자유투를 3개 다 넣어서 연장으로 갈 수 있었고, 나중에 이겼어요. 그 때 감독님 때문에 ‘살았다’를 외쳤죠. 하하.”

“그러면서 내가 다음 날 신문에 ‘간 큰 남자’라고 나왔다니까.”

최고참 선배 전 감독이 막내 예비 새내기 김 수석의 ‘생명의 은인’이 된 날, 김 수석 ‘전희철’ 대역으로 화끈하게 대미를 장식하고, 전 감독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더 웃긴 에피소드가 있어요. 경기에서 그렇게 이기고, 체육관을 빠져 나가야 되잖아요. 감독님을 보러 여학생 팬들이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빠져 나갈 수 없었어요. 경기 끝나고 매니저 형이 저하고 이규섭 등 몇몇 예비 신입생들한테 선배들의 유니폼하고 츄리닝을 입히더라고요. 말하자면 가짜 ‘전희철’로 만든 거죠. 그리고 팬들이 많이 기다리고 있던 출구로 내보내더라고요. 팬들 몰이를 저희 쪽으로 해놓고 진짜 감독님과 (김)병철 형 같은 스타들은 반대편으로 빠져 나가려고 했던 거예요. 출구로 나가자마자 한 팬이 저를 보고‘아이 XX, 아니야, 아냐’라고 분개하며 감독님을 찾아 반대편 출구로 달려가는데…지금도 그 학생의 찰진 말 한 마디가 생생하게 기억나요. 하하.”

김 수석은 대학 신입생 때부터 직접 눈으로 보거나 전해 오는 전 감독의 소식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았다. 자잘한 얘기부터, 프로농구 출범 전 실업팀에서 얼마나 대단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는지, 국가대표팀에서도 기라성 같은 선배들과 어떻게 경쟁하며 주전으로 뛰었는지 등등. 자신이 알고만 있어도, 기억만 잘해도 평생 농구 인생에 보약이 될 것 같았다. 누가 전 감독의 자서전이라도 써달라고 하면 자신 있게 나설 수 있다.

지금도 김 수석이 ‘전희철’의 별 것을 기억해내는 일이 많다고 한다. 전 감독 입장에서는 기억 저편에 묻혀진, 잘 나갔을 때의 추억을 다시 생각해낼 수 있어 기분도 좋고, 치열하게 농구를 했던 초심으로 돌아가게 해 마음의 정비도 된다고.

한국의 ‘로드만’ 김 수석의 SK 활약 시절. KBL제공.
SK에서 함께 뛰며 둘은 24시간 붙어다녔다. 김기만 제공
-감독님은 프로농구가 출범(1997년) 안하고 그 전에 실업팀으로 갔으면 백지수표를 받았을 거예요(김기만).

“진짜 대학 졸업할 때 현대전자(현 KCC)에서 백지수표에 쓰고 싶은 만큼 액수 적으라고 했어. 오너께서도 그러셨던 걸로 알고 있고, 농구단 안에서도 ‘그룹에서 달라는 액수로 주라’는 얘기가 나왔다고 했었어. 나도 현대를 가고 싶었거든. 포지션도 4번(파워포워드)이라 희귀성도 있었지. 나중에 동양(현 소노)으로 우선 지명될 때에는 대만에서도 제의가 있었어.”

김 수석은 프로에 와서도 자기 코가 석자인데, 전 감독의 슬럼프를 자기 일처럼 매우 신경 쓰고 걱정하기도 했다. 당시 하늘같은 선배라 뭐라 위로를 할 수도 없고, 멀리서 선배의 방황에 어쩔 줄 몰라 했었다고. 김 수석이 언급한 그 기억은 전 감독이 지금 감독 자리에 있으면서 초심을 다질 때 가끔 거슬러 추억해보는 일이다. 분명 현역 시절 가장 없애고 싶은 성적표인데 요긴 지도법으로 활용한다.

전 감독이 2003~2004시즌 KCC에서 이상민, 추승균 등 당대 최고의 스타들과 뛸 때다. 그 시즌 전 감독은 18경기에 경기당 평균 21분 출전해 5.9득점에 그쳤다.

“선수가 지도자에게 맞추는 것도 맞고, 지도자가 선수의 성향을 잘 파악해 전술 배려를 해주는 것도 맞죠. 이 점을 전제로 당시 저는 팀에서 외곽에 서 있다가 3점 슛을 쏘라는 주문만 받았어요. 제가 좋아하는 플레이는 아니었어요. 나는 슛만 쏘는 선수가 아닌데 슛만 쏘라고 하고, 안 들어가면 세게 지적을 받았어요. 모든 패턴의 시작은 제가 밖에 서 있는 것이었어요. 안 하면 안 됐죠. 골밑으로 잠깐 들어가면 패턴을 깬다고 또 지적을 받았죠. 그러면서 언론 등에서‘이제 전희철이 몸싸움을 안 하고 피한다. 밖에서 편하게 슛만 쏘려 한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하더라고요.”

다분히 선수의 잘못된 의지로 오해를 받았던 기분 좋지 않은 기억이다. 그렇지만 팀을 이끌면서 선수 입장과 사정을 챙겨보고자 할 때 자극삼아 되돌아보면 나름 의미가 있는 일이다. 그래서 눈치 빠르게 김 수석이 얘기를 꺼낸 것이다.

●‘전희철’ 은퇴식 때 울어버린 ‘김기만’, 그래서 동생이 되다

‘이 사람의 진짜 동생이 되고 싶다’, 이 생각이 들 때가 언제였을까. SK에서 함께 뛰면서 서운한 적도 있고, 뭔가 말하기 어려운 좁혀지지 않는 거리감도 있었다. ‘전희철’이라는 스타의 이름값에서 느껴지는 멀어짐이라고 할까. 그런데 그런 감정이 무의미하다고 정리된 순간이 왔다. 김 수석은“전 감독님의 은퇴식이 우리 관계의 ‘터닝 포인트’였다”고 했다.

2008년 11월 ,전 감독은 25년 동안의 화려했던 선수 생활을 정리하고 은퇴를 했다. 은퇴식 도중 감정에 북받쳐 뜨거운 눈물도 흘렸다. KBL제공
2008년 11월. 전 감독은 SK에서 25년간의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구단이 잠실학생체육관에서 마련해준 은퇴식에서 그는 꽃다발과 감사패를 받으면서 참았던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그 때 김 수석은 조용히 관중석 구석에서 전 감독의 눈물을 지켜보고 자신도 눈물이 터졌다고. 김 수석은 당연히 전 감독 옆에서 꽃다발도 주고, 포옹도 나눠야 하는 SK 선수였다. 하지만 여러 사정으로 농구를 하느냐 마느냐, 몇 개월 공백을 갖다가 어렵게 2군에 합류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초대받지 못한 손님 같아 선배 옆에 자신 있게 서기 어려웠다. 누구보다 더 감동적으로 축하해주고 싶은 마음을 표현할 상황이 못 됐다.

관중석에서 마음으로는 ‘고생하셨다, 수고했다’라며 심박 조절을 했지만 눈에서 동공 조절이 안 됐다고. 당시 전 감독도 선수 생활 연장 기로에서 은퇴라는 결단을 내리기까지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말을 안 해도 이심전심, 전 감독의 마음과 내 마음이 같아 울컥하고 또 울컥한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 김 수석은 이 얘기를 꺼내면서 또 감정이 복받쳐 말을 잇지 못했다.

“감독님을 거스를 수 없다는 믿음이 생긴 날이었어요. ‘다른 사람하고 비교할 수 없다, 평생 따라다니는 동생이 되자’, 코트에서 우는 감독님을 보며 그 생각 밖에 안 들더라고요.”

● 나에게 은퇴 제안, 그리고 보고서까지 던져 버린 ‘형’

같은 팀에서 있다보니 생각하지도 못한 선택을 해야 할 일도 생기고, 얼굴 붉힐 일도 있을 텐데 둘은 자칫 오해를 할 수도 상황에서 각자의 의도를 잘못 짚지 않았다.

2011년 4월, 당시 코치를 맡고 있던 문경은 전 감독이 새롭게 지휘봉을 잡으면서 둘의 신상 변화가 생겼다. 운영팀장이었던 전 감독이 코치가 되면서 현장으로 복귀했고, 2군 선수로 있던 김 수석이 1군으로 올라가 다시 뛸 여지가 생길 수도 있는 상황. 그런데.

“전임 감독이 사임하시고 저는 2군 숙소에 박혀서 운동하고 있을 때였죠. 하루는 오전에 웨이트훈련을 하고 있는데 문 감독께서 감독으로 부임했다고 기사가 난 거예요. 전 감독님은 코치가 된다고 나오고. 그 때 속으로 ‘이제 좋다. 됐다’ 싶었죠. ‘나이도 많은데 나도 말년에 제대로 뛰어보자’ 그랬죠. ‘희철이 형이 나를 버리진 않을 거야’라고 얼마나 기대를 했는지 몰라요. 그런데….”

-어떤?

“기대를 하고 있던 마당에 전 감독님이 2군 훈련장으로 오셨죠. 저를 불러 하시는 말이…‘은퇴하게’였어요, 하하. 기대하고 완전히 반대였죠.”

물론 팀 사정 때문이었다.

“‘만기’에게 전력분석을 맡기려고 한 거죠.”

“전 감독님이 당시에 문 감독하고 팀을 만드는데 도와달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은퇴에는 동의하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노트북만 만지고 있는 것보다 현장에서 움직이는 게 성향에 맞으니 D리그(2군)를 보고 운영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했죠. 전 감독께서 회사하고 상의해보더니 어렵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다음 날부터 팀 운영 방향 등에 관한 보고서를 써야 하는 처지가 된 겁니다.”

-피곤해졌겠네요.

“김 코치가 많이 혼났죠. 저도 전력분석을 해봐서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 뻔히 알고 있잖아요. 보고서만 봐도 어느 정도 일을 한 건지 알죠.”

“주로 홈 경기를 보고 공부도 하고 분석을 했어요. 한 번은 경기가 끝났는데 문 감독께서 기자들하고 술 한 잔 하면서 식사를 해야 하는데 인원이 부족하다고 오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새벽까지 길게 술을 마시게 됐죠. 다음 날도 경기라 바로 끝난 경기 보고서를 점심식사 전까지 전 감독님께 드려야 했어요. 새벽에 들어와서 힘든데도 나름대로 보고서를 만들어서 보내고 영상 분석은 아직 실력이 부족하니 식사 후에 드리겠다고 했는데, 바로 엄청 깨졌죠. 전 감독님이 ‘할 일은 하고 술을 마셔야지’라고 식당에서 선수들 보는 앞에서 막 혼을 내는데 얼마나 서러운지 눈물이 뚝뚝 떨어지더라고요. 하하.”

“오타는 엄청 살벌하게 내고 와서.”

-그래도 서로의 진심을 알았기 때문에 그 때 관계가 틀어지지 않았죠?

“친분, 뭐 의리를 떠나서 가장 어이없고 화가 나는 건 일을 같이 하는 사람이 상황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할 때잖아요. 그 때 그런 제 마음을 기만 코치는 잘 이해한거죠. 조직에서 상급자, 선배들 잘 모시는 것 같은 사회생활 김 코치가 참 잘해요. 장점 중에 가장 좋은 건 같이 다닐 때 신경을 안 쓰게 한다는 거예요. 같이 있으면 이것, 저것 전부 챙겨줘야 하고, 신경을 많이 써줘야 하는 사람이 있어요. 후배가 아닌 남자의 입장에서 둘이 다니는데, 나한테 피해만 안 주면 정말 고맙거든요.”

전 감독의 성격 스타일을 너무나 잘 알고, 낄 타이밍에 끼고 빠질 때는 확실히 거리를 두는 김 수석. 능구렁이다. KBL 제공
-감독에게는 최적화된 코치 아닌가요.

“잘 스며들어요. 잘 챙기고. 내가 잊어버릴만한 일들을 어떻게 알고 저의 빈틈으로 들어옵니다. 살짝 귀띔해주거나 본인이 처리해놔요. 감독이 완전하지는 않잖아요. 그러면 코치는 분명 감독이 뭔가를 놓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어야죠. 그렇게 둘이 잘 커버가 돼야 서로 하나의 ‘세트’가 되지 않겠어요? 일이든 인간관계든. 저의 ‘사각지대’를 보는 시력이 참 좋습니다. 김 코치가.”

● 선배 감독들 실수 반복 안 하려는 ‘형’… 그것을 ‘카피’하는 ‘동생’

초보 감독으로 데뷔하지마자 프로농구 통합 우승을 일궈낸 두 사람이 2년 만에 우승 트로피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용인=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이제 감독과 코치로 3시즌 째. 전 감독은 첫 프로팀 지휘봉을 잡자마자 우승을 거뒀고, 지난 시즌에는 아쉽게 준우승을 했다. 초보 감독으로 프로농구 역대 지도자로 최소 경기 100승을 달성했다. 147경기 만에 100승. 대단하다. 시행착오야 분명 있었겠지만 둘이 팀을 다지고 끌어온 과정과 결과가 기대 이상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김 수석은 전 감독과의 ‘동거’ 3년 동안 금전적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인생 소득을 얻었다고 했다. KBL제공
김 수석에게는 지난 3시즌 전 감독의 팀 운영을 보고 배운 것을 무엇과도 바꾸기 힘들다고 했다. 김 수석은 “나중에 어떤 팀을 맡더라도 자신 있다. 지난 3년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것을 갖고만 있으면 되고, 아니 갖고 있어서 좋다. ‘카피’할 수 있다는 게 좋아서가 아니라 어디서든 잘 적용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든다는 게 만족스럽다”고 덧붙였다. 전 감독에게 깨지고 또 깨지고, 숙제하고 또 숙제 검사 받는 게 지겹고, 한편으로는 자존심 도 무너지는 과정을 겪었지만 지나가보니 맞는 길을 찾았다고 본다. 형을 잘 만난 덕으로 돌린다.

-전 감독께서 보기에, 김 코치가 뭘 보고 배워서 저렇게 만족해할까요. ‘전희철표 지도’의 핵심으로 연결되는 문제네요.

“저도 여러 감독들을 모셨고, 지켜봐왔는데 각자 장점과 단점이 있잖아요. 그런데 장점이라는 건 객관적 지표로도 보일 수 있는 거고, 그런데 단점은 굉장히 주관적인 의사에 달려 있는 거잖아요. 코치를 할 때부터 선배 감독들의 좋은 부분을 ‘집중적으로 배워보자’가 아니라 단점은 하지 말자라는 점에 기준을 두고 일을 했어요. 사람마다 장점 캐릭터가 있잖아요. 그것을 내 것으로 승화시키기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에요. 원래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아예 선배 감독들의 실수를 답습하지 말자고 마음을 먹었죠.”

-경험에서 얻어진 신념 같은데요.
“이전 감독들이 한 행동들에 대해 선수들이 싫어하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그런데 저의 장점은 분명히 있잖아요. 다른 감독들의 장점을 따라가진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요. 후회가 안 생기도록. 그러면서 이전 감독들의 단점들을 내가 보여주지 말자는 겁니다. ‘단점을 하지 말자’라고 하면 보완책을 생각해 놓겠죠. 그 보완책을 실행으로 옮기다보면 그게 새로운 저의 장점이 될 테고요.”

전 감독은 지난 10일 프로농구 역대 감독 중에서 최소 경기 100승을 달성했다. 전 감독은 공을 김 수석에게 돌렸다. 둘만의 기념 샷은 필수. 김기만 제공.
-꼼꼼한 성격인데 본인에게도 같은 기준을 적용?

“저의 이런 이미지가 정답은 아니죠. 이 팀에서도 코치든, 선수들이든 상황에 따라 저에 대해 뭔가의 단점을 발견하고 찾겠죠. 내 의지대로만 팀을 만들 수는 없잖아요. 제가 100% 완벽한 게 아니기 때문에요. 이전 감독들의 단점을 답습하지 말자라는 건 팀 운영을 하는데 있어서 조정과 조율을 하겠다는 의지입니다. 여기서 좋은 결과물을 내면 그게 또 저의 것, 장점이 되고요. 제 스스로도 모니터링을 합니다. 예를 들어 중계 카메라의 잡힐 때 선수들을 대하는 말과 표정 등까지도 체크를 하죠. ‘아, 이렇게 화를 낼 때 선수들은 어떤 감정이 들겠구나’ 하고 곱씹어보죠. 그러면 다음 같은 상황에서 마음을 비운다던가, 스스로도 단점을 줄이는 과정을 겪죠.”

-이제 ‘김기만’에서 그런 ‘전희철’의 모습이 많이 비춰질 수도 있겠네요.

“김 코치는 많이 배운다고 하는데, 저는 배워보라고 하는 것보다, 들었으면 좋겠다는 정도에요. 저의 장점을 가져가라, 배워가라고 하면 힘들 거예요. 한 상관을 모시고 평생 직장을 다닐 거면 모르겠지만, 이 바닥에서는 팀, 감독도 자주 바뀔 수 있고, 선수 세대도 금방 바뀌잖아요. 그러면 내 철학이 맞다, 이거죠. 장점만 따라가서 복사하려면 방향성을 못 잡습니다. 예를 들어 카리스마 있는 감독이 있고, 온화하게 지도하는 감독이 있을 수 있고, 또 유머 있는 감독?… 내가 유머가 없는데 어떻게 따라갈 거예요? 무조건 따라한다고 해서 내 것이 되기 어렵다는 거죠. 만들었다 해도 내 스타일이 없어지죠. 단점을 안 하는 게 복잡하지 않고 쉽다, 단점만 안 하면 최소한 욕은 안 먹는 감독이 된다는 점을 말해주고 싶었어요.”

“이러니까 되게 편해요. 감독님이 머리 아프면서 정리해놓으셨잖아요. 이런 단점, 저런 단점 안해야 되고…나름 좋은 감독상을 정리하셨잖아요. 저는 머리 안 굴리고 그대로 따라가면 되죠. 하하.”(김기만)

거의 한 동작의 본체와 그림자로 움직이는 것 같다. 전 감독이 하는대로 김 수석도 따라하고 싶다. 복사한다고 비판받아도 좋다. KBL 제공.
내 것은 온전히 다하고 또 연구해서 좋은 쪽으로 발휘하고, 안 좋은 것은 하지 않는 실천. 농구를 떠나 ‘전희철’이 사는 인생법이라 느껴진다. 그게 온전히 동생에게 이식되고 있다.

-해석이 그럴 듯한가요?
“감독도 다 먹고 살자고, 주변 사람들과도 좋자고 하는 일이잖아요. 같은 조직에서 같은 목표를 갖고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누군지 보여줘야 하잖아요. 사람들이 참 재밌는 게 10년 전의 제 모습을 다 기억 못해요. 오래 같이 있던 사람들도요. 그래서 저를 계속 변화시키고 알려줘야 한다는 거죠. 이미지라는 게 나쁘다가도 좋게 되거든요. 농구를 잘 공부하고 파헤치면서, 팀을 바르게 운영하는 것이 중요한데 이것이 저의 사회적인 이미지에도 연결이 되니까요.”

-김 코치는 그런 감독님의 변화가 크게 느껴지겠습니다.

“저는 자부할 수 있어요. 형수님 다음으로 대한민국에서 전 감독님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요. 표정만 봐도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저는 알아요. 그런데 단점을 계속 지우고 계셔요. 보통 같으면 화이트보드를 던져 날아갈 상황인데, 과장 없이 얘기하면 10번 날아갈 게 한 번도 안 나왔어요. 아직 감독님의 단점은 안 보입니다. 하하.”

● 눈물까지 닮고 싶다

가슴을 스스로 후벼파는 전 감독의 자책과 눈물을 처음 봤다. 2022~2023시즌 챔피언결정전 6차전에서 한 때 15점까지 앞서다 4쿼터 역전을 내주고 불편함을 감추지 못하는 전 감독. 곁에 있는 김 수석도 좌불안석이었다. KBL 제공
초보 감독으로 지휘봉을 잡자마자 통합 우승을 하고 두 번째로 맞이한 2022~2023시즌. 전 감독은 또 한 번 SK를 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정관장을 상대로 3승 2패로 앞선 상황에서 치른 6차전에서 3쿼터 한 때 15점 차이로 앞서가다 통한의 역전패를 당했다. 7차전에서 분위기를 넘겨주며 거의 손에 넣었던 우승을 놓쳤다. 전 감독은 7차전이 끝나고 6차전을 복기하며 4쿼터 자신의 전략이 실패였고, 선수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며 거의 가족 누가 세상을 떠난 것처럼 눈물을 쏟았다. 김 수석은 비판과 비난을 기꺼이 자기 책임으로 돌리는 감독의 눈물 시작과 끝을 다 봤다. 김 수석이 “그 때 진 건 저한테도 지분이 있다…”고 말하자 전 감독이 말을 끊었다.

“김 코치. 그 때는 감독의 잘못이야. 3쿼터 이기고 있을 때 작전 시간을 부르면 안 되는 상황이야. 여태껏. 15점을 이기고 있는데. 그런데 나한테 만약 그 상황이 똑같이 왔다고 하면 작전 타임 또 부를 거야. 그 때는 선수를 쉬게 해주는 게 맞아. 쉬게 하면서 템포 조절하고 정리해서 이기고 있는 점수를 지키는 게 맞아.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점수를 지키지 못한 게 잘못이지, 몇몇 팬들은 ‘미친 작전 타임’이라고 하시는데 나는 지금도 자신 있게 작전 타임을 똑같이 부를 수 있다고 얘기할 수 있어. 선수들이 체력적으로 힘든 상황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때와 달리 주력 3명을 작전 타임 때 쉬게 하면서 벤치에 앉혀두지 않고 그대로 내보냈을 거야. 그래도 당시 전체적인 판단에 대해서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

-김 수석은 감독을 너무 잘 아니까, 조언할지 말지 생각이 많았겠어요. 당시에.

“감독님은 ‘레파토리’를 여러 개 준비하고 오니까….”

“아니, 내가 못 볼 수도 있는 것을 얘기할 수도 있었겠지.”(전희철)

“그런데 저는 감독님이 다 보고 있다고 생각을 했거든요. 만약에 이런 저런 상황에 맞는 조언을 드렸는데 감독님이 ‘그랬어?’라고 하면 다들 속으로 ‘그것도 파악 못했어’라고 할 거 아니에요. 그러면 감독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는 거잖아요. 그런데 감독님이 그런 적이 없으니까 판단을 잘 하실 거라 믿었죠.”

-김 수석이 감독님 판단에 개입할 여지가 많지는 않겠어요.

“경기 중에 상대 선수 누가 우리 선수 뒤통수를 때렸는데 내가 못봤을 때? 김 코치가 정말 때린 것을 봤다고 큰 소리를 내면 ‘그래? 때렸어?’라고 같이 열 받아할 수 있겠죠. 하하.”

-김 코치의 역할이 막중합니다.

“정해놨어요. ‘뒤에서 내 욕하다 걸리면 다 잘라버린다’고요. 하하.”

-스스로가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더 열심히, 팬들 의식하면서 이기려고 하는 게 아닐까요.

“제가 왜 농구에 진심인 줄 아세요?. 감독으로 왜 죽기 살기로 이기려고 하느냐면, ‘남들한테 싫은 소리 듣기 싫어서’에요. 싫은 소리를 농구하면서 너무 많이 들어서 제발 안 들었으면 해서 진심으로 이기려고 합니다. 이겨서 희열을 느낀다기보다 ‘아 싫은 소리 안 듣겠다’, 이게 더 좋아요. 프로니까 이기면 싫은 소리 안 나오잖아요.”

“챔피언결정전에서 준우승하고 저라도 감독님처럼 눈물이 났을 거예요. ‘내가 정말 그렇게 했다고’ 하면서 자책하는 눈물로 보였거든요. 저도 같은 상황이면 똑같이 그랬을 거예요. 저도 이제 누구한테 싫은 소리 듣기 싫더라고요. 그래서 선수들한테도 주기적으로 ‘뭐 하지 마라’식으로 주의를 많이 주죠. 귀찮을 겁니다. 그래도 재밌게 받아들여달라고 해요. ‘니희들 때문에 나 감독님한테 욕먹는다. 감독님 성격 알지? 나 죽는다. 평상시처럼 착한 사람으로 살게 해 달라’고요.”(김기만)

떨어질 일은 앞으로 없을 것이다. 전 감독은 김 수석의 이름을 거꾸로 뒤집어 ‘만기’라고 부르는데. 둘이 서로에게 들어둔 적금은 ‘만기’가 없을 것 같다. 용인=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듣다보니 척하면 척이다. 둘이 평생 같은 길을 안 가면 어색할 것 같다. 전 감독은 “ ‘만기’가 ‘정말 더러워서 못해 먹겠네’라고만 안하면 둘이 평생 농구로 붙어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김 수석은 이미 몇 년 전 수석코치였던 전 감독이 여자프로농구 팀 감독 제안을 받았을 때의 대화로 ‘평생 깐부’로 지낼 것을 확신했다고.

“감독님이 그러시더라고요.‘만기야, 여자 선수 3점 슛 자세 제대로 잡아주고 가르칠 줄 알아?’라고 해서 ‘모르겠는데요’라고 했죠. 그러니까 ‘그렇지? 나도 몰라, 안 갈래. 그냥 여기 있자’라는 거예요. 얼마나 웃었는지….”

각자의 이익을 우선 염두에 두는 동업자였다면, 분명 이 대화 뒤에 숨겨진 의도와‘트릭’이었을 거다. 계속 곁에서 배운다는 김 수석이 동반자로 전 감독에게 하나 드릴 게 있다고 한다. 말 선물이다. 돈은 없으니.

“감독님 혼자 가는 길에 엄한 짓 제가 안 할 테니, 가고 싶은 길로 가시고, 하고 싶은 거 다 하세요. 제가 주변 정리 할 테니.”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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