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종의 세계의 창 <10>] 유럽 정치 지형 바꾸는 좌파 ‘포퓰리스트’의 부상
2024년 8월 29일(이하 현지시각) 독일 튀링겐(Thüringen)주의 주도 에르푸르트(Er-furt)에서는 이름도 생소한 신생 정당 자라바겐크네흐트동맹(BSW·Bündnis Sahra Wagenknecht)당(이하 동맹당)의 선거 유세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이때 어느 백인 중년 남자가 연단에 접근하여 분홍색 페인트를 뿌렸다. 주 선거를 불과 3일 앞두었던 시점에 일어난 정치 테러였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정당의 공동 대표인 자라 바겐크네흐트는 비록 페인트 세례를 피하지는 못했지만 곧 안정을 되찾고 “어느 누구도 우리의 부상을 저지할 수 없다. 우리는 겁먹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런 발언은 지지자의 열렬한 환호로 이어졌다.
창당한 지 불과 8개월도 되지 않은 동맹당은 9월 1일 튀링겐주와 작센주에서 각각 열린 주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이런 돌풍은 9월 22일에 있었던 브란덴부르크주의 주 선거에서도 3위라는 성적으로 이어졌다. 브란덴부르크주에서는 통일 이후 계속 구동독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기민당(CDU)을 눌렀고, 튀링겐주와 작센주에서는 현 집권당 사민당(SPD)보다 더 많은 표를 얻었다. 도대체 동맹당은 어떤 당일까.
돌풍 주역 獨 좌파 ‘포퓰리스트’ 정당, 동맹당
‘자라바겐크네흐트동맹–이성과 정의’라는 긴 이름을 가진 동맹당의 리더인 자라 바겐크네흐트는 불과 1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독일 좌파당(Left)의 연방 의원이었다.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좌파당의 원내대표이기도 했다. 이란계 아버지로부터 구동독 지역 예나에서 태어난 이 정치인은 이미 10대 때 동독 공산당에 가입하였고, 통일 이후 이름이 바뀌고 몇 번의 이합집산 속에서 결성된좌파당에서도 금세 두각을 나타낸 당의 간판스타였다.
좌파당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던 그는 종종 당의 노선과 다른 돌출 발언으로 논쟁적인 인물로 알려지게 됐다. 그는 2015년 당시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시리아 난민 수용을 집중적으로 비판했다. 이민과 난민에 대해 상대적으로 소극적이던 좌파당의 전통적 입장과 다른 태도다. 뿐만 아니라 좌파당이 이념에만 사로잡혀 있고 반인플레이션 정책, 중소기업 정책, 기술 발전, 무역 등 경제 분야를 등한시한다며 당을 비판했다.
그는 러시아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를 비판하면서도 대러 제재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지금은 전쟁의 종식을 위한 협상을 무조건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사실상 러시아의 점령 지역에 대한 점유권을 인정하는 입장을 취했다. 동맹당은 반엘리트주의면서 유럽회의주의(Euroscepti-cism·유럽 통합에 반대하는 정치적 입장)와 대중적 포퓰리스트 접근 방식을 사용한다. 최근 급부상하고 있는 극우 정당인 독일을위한대안(AfD)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좌파에서 발원한 동맹당은 동성 결혼 찬성이나 소득 격차 축소를 위한 정부의 개입 확대, 지방 단위의 복지 제도 확충 등 정통 좌파 이념에 충실한 입장도 취하기 때문에 좌파 정당으로 분류된다.
동맹당은 독일의 가장 큰 문제로 떠오른이민·난민 문제, 경제적 낙후와 격차 확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타격 등 당면 현안에 대해 적극적인 해결을 바라는 진보적 중산층과 전통적으로 좌파당 또는 사민당을 지지했으나 극우 독일을 위한 대안으로 돌아선 노동자 계층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정당의 이념을 좌파 포퓰리즘, 사회주의적 보수주의, 민족주의, 유럽회의주의라고 부르는데, 이런 신종 좌파 정당의 출현과 부상은 비단 독일만의 일이 아니라는 점에서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프랑스에서도 멜랑숑의 급진 좌파 포퓰리스트 정당 약진
“좌파 내각은 제도적 안정을 위협할 것이다.”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8월 26일 약 두 달 전 개최된 프랑스 총선에서 190석을 차지하여 1당에 올라 선 좌파 연합인 신인민전선(NFP)에서 추천한 총리 후보를 배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신을 포함한 의회 구성원 다수가 반대하는 것이 그 이유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좌파 연합 대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반민주 쿠데타다”라고 격렬하게 반발했다. 마크롱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공화당의 미셸 바르니에를 총리로 임명하여 소수 정부를 구성했다.
마크롱과 프랑스 좌파의 반목은 그가 원래 속해 있던 사회당과 문제라기보다는 현재 좌파 연합의 중심으로 올라선 장 뤼크 멜랑숑(Jean Luc Mélenchon)과 그의 정당 ‘굴복하지않는프랑스(LFI)’와 불협화음에 있다. 멜랑숑은 2012년 이후 세 번이나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며, 마린 르펜에게 간발의 차이로 뒤져 결선투표에 나가지 못한 급진 좌파의 상징적 인물이다. 마크롱과도 두 번이나 대통령 선거에서 경쟁했다. 비록 대선에서 연거푸 실패했으나 그의 정당은 창당한 지 불과 8년 만에 좌파의 대표 격인 사회당을 밀어내고 좌파 연합의 중심으로 우뚝 섰다. 이번 총선에서도 사회당과 공산당, 녹색당을 누르고 좌파 연합에서 최다 의석을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의회 내 최다 의석을 가진 정당연합의 대표가 된 것이다.
멜랑숑은 반자유주의, 반국제조약 그리고 유럽회의주의를 주장한다. 반미와 친러, 친중 노선을 걷고 있다. 정교분리를 지지하면서도 히잡 착용에 반대하지 않고, 이스라엘· 하마스 전쟁에 대해서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등 자유주의적 성향을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는 르펜의 국민연합과는 뚜렷이 반대되는 좌파적 정책 지향을 보이는데, 예컨대 최고 90%의 소득 세율, 최고 임금제, 주 4일제, 6번째 주 유급휴가, 사설 요양원 폐지, 공공 의료 확대, 일부 산업에 대한 국유화, 강경한 탈원전, 공공 주택 확대 등이 대표적이다. 점점 더 많은 프랑스 국민이 그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다.
급진 좌·우파 약진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도전
유럽에서 신종 좌파의 등장은 유럽 재정 위기 당시 그리스와 스페인에서 단초를 보였다. 극단적 경제적 어려움에 따른 희생양 찾기는 좌우를 막론하고 포퓰리스트 정당의 발호를 야기한다.
사실 극우 정당이 부상하게 된 데는 경제적 낙후와 격차 확대, 이민·난민 문제에 대한 유럽 시민의 좌절감이 있다. 좌파에서도 종래의 자유주의적 좌파가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자 국가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이며 반세계화를 지향하는 새로운 좌파가 급속하게 세력을 확장한 것이다. 유럽 정치의 미래는 도전받고 있다. 중도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세계화 세력은 양쪽으로 협공받아 쪼그라들고 있으며, 급진 좌·우파 간 경쟁은 격화하고 있다. 급진 좌파 포퓰리스트 정당의 진화는 극우의 부상과 함께 유럽의 미래, 나아가서 전 세계 정치 지형을 바꿀 뇌관과도 같은 현상이다. 계속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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