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가자 할 때 안 오던 네가, 소설 통해 세계로 뻗는구나"... '소년이 온다' 엄마의 눈물

이유진 2024. 10. 11.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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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故 문재학 모친 김길자씨 인터뷰]
5·18 당시 계엄군 총격에 숨진 17세 아들
'폭도' 모는 정권에 맞서 평생 투사가 된 母
노벨상 소식에 "5·18 세계에 알려줘 감사"
고(故) 문재학 열사의 어머니 김길자(오른쪽)씨가 지난해 3월 31일 오전 광주 서구 5·18기념문화센터에서 열린 5·18 피해자와 유가족, 단체 대표와 면담에 앞서 전직 대통령 전두환씨 손자 전우원씨와 함께 추모 묵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당신이 죽은 뒤 장례를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한강 '소년이 온다'

소설가 한강(54)의 대표작 '소년이 온다'의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심장이 덜컥 내려앉던 순간을 김길자(83)씨는 잊지 못한다. 1980년 5월의 광주, 위험하다는 만류에도 '민주주의'를 외치며 버티던 열일곱 아들 문재학이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 평범한 어머니였던 김씨는 이후 아들의 폭도 누명을 벗기기 위한 '투사'가 됐다. 아들을 잃은 삶은 하루하루가 늘 장례식이나 마찬가지였다. 세월이 흘러 아들은 '폭도'에서 '열사'로 바로잡혔지만 그렇다고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렇게 아프게 보낸 아이가, 소설의 주인공이 됐단다. 그것이 '소년이 온다'였다.

아들의 죽음을 알리려 평생을 싸운 어머니에게 한강의 노벨상 수상 소식은 더 각별하고, 감격스러웠다. "작가님 덕에 5·18이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될 텐데, 제가 백 번 투쟁한 것보다 더 큰 힘이죠." 11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김씨는 연신 눈물을 훔치며 고마움을 표했다.


그날 광주, 열일곱 살 아들을 잃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최종 전남도청 진압 직후, 교련복을 입은 고등학생 안종필·문재학 열사가 사망한 모습. 2021년 공개됐다. 이 사진은 아시아월스트리트저널 기자였던 노먼 소프가 진압 2시간여가 지나 오전 7시 30분쯤 가장 먼저 내부에 진입해 촬영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애를 25일, 26일 두 번이나 데리러 갔어요. 근데 재학이가 버티는 거야."

40년이 훌쩍 지났지만, 김씨는 아직도 1980년 5월이 생생하다.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던 재학이 시위에 간 건 5월 21일. 목이 쉰 채 돌아온 아들은 그날 이후 매일 전남도청 앞에 나갔다. 그러다 계엄군이 들이닥친다는 소식에 남편과 함께 재학을 데리러 갔다. 그런데 앳된 얼굴의 아들은 퍽 단호했다. "'엄마, 어떻게 나만 살 수가 있어' 어린애가 그렇게 말하는데 할 말이 없데요." 그렇게 불안을 달래며 돌아섰는데, 돌아온 건 비보였다. 재학은 27일 새벽 계엄군의 전남도청 진압작전 도중 사망했다.

계엄군 발포 소식에 김씨는 머리가 멍해졌다고 했다. '도청에 있는 사람 다 죽었겠네'라는 생각이 막연히 들다 '우리 애도 거기 있는데' 하고 무너졌다. 날이 샌 뒤 달려간 도청은 물청소라도 한 건지 아무 흔적 없이 깨끗했다. 가족, 담임 선생님까지 뛰어들어 수소문한 끝에 망월묘지공원 땅을 파헤쳐 암매장된 아들의 주검을 찾았다.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그때 광주에선 사람이 너무 많이 죽어서 관도 없었어. 수의 한 벌도 못해줬고···"

그 한(恨)으로 남은 기억을 동력으로 김씨는 투사가 됐다. 아들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고, '폭도'로 모는 전두환 정권과 싸웠다. 집회 중 경찰에게 머리채를 잡혀 내팽겨치면서 "이X들 유족만 아니면 싹 다 묻어 버리는 건데"라는 폭언을 듣거나, 무전기에 머리를 폭행당해 여덟 바늘을 꿰맬 정도로 피투성이가 된 적도 있다. 매사 감시를 당했고, 강압적인 진압에 유족들은 겁을 먹고 움츠러들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김씨는 아들을 생각하며 꿋꿋하게 버텼다. 그리고 우직한 노력 끝에 재학은 수십 년 만에 유공자로 인정받으며 명예를 회복했다.


소년이 온다, 어머니는 위로받았다

11일 광주 서구 광천동 영풍문고 광주터미널점 도서검색대에서 한 시민이 한국 작가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의 '소년이 온다' 도서 위치를 찾아보고 있다. 광주=뉴시스

김씨는 2014년 발간된 '소년이 온다'를 한동안 보지 못했다. 처음엔 '우리 애를 왜'라는 의문이었고, 그다음엔 아들의 마지막을 생각하니 눈물이 멈추지 않아서다. 그러나 소설은 자체로 큰 위로가 됐다. "억지로라도 데리고 나왔어야 됐는데, 하는 죄책감에 오래 시달렸거든요. 그런데 재학이가 끝까지 남아 싸워 소설 주인공도 되고. 장하다는 생각만 들어요. 뭔가를 남기고 갔구나 하고."

무엇보다 소설은 김씨가 그간 싸워온 이유와 맞닿아 있다. 바로 재학의 죽음과 5·18의 진실을 널리 알리는 것. 김씨가 청와대, 광화문 등 전국 곳곳을 돌 때만 해도 5·18은 국내에도 얼마 알려지지 않았다. "엄마가 가자고 할 때 안 오던 네가 소설까지 나왔구나. 노벨상도 탔으니 세상이 다 알게 되겠구나, 했죠." 노벨위원회는 '소년이 온다'에 대해 "1980년 한국군이 자행한 학살 사건에서 살해된 인물, 역사의 희생자들에게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이 책은 이 사건을 잔혹한 현실화로 직면함으로써 증인문학의 장르에 접근한다"고 평가했다.

인터뷰 말미 김씨는 한강 작가에게 이 말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내가 무섭거나 사람들 앞에 설 때 항상 새기는 말이 '재학이가 못다 이룬 민주주의, 엄마가 다 이룰게'거든요. 그 외로움과 두려움을 작가님 소설 때문에 좀 덜었어요. 든든하고 감사합니다." 소설은 '장례식이 된' 김씨의 삶을 자체로 어루만져 줬다.

이유진 기자 iyz@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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