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깅노트] 간호사 중심 선언, 'PA 교육 공백'이 만든 구조적 모순

"통합 돌봄체계, 간호사가 중심에 선다."

이 문장은 11월17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2025 간호정책 선포식'의 핵심 의제였다. 간호법 제정 이후 처음 열린 공식 정책 선언의 자리였고, 간호계는 이 문장을 통해 향후 국가 보건의료와 돌봄체계의 방향을 분명히 했다. 고령화 심화와 지역사회 돌봄 확대라는 구조 변화 속에서 간호사의 역할을 주변이 아닌 중심으로 옮기겠다는 선언이었다. 이 자리에는 정부, 여야 정치권, 유관단체 관계자들이 대거 참석해 뜻을 함께했다.

행사에 모인 얼굴들은 이 선언의 무게를 보여준다. 국무총리와 여야 지도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관계자들이 한자리에 섰다.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 역시 영상 축사를 통해 간호사의 역할 확대를 공식적으로 언급했다. 간호는 의료 영역을 넘어 국가 돌봄체계의 핵심 역할을 맡게 될 것이며, 그에 따라 더 넓고 중요한 책임을 지게 될 것이라는 인식이 분명히 드러났다. 정부는 간호계와 협력해 체계적인 지원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지점에서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간호계는 준비되지 않은 요구를 던진 것이 아니다. 간호·요양·돌봄 통합체계 구축, 배치기준 개선, 교육 혁신, 숙련도 기반 보상체계 등 구체적인 정책 과제들이 이미 제시돼 있다. 간호사의 역할이 확장된다는 것은 곧 교육, 보호, 책임 구조가 함께 정비돼야 한다는 의미라는 점도 간호계는 알고 있다. 이번 선포식은 권한 요구라기보다는 조건 정비를 요구하는 자리였다. 선언의 방향과 문제의식은 충분히 구체적이었다.

그럼에도 현실의 간호 현장은 오래전부터 다른 문제를 안고 있다. 간호사 인력 부족은 더 이상 새로운 이슈가 아니다. 매년 일정 규모의 신규 간호사가 배출되지만 현장에는 늘 사람이 부족하다는 말이 반복된다. 이는 양성 규모의 문제가 아니라 이탈 구조의 문제다. 간호사들이 버티지 못하고 떠나는 구조가 고착돼 있다는 뜻이다.

이탈의 가장 큰 원인은 과중한 업무다. 단순히 일이 많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무엇을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가 불분명한 상태에서 책임만 늘어나는 구조가 근원이다. 특히 의료 현장에서는 간호사가 의사의 업무 일부를 떠안는 관행이 오랫동안 지속돼왔다. 제도는 이를 명확히 규정하지 않았고, 현장은 관행으로 버텨왔다. 이 '모호함'이 업무 부담을 키우고 이탈을 부추겼다.

전문간호사(PA간호사)의 등장은 이런 구조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결과다. PA는 새로운 직역을 실험적으로 도입한 사례라기보다는 이미 벌어져 있던 역할 공백에 이름을 붙인 존재에 가깝다. 현장에서 간호사가 담당하던 확장된 업무를 공식화하려던 시도였다. 여기서 핵심은 이 제도화 과정에서 무엇이 먼저 정리돼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이다. 그런데 업무 범위만 정리하고 교육 기준을 뒤로 미루는 선택은 구조적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최근 PA간호사 교육 기준을 비운 채 법부터 시행하려는 복지부의 행보가 문제시됐다. 씁쓸하게도 이런 접근은 간호계에서 익숙하다. 인력 부족이 심화되면 먼저 사람을 투입하고 제도는 나중에 보완하겠다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 방식은 간호인력 정책에서 반복적으로 실패해왔다. 교육과 보호장치가 없는 역할 확대는 결국 개인에게 부담과 책임을 전가한다. 이번이라고 해서 그 실패가 이탈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이 지점에서 정은경 장관의 발언을 다시 떠올릴 필요가 있다. 정부는 간호사의 역할이 더 넓어지고 더 중요한 책임을 맡게 될 것이라고 이미 인정했다. 그렇다면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는 준비 역시 '전제'였어야 한다. 체계적인 지원이라는 말은 '선언'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교육 기준, 역할 경계, 책임 구조가 함께 설계될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간호사를 의료·돌봄의 중심에 세우겠다'는 선언은 간호사 양성이 여전히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구조인 한 공허하다. PA간호사 교육 기준을 비운 채 법부터 시행하는 선택은 간호사 인력 부족의 근본 원인을 외면한 채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꼴이다. 간호계의 이 선언이 허상이 되지 않으려면 PA간호사 교육은 '이후에 보완할 과제'가 아니라 '지금 당장 정리돼야 할 전제'다. 중심에 서겠다는 말은 이미 충분히 나왔다. 이제 남은 것은 그 말을 버텨낼 구조다.

이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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