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분할 프로그램’ 있는데…전세 사기 피해자 두 번 울리는 은행·당국 ‘무관심’

배재흥 기자 2026. 2. 2.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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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사기피해자들이 포함된 전세사기 전국대책위와 민달팽이유니온 활동가들이 지난해 9월30일 부실 대출 심사로 전세사기 피해를 키운 5대 시중은행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A씨는 지난 2024년 전세사기 피해자가 됐다. 그는 전세 보증금 1억2000만원 중 한국주택금융공사(HF) 보증으로 은행에서 8000만원을 대출받았다가 사기를 당했다. 이후 지난해 말 HF의 특례 채무조정을 통해 대출금 8000만원 중 90%인 7200만원을 최장 20년간 분할 상환할 수 있게 됐다.

문제는 나머지 10%인 800만원이었다. 그는 당장 800만원을 구하기 힘들어 지인들에게 돈을 빌려 겨우 은행에 갚았다. 그러나 알고보니 금융당국의 요청으로 은행들이 운영 중인 ‘장기분할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남은 대출금 10%도 충분한 시간을 두고 상환할 방법이 있었다. 나머지 10%도 대출받은 은행에서 최대 20년간 분할 상환이 가능했다. 은행은 이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A씨는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상황에서 돈 들어갈 일이 많은데 일단 10%를 내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며 “이런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도 뒤늦게 다른 피해자들을 통해 알았다”고 말했다.

은행과 금융당국의 소극적 대응 속에 전세 사기 피해자의 대출금 상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장기분할 프로그램이 피해자들조차 모른 채 제대로 운영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한창민 사회민주당 의원이 2일 금융감독원에서 받은 ‘전세 사기 피해 지원을 위한 장기분할 프로그램 현황’을 보면, 5대 은행(KB국민·신한·우리·하나·NH농협)은 HF의 대위변제 이후 남은 대출금 등을 10~20년간 분할 상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인터넷전문은행 카카오뱅크는 잔여 대출 상환을 2년 단위로 최대 20년간 연장할 수 있다. 은행들은 영업점 상담이나 전화로 장기분할 프로그램을 안내 중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한창민 의원실이 확보한 전세 사기 피해자 진술을 보면, HF의 대위변제 이후 남은 대출금 10%의 일시 상환을 요구하는 사례가 다수 발견된다. 은행 자체 장기분할 프로그램이 없다거나 원래 일시 상환해야 한다고 안내하는 식이다.

은행별 지원 건수도 천차만별이다. 하나은행의 경우 지난 2024년 9월부터 지난해 10월까지 장기분할 지원이 단 1건에 불과했다. 다만 하나은행 측은 “대위변제 대신 연체 정보 등록 유예 등 상환 부담을 줄이는 다른 선택을 한 피해자가 많았던 영향이 있다”고 말했다.

은행들도 장기분할 프로그램 존재 여부를 명확히 알지 못했다. 한 은행 관계자는“전체 고객 중에 전세 사기 피해자는 소수이다 보니 일선에서 잘 알지 못해 안내가 부족했던 것 같다”고 의원실에 답변했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은행들이 개별 차주에게 연락해 관련 프로그램을 안내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며 “작년에는 일선 직원이 업무를 숙지할 수 있도록 안내를 강화해달라고 은행에 요청했다”고 말했다.

한 의원은 “가난한 전세 사기 피해 청년의 고통에 무관심한 은행과 금융감독기관의 행태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배재흥 기자 heu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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