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만의 新무궁화고] 무궁화와 오얏꽃의 엇갈린 운명

2022. 9. 28.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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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만의 新무궁화고] (4) 무궁화와 오얏꽃의 엇갈린 운명

조선말기 고종(재위 1863∼1907년)은 서구 신문물에 대응하며 조선이 독립국임을 전세계에 알리고자 했다. 그리고 국가 상징의 필요성을 인식함에 따라 국기(태극기)를 제정ㆍ반포(1883년)했다. 또한 대한제국 선포(1897년) 이후 ‘대한제국 애국가(1902년)’를 국가(國歌)로 채택하기에 이른다.

비슷한 시기 오얏꽃(李花ㆍ자두꽃)은 대한제국의 상징에 포함됐다.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것은 무궁화 역시 그에 상응하는 위상을 획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두 꽃의 운명은 달라지고 만다. 변곡점은 대한제국 외교권을 강탈당한 뒤 순종의 즉위와 국권이 피탈된 시점이었다. 이번 글에서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함께했던 무궁화와 오얏꽃의 파란만장한 족적을 들여다본다.
 

오냥은화(五兩銀貨) 왼편에 새겨진 무궁화 꽃봉오리ㆍ잎(왼쪽)과 칙임관 1등 대례복에 금수로 놓인 무궁화(오른쪽) 출처=한국은행 화폐박물관 누리집, 문화재청 대한제국 황제복식


대한제국의 상징으로 나란히 등장한 오얏꽃과 무궁화

1900년 4월19일 대한제국은 <관보>를 통해 “이화대훈장은 나라 문양에서 취한 것이다(李花大勳章 蓋取諸國文也)”라고 밝혔다. 이화(李花), 즉 오얏꽃 문양이 나라 문양(國文)으로 채택됐다는 공식 기록이다.

오얏꽃과 관련된 유의미한 기록은 개항기부터 찾아볼 수 있다. 1892년 발행된 오냥은화(五兩銀貨)에 그 문양이 새겨졌고, 1895년 서구식 군복이 도입되자 육군 모자에도 표장으로 쓰였다.

그런데 이채롭게도 은화와 육군 모자에서 오얏꽃뿐 아니라 무궁화 꽃봉오리ㆍ잎 문양도 발견된다. 당시 무궁화가 나라 문양으로 공식화되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국가 차원에서 무궁화가 활용된 다른 사례로 <문관대례복제식(文官大禮服製式)(1900년, 칙령 제15호)>에서 언급한 “표장은 모두 금수로 하되 복장 상의 앞면에 … 칙임관 1등은 무궁화 여섯개로 한다(表章은 總히 金繡하되 上衣前面 … 勅任官一等은 槿花六枝오)”는 규정도 찾아볼 수 있다.

오얏꽃 상징의 위상 변화와 무궁화 상징성의 확대

오얏꽃은 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해 외교권을 강탈당한 을사늑약(1905) 이후, 순종의 즉위(1907)와 함께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당시 일본이 오얏꽃을 이씨 왕가의 문장으로 의미를 축소했기 때문이다. 이후 오얏꽃은 나라 문양의 지위를 박탈당한 채 이왕가(李王家) 문장으로만 명맥을 이어가야 했다.

그렇다면 무궁화는 어떤 상황에 있었을까. 대한제국기에 무궁화와 오얏꽃은 나란히 제국을 대표했지만 두 꽃 사이에는 다른 점이 있었다. 오얏꽃 문양이 제국과 황실 중심으로 쓰였던 반면 무궁화는 제국 문양으로서의 쓰임뿐 아니라 민간에까지 너른 공감대를 형성했다. 사례들을 문헌 기록으로 살펴보자.

조선 문신 허유(1833∼1904년)의 <후산집>에는 “우리나라를 근역(무궁화 나라)으로도 부른다(我東之號以朝鮮 又稱槿域爲是也)”는 문장이 남아 있다. 또한 <태극학보> 제17호(1908년 1월24일)에 수록된 정전내의 시 <한양술회 오수>에서 ‘근화고국(槿花故國)’ 표기가 나타난다. 독립운동가 이승희(1847∼1916년)가 펴낸 <한계유고>에서는 ‘근화세계(槿花世界)’라는 글귀를 확인할 수 있다. 근역ㆍ근화고국ㆍ근화세계는 ‘우리나라’를 뜻한다. 이 시기 ‘나라’의 의미가 시나브로 더해진 무궁화의 상징성이 집약된 낱말들이다.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해 황해도 신천ㆍ재령 등지에서 전투를 벌였던 강필도는 <동학도종역사>에 “나라의 조정이 그 이로움의 크고 작음을 살피지 않으니 억울한 백성이 통곡하고 몸 둘 곳이 없으며, 지금 당하고 있는 천하의 큰 어지러움은 반드시 유학의 도가 밝은가 밝지 않은가에 달려 있다(廟堂不察其利益之大小 被告痛哭無地而已 當今天下之大亂 必關於斯道之明不明)”라며 “천하의 안정과 근역의 이치는 가히 유학의 도가 크게 밝은 데 달려 있다(天下安定 槿域一理 猶在斯道之大明)”는 기록(1900년 8월13일)을 남겼다. 그가 언급한 ‘근역(槿域)’은 무궁화가 피어난 영역을 가리키며 ‘우리나라’로 해석이 가능하다.

동학도종역사(東學道宗繹史) 제2편, 경자송암조난(庚子松菴遭難) 출처=동학농민혁명 종합지식정보시스템


상당수의 무궁화 노래도 당시 저작돼 일반에 보급됐다. <독립신문(1897년 8월17일자)>에 게재된 노래‘무궁화’를 비롯해 배제학당 방학식을 소개한 <독립신문(1899년 6월29일자)> 기사 중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후렴이 인용됐다. 노래가 대중성과 확산성을 갖고 있다는 점을 전제로 할 때, 이 무렵 백성들 사이에서 무궁화의 상징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얏꽃과 달랐던 무궁화의 상징성

오얏꽃은 대한제국기에 나라의 공식 문양으로 채택됐으나 국가의 명운에 따라 이왕가 문장으로 의미가 축소되고 말았다. 반면 오얏꽃과 더불어 제국의 상징으로 쓰였던 무궁화는 농민과 학생 등 일반인에까지 공감대가 확장돼 대중성을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 시기 무궁화와 오얏꽃의 행보에서 어떤 의미를 새겨볼 수 있을까. 국가나 황실에서 의도적으로 상징이 지정된다 하더라도 결국 구성원(국민)의 공감대 형성과 수용 여부에 따라 생명력이 결정된다는 점일 것이다. 엇갈린 두 꽃의 운명이 국가 상징의 효용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김영만 (신구대 미디어콘텐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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