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9 스페인 수출 코앞인데"... 미국 방산업체 발목잡기

스페인 국방부가 72.4억 유로 규모의 대규모 자주포 현대화 사업을 발주하면서 한국의 K9 자주포가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복병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미국 기업 제네럴 다이내믹스의 유럽 자회사 GDELS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제안이 배제된 것에 강력히 반발하며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이를 수리했습니다.

겉으로는 한국산 무기의 순조로운 유럽 진출로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NATO 동맹국 간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방산업체들의 치열한 생존 경쟁이 숨어 있습니다.

반세기 된 포병 전력, 전면 교체 나서다


스페인 육군의 포병 전력은 사실상 구시대 유물 수준입니다.

주력 장비인 M109A5 자주포 96대는 무려 반세기 이상 전에 미국에서 도입한 것이죠.

여기에 스페인 국내 업체 산타바르바라 시스테마스가 제조한 155mm 견인포 84문과 영국에서 들여온 L118 경포 56문이 전부입니다.

현대전의 요구사항을 충족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전력인 것입니다.

이에 스페인 정부는 야심찬 현대화 계획을 승인했습니다.

장륜식 자주포 86대와 장궤식 자주포 128대를 새로 도입하고, 이와 함께 탄약 보급 차량 214대, 회수 차량 35대, 지휘통제 차량 59대 등 총 500대가 넘는 차량을 조달하는 대규모 사업입니다.

총사업비는 72.4억 유로, 우리 돈으로 약 11조 원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죠.

스페인 국방부의 계획은 단순히 무기를 사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스페인어권 방위산업 전문매체인 디펜스 미디어 인포데펜사는 지난해 12월 "스페인 국방부가 연말까지 주문서에 서명하는 것을 목표로 정식 협상을 시작했다"고 보도하면서, 이 사업이 제조부터 전체 라이프사이클 유지보수까지 스페인 국내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경제적 관점에서 국내 고용 창출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이죠.

Indra와 EM&E, 거대 계약 따내다


스페인 국방부는 결국 자국의 두 방산 기업인 Indra와 EM&E가 설립한 합작회사들에게 이 거대한 계약을 맡겼습니다.

Indra가 설립한 ATP Cadenas는 플랫폼의 개발과 설계를 담당하고, EM&E가 설립한 ATP Ruedas는 포탑 모듈의 개발과 설계를 맡게 됩니다.

HX3

아직 최종 기종이 공식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업계에서는 윤곽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45.5억 유로가 투자되는 장륜식 자주포는 Indra와 독일 라인메탈 MAN 밀리터리 비히클스의 제휴를 기반으로 국내 개발될 것으로 보입니다.

구체적으로는 HX3 차량과 AGM 포탑 모듈을 조합하는 방식이 유력하죠.

그리고 26.8억 유로가 투자되는 장궤식 자주포 부문에서 한국의 K9이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것입니다.

K9은 이미 폴란드, 노르웨이, 핀란드, 에스토니아 등 다수의 NATO 회원국에 수출된 검증된 무기체계입니다.

스페인 입장에서도 NATO 표준에 부합하면서 가격 경쟁력까지 갖춘 K9은 매력적인 선택지인 것이죠.

GDELS, "우리 제안도 요건 충족했다" 반발


하지만 여기서 미국 기업 제네럴 다이내믹스의 유럽 자회사인 GDELS가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GDELS는 자신들이 제안한 ASCOD 기반 Nemesis 자주포가 "스페인군의 요건을 거의 충족하고 있었다"며 스페인 국방부의 결정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Nemesis 자주포

GDELS의 주장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습니다.

ASCOD 장갑차는 이미 스페인군이 운용 중인 플랫폼이며, 산타바르바라 시스테마스는 GDELS 산하에 있는 스페인 업체입니다.

즉, 자신들의 제안이야말로 스페인 기술과 인력을 활용하는 진정한 국산화라는 논리인 것이죠.

GDELS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Indra와 EM&E가 설립한 합작회사에 제공될 예정인 약 30억 유로 규모의 무이자 대출 집행 금지를 요구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이를 수리했습니다.

GDELS는 소송의 목적에 대해 "스페인 기술, 산타바르바라 시스테마스 직원, 공급업체 보호, 그리고 스페인 방위 부문의 산업 역량 강화"라고 밝혔습니다.

소송은 단순한 불복이 아니다


한국의 기업 문화에서는 국가나 정부의 선정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고 소송을 제기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공정한 경쟁에서 졌으면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니냐"는 시각이 있을 수 있죠.

하지만 해외 방산 경쟁입찰에서는 상황이 다릅니다.

유럽과 미국의 방산 계약에는 "선정 결과에 불복이 있으면 소송을 제기할 권리"가 제도적으로 보장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투명성과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한 장치인 것입니다. 따라서 GDELS의 소송 제기 자체는 비정상적인 행동이 아니라 정당한 권리 행사로 봐야 합니다.

물론 법원이 소송을 수리했다고 해서 무이자 대출 집행이 즉각 중단되는 것은 아닙니다.

전문가들은 "법원의 수리만으로는 대출 실행이 멈추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GDELS의 진짜 목적은 무엇일까요?

단순히 Nemesis 채택을 관철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Indra와 EM&E가 주도하는 사업 구조 자체에 참여하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NATO 전력 요건이라는 더 큰 그림


스페인의 자주포 현대화 사업을 이해하려면 NATO라는 큰 틀에서 봐야 합니다.

NATO 회원국은 제5조 집단방위 조항에 따라 동맹국이 공격받을 경우 일정 수준의 전력을 NATO에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따라서 스페인의 군비 확장은 단순히 자국의 안보 환경만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 NATO 전체의 전력 요건 충족이라는 관점에서 봐야 하는 것이죠.

이런 맥락에서 보면 K9의 채택은 NATO 표준화와 상호운용성 측면에서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이미 다수의 NATO 회원국이 K9을 운용하고 있고, 폴란드는 무려 수백 대를 도입해 유럽 최대 규모의 K9 운용국이 되었습니다.

스페인이 K9을 도입하면 탄약, 부품, 정비 등에서 폴란드를 비롯한 다른 NATO 회원국과의 협력이 용이해집니다.

반면 GDELS의 Nemesis는 스페인 고유의 솔루션이 될 수는 있지만, NATO 차원의 표준화와는 거리가 멀 수 있습니다.

GDELS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있겠지만, NATO 전체의 전력 구조를 고려하면 K9 선택에는 나름의 전략적 논리가 있는 것입니다.

한국 방산의 유럽 진출, 순탄치만은 않다


K9의 스페인 수출 가능성은 한국 방산의 유럽 진출이라는 큰 흐름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하지만 GDELS의 소송이 보여주듯, 그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미국계 방산업체인 GDELS는 단순히 한 건의 계약을 놓고 다투는 것이 아닙니다.

유럽 방산 시장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지키려는 것이죠.

산타바르바라 시스테마스라는 스페인 업체를 보유하고 있는 만큼, 스페인 시장에서 밀려날 수 없다는 절박함이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이 사업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합니다.

GDELS의 소송이 실질적인 영향을 미칠지, 아니면 형식적인 절차에 그칠지는 아직 불분명합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한국 방산이 유럽 시장에서 입지를 넓혀가는 과정에서 기존 업체들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K9의 스페인 수출은 그 시험대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