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꼬무 찐리뷰]신문사로 위장한 고종황제의 비밀 조직…반드시 기억해야 할 '헤이그 특사'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26일 방송된 '황제의 비밀특사'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유선, 신성록, 주시은 아나운서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네덜란드의 오래된 건물
때는 1992년 7월 14일, 유럽에 있는 풍차의 나라 네덜란드야. 한국인 노신사 이기항 씨가 신문을 보고 있어. 20년 전 이곳 네덜란드에 주재원으로 온 후, 지금은 아내와 함께 작은 무역업을 하고 있어. 그런데 신문을 넘기던 그의 손이 딱 멈춰. 한 기사 내용이 눈에 들어온 거야. 부부가 사는 곳에서 6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어느 오래된 건물이 재개발로 인해 매각될 위기에 처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어. 이 씨 부부는 그 기사를 그냥 넘길 수 없었어. 다음날, 부부는 차를 몰고 그 건물이 있다는 도시로 향해. 그리고 도착해서 건물을 보는 순간, 가슴이 턱 막혀. 왜 그랬을까? 그 이유를 이기항 씨에게 직접 들어봤어.
"운전해가지고 와봤더니 너무나도 건물이 퇴락해가지고 오랫동안 수리를 안 해가지고 그런 상태로 돼 있어요. 맨 아래층에는 이게 한 거의 100평 됩니다. 당구장이었어요. 2층 3층은 올라갔더니 그 안에 방들이 뭐 엉망이에요. 그냥 쓰레기가 쌓여 있고. 참담했어요. 어떡하나..."
- 이기항, 네덜란드에 사는 한국인
이 건물이 지어진 건 1625년, 무려 370년이 다 돼가는 오래된 3층 건물이야. 1층은 당구장이고 2, 3층은 무주택자들이 임시거처로 쓰고 있었어. 건물의 상태를 확인한 부부는 이 건물을 인수하기로 결심해. 부부는 평생 벌어온 돈 20만 불을 다 털어넣어. 그리고 1년 후, 갖은 고생 끝에 이 건물을 인수하는 데 성공해. 수백 년 전에 지어진 허름한 건물이잖아. 이 씨 부부는 왜 이런 결정을 내렸을까?
부부가 사들인 낡은 건물에는 특별한 사연이 숨겨져 있었어. 무려 백 년 전, 이 건물을 찾아온 한국인들이 있었거든. 대한민국이 '대한제국'으로 불리던 시기, 9300km가 넘는 긴 여정 끝에 이 건물에 도착했던 세 명의 한국인들이 있었어. 그들이 누구인지, 왜 이 먼 곳까지 찾아와야 했는지, 이 건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부부가 왜 평생 모은 돈으로 이 건물을 인수했는지. 지금부터 낱낱이 알려줄게.
▲ 의문의 경운궁 화재 사건
서울에 있는 궁 중에, 덕수궁 알지? 덕수궁의 옛이름은 '경운궁'이야. 대한제국 시기 고종황제가 머물던 곳이었어.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 1904년 4월 14일 늦은 밤. 경운궁에서 커다란 불길이 치솟기 시작해. 불길이 시작된 곳은 경운궁 한가운데 있는 함녕전, 바로 고종황제가 잠을 자는 침전이야.
다행히 이날 고종황제는 함녕전에 없었어. 당시 함녕전을 수리하느라 다른 곳에 있었다고 해. 하지만 이날 화재는 그야말로 대재앙이었어. 그날 밤 북동풍이 거세게 불어닥쳤거든. 함녕전에서 시작된 불길은 거센 바람을 타고 경운궁 남쪽과 서쪽으로 번져가. 순식간에 경운궁 전체가 화염에 휩싸인 거야. 그때 경운궁을 촬영한 사진이 남아있어.
경운궁 밖에서 찍은 사진이야. 당시 경운궁 주변에는 외국 공사관들이 많이 있었어. 고종은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어. 그렇게 황제가 된지 8년이 되던 해였어. 이때가 1904년. 당시 시대상황을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서세동점(西勢東漸). 서양세력이 너도나도 동쪽을 점령하려 들던 시기였어. 가까이에는 러시아, 일본, 중국이 있고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도 앞다퉈 한국으로 몰려 들었어. 세계 열강들이 대한제국을 놓고 각축을 벌이던 혼란스러운 시기에, 경운궁에 대화재가 일어난 거지.
경운궁에 불길이 치솟자 각국 공사관에서 불을 끄기 위해 달려왔어. 그런데 다들 궁 밖에서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해. 왜 그랬을까? 당시 상황을 상세히 담은 기록이 있거든. 선교사이자 교육자로 당시 조선에 머물었던 호머 헐버트가 펴낸 'KOREA REVIEW'라는 책에 그 이유가 실려있어.
"불이 외부에서 감지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의 화재경보기가 울렸고 일본과 중국 소방대가 경운궁으로 달려왔지만 모든 성문이 닫혔으며, 그들의 외침에도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었습니다."
- 'KOREA REVIEW' 내용 中
경운궁의 모든 문이 굳게 닫혀 있어 들어갈 수가 없었어. 왜 문을 열어주지 않았던 걸까? 궁궐 안에 화재가 발생할 경우, 문을 굳게 걸어 잠그는 게 당시 규정이었대. 혹시 반란이 아닐까, 염려한 거야. 예전부터 반란을 일으킬 때는 불부터 지르는 경우가 많았거든. 그러니까 불이 나면 일단 외부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걸어 잠그는 게 당시 매뉴얼이었던 거야. 그럼 고종황제는 어떻게 됐을까? 별궁에 있는 수옥헌으로 피신했어.
다음날 아침, 날이 밝자 모두들 눈앞의 풍경에 말을 잇지 못해. 그때 경운궁의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있어.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던 중화전을 비롯해 즉조당, 석어당, 관명전 등 유서 깊은 전각들이 잿더미가 돼버렸어. 피해액을 따질 수도 없는 엄청난 손실을 입은 거야. 그런데 그 시기 항간에 이상한 말이 떠돌기 시작해. '누군가 고의적으로 경운궁에 불을 질렀다'는 거야. 이런 의혹을 불러일으킨 건 한 장의 괴문서 때문이었어.
"松林有變 虎尾先藏 靑龍之昔 寄位兩旬"
(송림유변 호미선장 청룡지석 기위양순)
누군가 종로 거리에 이런 글을 써서 붙여놨대. 글자 그대로 의미를 순서대로 풀어보면, '소나무숲에 변고가 생긴다', '호랑이 꼬리에 먼저 숨는다', '청룡의 옛날', '양순의 위치에 의탁한다'는 거야. 이 문장은 원래 의미를 숨긴 암호 같은 문장이야. 이 열여섯 글자에 담긴 진짜 뜻을 풀어줄게.
첫구절에 나온 '소나무 숲'은 '궁궐'을 의미한대. 궁궐 안에 있는 전각들은 소나무로 지어졌거든. '호랑이 꼬리'는 풍수로 따져보면 특정 장소를 가리킨대. 혹시 '사방신'이라고 들어봤어? 동서남북 네 방향을 다스리는 신령한 동물을 의미하거든. 동쪽은 청룡, 북쪽은 현무, 남쪽은 주작, 서쪽은 백호를 가리켜. 그럼 호랑이 꼬리는, 서쪽. 바로 고종황제가 피신한 수옥헌이야.
세 번째 구절 '청룡지석'은 구체적인 날짜를 가리켜. 2024년이 갑진년이지? 푸른 용은 육십갑자 중에서 '갑진'을 의미해. 경운궁이 불탄 1904년 4월은 갑진년, 갑진월이야. 년과 월이 나왔고, 마지막 글자 '석'은 날짜를 의미해. 이 글자는 '옛날 석(昔)'이라는 글자야. 윗부분을 보면 '열 십(十)'자 두 개가 나란히 붙어있지? 그러면 얼마야? 20이야. 그 밑에 '한 일(一)'자가 더 있어. 20 더하기 1은 21. 아랫부분에 '날 일(日)'자가 있으니까 '석(昔)'이라는 글자는 '21일'을 가리키는 거래. 이렇게 한자를 쪼개서 의미를 푸는 것을 파자(破字)라고 해. 정리하자면, '청룡지석'은 1904년 4월 21일을 뜻해.
가장 중요한 건 마지막 구절이야. 기위양순. '기(寄)'는 '맡기다', '의탁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어. '양순(兩旬)'은 '순(旬)'이 두 개 있다는 뜻이야. 여기 '순(旬)'을 '날 일(日)'자로 보면 수수께끼가 풀려. '날 일(日)'자 두 개를 위아래로 놓으면 '창(昌)'이라는 글자가 되잖아. '창'으로 시작하는 궁궐, 뭐가 있어? 창덕궁.
자, 그럼 수수께끼는 풀렸어. 이 괴문서의 의미는 이렇게 해석돼. '경운궁에 변고가 일어나면', '고종황제는 먼저 수옥헌에 숨게 된다', '1904년 4월 21일', '고종황제는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다'. 어때? 그럴 듯 한 것 같아?
더 놀라운 건 이 글귀가 내걸린 시기야. 'KOREA REVIEW'에도 이 내용이 기록돼 있어.
"이 화재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예언이 발견됐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시내 중심지인 종로에 익명의 글을 올려 이러한 예언이 발견되었는데,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고 합니다. '송림유변 호미선장 청룡지석 기위양순' 이상한 것은 이 비문이 연초에 걸렸다는 겁니다."
- 'KOREA REVIEW' 책 내용 中
이 글이 경운궁 대화재가 일어나기 전에 내걸렸다는 거야. 그러니 사람들은 '누군가 고종황제를 창덕궁으로 보내기 위해 일부러 불을 질렀다'고 생각했어. 그렇다면 범인은 과연 누구일까?
영국의 한 일간지 통신원이었던 어니스트 베델은 경운궁 화재사건을 특종 보도했어. 기사에는 심상치 않은 내용이 실려있어.
'경운궁 화재는 최근의 정치적 상황에 불만이 많은 방화범의 소행으로 보인다'
당시 우리나라와 가장 정치적으로 엮여있던 곳은 일본이야. 일본이 방화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시사한 거야. 이 기사는 베델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특종이 되고 말았어. 기사를 낸 직후에 해고됐거든. 일본에 비판적인 기사를 썼다는 게 해고의 이유였대.
누군가 고의로 방화했다는 증거는 그 이후에도 밝혀진 게 없어. 다만 남겨진 기록에 따르면, 함녕전을 수리하고 있었다고 했잖아? 새로 설치한 구들장에 불을 피우다가 톱밥에 옮겨 붙으면서 불이 난 걸로 전해져. 하지만 민심은 더 흉흉해졌어.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후 제국의 운명은 급격한 쇠락의 길을 걷게 돼.
▲ 치욕적인 역사의 현장, 그리고 제국익문사
고종황제가 피신한 수옥헌은 황실도서관이었어. 경운궁이 불타버린 후 고종은 이곳에서 머물기로 했어. 그리고 이곳 수옥헌은 치욕적인 역사의 현장이 되고 말아.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이곳 수옥헌에서 체결된 거야.
을사늑약의 주요내용은 크게 두 가지야. 첫째,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일본이 대리한다. 국제사회에서 정당한 주권을 가진 국가로 인정받을 수 없게 된 거지. 둘째는 통감부를 두어 대한제국의 내정에 간섭할 수 있게 했어.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기 위한 첫 단계에 들어선 셈이야.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그날밤, 일본군이 경원궁 주위를 둘렀어. 일본이 파견한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황제에게 조약을 체결할 것을 강요해. 하지만 고종황제는 끝까지 반대했어. 그러자 이토 히로부미는 내각대신들을 위협해. 그렇게 을사늑약에 찬성표를 던진 다섯 명의 대신을 역사는 '을사오적'이라 기록하고 있어.
이 사진은 을사늑약을 기념하기 위해 찍은 사진이야.
앞줄 가운데, 이토 히로부미가 보여.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은 미국 공사관 부영사인데,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당시 상황을 글로 남겼어.
"새벽 1시 반에 나는 구내 주위를 산책하러 나갔다. 인력거가 덜컹거리는 소리가 있어서 나는 아래로 가서 담 너머를 바라보았고 일본인들이 가는 것을 보았다. 한 나라의 운명이 내가 서있는 곳에서 50야드 안쪽에서 결정되었고 1200만 명의 독립제국이 투쟁도 없이 착취당하고 괴롭힘 당하게 됐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였다. 하지만 각료들은 서명을 끝마쳤다."
- 당시 미국 공사관 부영사의 기록
을사늑약 이후 수옥헌은 중명전으로 이름을 바꾸게 돼.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다'는 의미래. 하지만 중명전은 고종에게 감옥이나 다름없었어. 항상 일본의 감시 속에 지내야 했거든. 주위의 대신들도 친일파들로 가득했어. 이런 상황에서 고종황제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고종황제에게는 두가지 얼굴이 있었어. 외세의 침략에 아무 대응도 하지 못한 무능한 황제. 그리고 마지막까지 국권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던 황제. 혹시 '제국익문사'라고 들어본 적 있어? 매일 사보를 발간하는 신문사 같은 곳이거든. 하지만 그건 겉모습일뿐 실제 하는 일은 따로 있었다고 해. 제국익문사의 정체는 고종황제 직속 비밀정보기관이야. 주로 일제의 동향이나 주요 인물들을 감시하고 고종황제에게 보고를 올렸대. 보고하는 방식도 아주 은밀해.
"비밀보고를 할 때에는 먹으로 쓰지 않고 화학비사법을 사용하여 쓸 것."
그냥 보면 아무 것도 적히지 않은 빈 종이야. 근데 불에 비춰보거나 특수한 용액을 뿌리면 글씨가 나타난대. 그게 바로 '화학비사법'이야.
그리고 봉투에는 제국익문사를 의미하는 도장을 찍었어.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오얏꽃 문양에 황제를 보좌한다는 의미의 '성총보좌' 네 글자가 적혀 있어. 이들은 총 61명으로 구성돼 있다고 해. 과연 어떤 인물들로 구성돼 있었을까? 그건 아무도 몰라. 제국익문사 정보원들 중 정체가 드러난 인물은 단 한 명도 없어. 황제의 비밀정보기관답지. 고종황제는 이들을 통해 국내외의 정보를 수집했어.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었던 거야.
▲ 첫번째 특사, 호법신 검사 이준
1907년 3월 24일 밤, 고종황제는 비밀리에 한 남자를 중명전으로 불러들여. 그리고는 대한제국의 운명을 건 임무를 내려. 한 달이 지난 4월 22일,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은 그 남자는 안국동 집을 나서. 그는 "몇 달간 출장을 다녀올터이니 그리 알고 계시오"라며 부인에게도 비밀로 한 채 부산으로 향하는 기차에 올라. 바로 이 사람이야.
이름은 이준, 나이는 48세. 직업은 검사였어. 사람들은 그를 '호법신', 즉 '법을 수호하는 신'이라고 불렀어. 이런 칭호를 얻게 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
"법관 양성소 1회 졸업생으로서 그 중에서 처음으로 검사시보에 임명된 사람입니다. 검사생활을 오래 하지는 않았어요. 근데 검사로서 활동하면서 상징적인 면이 있어요. 1907년도에 을사오적을 암살하려고 나인영, 오기호, 이런 사람들이 활동했습니다. 그분들이 옥에 잡혀 갇혔을 때, 고종황제가 은사에 누구를 대상으로 할 것인가를 검토했을 때, 나인영과 오기호의 이름을 적어서 올립니다."
-이양재, 서지학자/독립운동가 후손
1906년 고종황제는 황태자의 결혼을 맞아 은사령을 내려. 은사령은, 형을 선고받은 사람의 형을 면죄해주는 거야. 이준이 그 명단을 작성하기로 했어. 그는 을사오적을 처단하려다가 붙잡힌 인물들을 특별 사면대상으로 적어올려. 하지만 이준의 상관인 형사국장이 마음대로 명단을 수정해버렸어. 일제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까봐 빼버린 거야. 그러자 이준은 참지 않고, 바로 형사국장을 고소해버려. 그 결과 이준은 상관에게 항명한 죄로 태형 70대를 맞게 돼.
그래도 이준은 뜻을 굽히지 않았어. 이번에는 자신에게 유죄를 선고한 재판장과 법관들, 법부대신까지 처벌하라고 청원서를 올려.
"그러니까 법부대신 이하영을 탄핵합니다. 법을 법대로 처리를 하고 나라를 지키려 그러한 것, 그렇기 때문에 '호법신'이라는 별칭을 얻게 됩니다."
-이양재, 서지학자/독립운동가 후손
지위 고하를 따지지 않고 부패와 친일을 단죄하는 사람. 이준은 이 일로 검사 옷을 벗게 됐지만, 고종황제의 눈에 들게 돼. 이준의 강직함을 보고, 그에게 아주 중요한 임무를 맡긴 거야. 고종황제가 비밀리에 내린 칙명은 이랬어.
"황제의 특사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라! 그리하여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각국 대표들에게 알리고 대한제국의 주권을 회복하도록 하라!"
만국평화회의는 세계 평화를 도모하기 위해 열리는 국제회의야. 대한제국도 이미 초청을 받은 상황이었어. 하지만 그 뒤에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된 거야. 그래서 일본 몰래 비밀 특사를 보내기로 결심해. 이게 바로 '헤이그 특사'야.
학교 다닐 때 헤이그 특사에 대해 배웠지? 하지만 우리가 아는 헤이그 특사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해. 실제로는 아주 위험천만한 임무였어. 만약 일본이 눈치채게 되면 어떤 일이 생길지 몰라. 고종황제는 특사에게 이런 말을 전했다고 해.
"만약 내가 살해당하더라도 특사의 임무를 중단하지 말라."
고종황제도 이 일에 목숨을 걸었던 것으로 보여. 쓰러져가는 제국을 구하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어.
부산에 도착한 이준은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배에 올라.
"일본이 안다면은 큰 방해가 있을 수 도 있고 압력이 있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비밀리에 보낼 수 밖에 없었죠. 실질적으로 북행을 해서 러시아로 가면 가까운데 그렇게 하지 않고 남쪽으로 해서 부산으로 해서 삥 돌아갔습니다. 그것은 눈을 피하기 위해서 그런 겁니다."
-이양재, 서지학자/독립운동가 후손
한국땅을 떠나기 전 이준은 이런 시를 남겼다고 해.
'바람 눈 서리도 언 자리에서, 내가 죽은 뒤에 누가 장차 좋은 술 가져다가 청산에서 울어주려나.'
어쩌면 이준은, 다시는 돌아오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 두번째 특사, 조선의 엘리트 이상설
5월 9일, 이준은 무사히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그리고 거기서 또 다른 한 사람을 만나. 고종황제가 임명한 또다른 특사, 바로 이 사람이야.
이름은 이상설, 나이는 37세. 이분도 엄청난 분이야.
"제대로 공부한 사람은 이상설 선생이죠. 여기서 과거도 급제했고 또 성균관의 대사성도 했고. 대사성이면 지금 성균관 관장이에요. 성균관은 학교니까 교장 역할을 하셨던 거죠. 그러면서 그때 27살부터 강의를 하셨다는 거야. 산수를 잘 하시고 그래서 성균관에 있을 때 '산술신서'라는 책을 만들어서 성균관 유생들에게 그걸 가르쳤다는 거야. 신학문을 가르치신 거예요."
-이문원, 前독립기념관장/독립운동가 후손
이상설은 당시 대한제국에서 학식이 높기로 손꼽히던 인물이었어. 당시 이상설의 학문에 대해서 적은 기사가 있어.
'대한의 학자 중에 제일류이니 동서 학문을 거의 다 밝게 깨닫고 정밀하게 연구하므로 성리학과 문장, 그리고 정치, 법률, 산술 등의 학문이 모두 뛰어나고 풍부하다. 이분이 만약 조정의 윗자리에 앉으면 문명의 정치를 가히 이룰 수 있다 한다.'
-당시 기사 中
이상설은 조선의 마지막 과거에 급제한 분이야.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의정부 참찬까지 올랐어. 하지만 일제의 침탈로 인해 그의 인생은 바뀌게 돼.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과정을 직접 목격한 거야. 그는 비통한 심정으로 고종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다행히 아직 폐하의 비준을 받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폐하께옵선 목숨을 던질 각오로 이를 폐기하시옵소서."
신하가 황제에게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라니. 자칫 불경스럽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잖아. 그만큼 이상설은 강경한 충언을 올린 거지. 그리고 이렇게 덧붙여.
"만일 신의 말이 그르다 하옵시거든 곧 신을 베어서 오적들에 사하시고, 신의 말이 옳다 하옵시거든 곧 오적을 베어서 국민들에게 사하시옵소서."
나를 죽이거나, 아니면 을사오적을 죽여달라고. 목숨을 걸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말이야. 이와 같이 상소하지만 고종황제는 침묵했어. 그러자 그는 스스로 관복을 벗어. 그리고 본격적으로 을사늑약 파기 운동에 나서. 종로 거리에 나가 연설을 토해내던 이상설은 비통함에 바닥에 머리를 부딪혀 자결까지 시도해. 이 광경을 지켜본 사람 중에 백범 김구 선생도 있었어. 그는 그날의 광경을 백범일지에 기록했어.
"나이가 사십 안팎쯤 되어 보이는 어떤 한 사람이 흰 명주저고리에 갓, 망건도 없이 의복에 핏자국이 얼룩덜룩한 채 여러 사람의 호위를 받으며 인력거에 실려가는데 크게 소리치며 울부짖는 것이었다. 누구냐고 물으니 참찬 이상설인데 자살 미수에 그쳤다 한다. 그이도 나랏일이 날로 잘못되어 감을 보고 의분을 못 이겨 자살하려던 것이었다."
-김구의 '백범일지' 中
가까스로 살아난 이상설은 이듬해 봄 북간도 용정으로 망명을 떠나. 거기서 전재산을 털어 '서전서숙'이라는 학교를 지어. 학비는 공짜야. 반일 민족교육이 그 학교 교육의 핵심이었어. 이상설은 교육으로 독립운동을 이어나간 거야.
그러던 중, 그에게 한 통의 전보가 날라와.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이준이 보낸 전보였어. 이상설은 바로 이준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그렇게 두 특사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나게 됐어. 황제의 칙령을 공유한 두 특사는 함께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헤이그로 향해. 반드시 성공시켜야만 하는 임무, 제국의 미래를 걸고 길고 긴 여정에 나선 거야.
▲ 세번째 특사, 언어천재 외교관 이위종
이상설과 이준은 보름만에 중간 기착지인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해. 두 사람이 향한 곳은, 러시아에 있는 대한제국 공사관이었어. 그곳에서 세 번째 특사를 만나야 했거든. 바로 이 사람이야.
이름은 이위종.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야. 이 젊은이는 어떻게 특사로 임명될 수 있었을까?
"이위종은 이범진의 아들이에요. 아버지가 외교관이니까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서 미국, 프랑스, 러시아 이런 데 있으면서 외국 교육을 받았어요. 그래서 이위종은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에 능통하고 그 이외에도 뭐 한 4개 국어를 더 했다고 합니다. 현지 적응이나 현지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이위종이라는 보조자가 필요했습니다."
-이양재, 서지학자/독립운동가 후손
이위종을 한마디로 말하면 언어 천재야. 총 7개 국어를 할 줄 알았다고 해. 당시 외교에 있어서는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썼거든.
자, 이렇게 세 명의 특사가 모였어. 바람 앞 등불처럼 위태로운 조국의 운명을 되살리기 위해 막중한 책임을 짊어진 거야. 만약 성공한다면? 꺼져가는 불씨를 다시 되살릴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실패한다면? 일제의 뜻을 거스른 이들에게 돌아갈 곳은 없어. 고종에게도, 이들에게도, 마지막 기회이자 유일한 희망이야.
▲ 문전박대 당한 헤이그 특사
3인의 특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헤이그로 떠나기 전,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2세를 찾아가. 헤이그 특사들의 활동을 도와달라는 고종황제의 친서를 전하기 위해서야. 러시아는 대륙 진출을 꿈꾸는 일본과 대립하며 전쟁까지 치렀어. 고종황제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의지했던 것 같아. 하지만 러시아 황제는 특사들을 만나주지도 않았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특사들과의 대면을 피해. 왜 러시아는 이런 태도를 취한 걸까?
1905년 9월, 러일전쟁에서 패한 러시아는 일본과 조약을 체결해. 그중 이런 내용이 있었어. '한국에 대한 일본의 우월권을 승인한다'는 것. 러시아가 일본과 화해분위기로 돌아선 거야. 그래서 15일을 더 머물렀지만, 러시아 황제는 끝내 특사들을 만나주지 않아. 그사이 헤이그에서는 만국평화회의가 시작됐어.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던 특사들은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헤이그로 출발할 수 밖에 없었어. 특사들의 첫 활동은 시작부터 순탄치 못했어. 하지만 그땐 몰랐을 거야.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특사들이 헤이그에 도착한 것은 1907년 6월 25일. 이준이 안국동 집을 나선지 64일이 지난 날이었어. 두 달이 넘는 긴 여정 끝에 마침내 운명의 땅 헤이그에 도착한 거야. 만국평화회의가 개막한지는 이미 열흘이 지난 후였어. 이들은 작은 호텔을 찾아 여장을 풀어. 그리고는 가장 먼저 한 일이 있어.
특사들은 호텔 바깥에 태극기를 걸었어. 대한제국을 대표하는 공식 특사임을 알린 거야. 그리고 평화회의가 열리는 장소로 향해.
이곳의 이름은 '리더잘', 우리말로 '기사의 전당'이라는 뜻이래. 전세계 40여 개국에서 온 200명이 넘는 대표들이 모이는 곳이야. 특사들은 평화회의위원회를 찾아가 고종황제의 친서를 전달하며 일본의 불법행위를 회의 안건으로 올려달라고 요구해. 결과는 어땠을까?
"한국은 네덜란드의 초청국 명단에 없으니, 들어올 수 없습니다."
회의장의 문은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았어. 이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문전박대를 당하게 된 거야.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기 1년 전, 러시아에서 개최국 네덜란드에 보낸 초청국 명단이야. 12번째에 분명히 한국이라고 적혀 있어. 초청국 명단에 들어있었던 거야. 하지만 누구도 특사들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어.
특사들은 평화회의에 입장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평화회의 의장을 찾아가 회의장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차가웠어. "그건 내 소관이 아니니 개최국인 네덜란드 외무대신과 협의하시오"라고 해. 사실 이 러시아 출신 의장은 이미 본국으로부터 한 통의 전보를 받은 상태였어. 거기에는 '대한제국 특사들이 헤이그에 도착하여 협조를 구할 경우, 이를 거절할 것'이라 적혀 있었어. 이 사실을 몰랐던 특사들은 힘없이 돌아서야 했어. 네덜란드 외무대신을 찾아갔지만 마찬가지야.
"거기에서도 냉대를 받고 일종의 문전 냉대를 받은 거죠. 만나주려고 들지도 않았어요. 참담하죠. 분위기가 끓어오르고 있었겠죠."
-이양재, 서지학자/독립운동가 후손
이 상황에서 특사들은 포기하지 않았어.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활동의 시작이었어. 특사들은 미리 준비해온 공고사를 각국 대표들에게 전달해. 그리고 만국평화회의보라는 신문에도 실었어. 제목부터 '왜 한국을 제외하는가?'라고, 아주 직설적이야. 그리고는 일본이 저지른 불법행위를 낱낱이 밝혀.
'우리나라의 독립이 1884년 모든 강대국들에 의해 보장, 승인되었음을 주지시켜드리고자 합니다. 당시 의정부 참찬이었던 이상설은 대한제국과 각국이 맺은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무력으로 단절하고자 했던 일본의 음모를 목격했습니다. 이러한 결과를 유도하기 위해 격렬한 위협은 물론, 국가의 법률과 권리들을 침탈하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던 일본인들의 소행을 각하 제위 여러분께 알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세가지 이유를 들어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선언해. '첫째, 일본인들은 대한제국 황제 폐하의 승낙없이 행동을 취했다', '둘째,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본인들은 황실에 대하여 무장병력을 사용했다', '셋째, 일본인들은 대한제국 국가의 모든 법률과 관습을 무시한 채 행동했다'라고.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먼 타국에서 특사들이 외친 대한제국의 독립선언이었어.
각국 대표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안타깝지만 40여 개국 대표들 중 누구도 호응해주지 않았어. 사실 특사들의 임무는 처음부터 성공하기 어려운 임무였어. 일본은 이미 주요강대국들을 상대로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은 상태였거든.
일본은 미국과 가쓰라 태프트 밀약으로, 영국과는 영일동맹으로, 러시아와는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서. 각각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과 우월권을 갖기로 약속을 맺었어. 이렇게 주요 강대국들과 미리 입을 맞춘 후 을사늑약을 체결했던 거야.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해왔던 거였어. 이 상황에서 어떤 나라가 대한제국의 편을 들어줄까? 그들이 보기에 대한제국은 이미 희망이 없었어. 그런 상황에서 일본과 굳이 불편한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았던 거야. 겉으로는 세계 평화를 위한다고 했지만 약소국이 아닌, 강대국의 이해관계를 위한 평화회의였던 거야.
여기에는 일본의 물밑 외교도 있었어. 특사들이 헤이그에 도착했다는 첩보를 접수한 일본은 헤이그 현지에 이런 훈령을 내렸다고 해.
'대한제국이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서 활동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라고. 일본 역시 각국 대표들에게 특사들이 평화회의에 입장하지 못하도록 물밑 외교를 펼쳤던 거야. 이렇게 특사들의 평화회의 입장은 끝내 좌절되고 말았어.
"조선의 편을 들어주질 않았죠. 이거 완전히 최후의 심정이죠. 죽기 아니면 살기로 나서야죠. 또 책임을 져야 되잖아요. 일단은 결과가 나와야 되니까."
-이양재, 서지학자/독립운동가 후손
▲ 특사들의 호소, 세계에 알리다
특사들은 다른 방법을 택하기로 결심해. 이곳 헤이그에는 각국 대표들만 와있었던 게 아냐. 각 나라에서 온 시민운동가, 그리고 150여 명의 기자들이 있었어. 특사들은 그들을 만나기로 해.
헤이그에 도착한지 열흘 째 되는 날. 만국평화회의보에 특사들의 인터뷰 기사가 실려. 특사들의 활동을 호의적으로 바라보던 한 기자가 있었어. 그의 이름은 윌리엄 스테드. 그가 이위종과 나눈 대담이 기사로 실린 거야.
이 기사에는 특사들의 사진도 실려있어. 역사적인 사진이지. 3인의 특사가 함께 찍은 유일한 사진이야. 기사는 이위종과의 인터뷰 형식으로 쓰였어.
기자: 여기서 무엇을 하십니까? 왜 딱한 모습으로 나타나서 이 모임의 평온을 깨뜨리십니까?
이위종: 나는 헤이그에 있다고 하는 법과 정의, 그리고 평화의 신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며 먼 나라에서 왔습니다. 도대체 이곳에서 대표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겁니까?
기자: 그들은 전 세계의 평화와 정의를 보장하기 위한 조약들을 체결할 것입니다.
이위종: 여기 모인 대표들이 조약을 체결할 수 있습니까?
기자: 그들 군주로부터 권한을 부여받은 경우에는 체결할 수 있습니다.
이위종: 그렇다면 1905년 을사조약은 조약이 아니겠군요. 그것은 우리 황제 폐하의 허락을 받지 않고 대한제국 외부 대신과 체결한 협약이니까요. 대한제국 입장에서 말하자면 그 조약은 무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법적이며 아무 가치도 없는 서류로 인해 대한제국이 이번 회의에서 제외됐단 말입니다.
기자: 당신은 일본이 강대국임을 잊고 계십니다.
이위종: 대한제국이 약자이기 때문입니까? 왜 대포가 유일한 법이며, 강대국들은 어떤 이유로도 처벌될 수 없다고 솔직히 시인하지 않습니까?
이 기사의 제목은 '축제의 해골'이야. 옛날 이집트인들은 축제를 즐길 때 잔칫상 위에 해골을 올려두는 풍습이 있었대. 즐거울 때일수록 죽음에 대한 의미를 잊지 말라는 의미라고 해. 기자는 이 특사들이 각국 대표들을 불편하게 할지라도, 거짓된 평화를 일깨워주는 존재라는 걸 말하고자 한 거야. 기자는 이 인터뷰를 통해 깊이 감화됐던 것 같아. 특사들에게 뜻밖의 제안을 건네왔어.
"기자들이 모인 자리를 마련할테니 거기에서 연설을 해 줄 수 있겠습니까?"
특사들은 당연히 승낙했어. 평화회의 입장은 좌절됐지만, 일본의 무도한 행위를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야.
사흘 후 저녁 8시. 한 장소에 150여 명의 기자가 빽빽이 들어찼어. 모두가 주목하는 가운데 청년 이위종이 연단에 올랐어. 그는 유창한 프랑스어로 연설을 시작해.
"일본은 평화, 평화를 외치고 있다! 그러나 기관총 앞에서 어찌 평화로울 수 있는가? 한국의 독립과 자유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극동에 평화란 있을 수 없다!"
"항상 기억할 거는, 말을 하는 이위종 특사가 앞서고 뒤에는 이준, 이상설 특사가 항상 모든 것을 준비했을 것이다 하는 건 상식입니다. 어마어마하게 잘 했습니다."
-송창주, 네덜란드에 사는 한국인
특사들의 호소는 세계에서 모인 기자들을 감동시켰어. 기자들은 즉석에서 한국의 입장을 지지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했다고 해. 특사들의 뜨거운 외침은 다음날 '한국의 호소'라는 제목으로 보도돼. 그후 세계 각국에서 한국에 관한 기사들이 올라오기 시작해. 비록 평화회의장에서 열강들의 지지를 이끌어내지는 못했지만, 일본의 침략상을 세계 만방에 알리는 데에는 성과를 거둔 거야.
▲ 끝마치지 못한 임무
하지만 그후, 특사들에게 예기치 못한 불행이 찾아와. 이위종이 아버지의 급한 연락을 받고 잠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간 후였어. 7월 14일 저녁 7시. 홀로 호텔방에 남아있던 이준이 사망한 거야. 너무나 갑작스러운 죽음이었어. 이틀 후, 이준의 유해는 인근 공동묘지에 가매장돼. 그날 장례행렬에 참석한 사람은 이상설, 그리고 이들이 머물던 호텔주인, 그렇게 두 명 뿐이었어. 이상설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슬프다. 슬프다'라는 말만 되뇌었다고 해.
사실 이준의 사망원인은 아직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어. 기록마다 달라서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야. 당시 한국에서는 그가 자결한 것으로 알려졌어.
'이준이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이에 자결해 만국 사신들 앞에 피를 뿌려 만국을 경동케 하였다더라'
또다른 신문에서는 스스로 배를 갈라 자결했다고 보도해. 그밖에도 병으로 인한 사망설, 심장마비설, 독살설 등 갖가지 설들이 나돌았어. 하지만 분명한 것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하던 중 순국했다는 사실이야. 그래서 그의 이름 뒤에 '열사'라는 칭호가 붙게 돼.
이렇게 이준 열사의 죽음으로 특사들의 활동은 공식적으로 끝을 맺었어. 그리고 고종황제의 운명도 막다른 길에 몰리게 돼. 이토 히로부미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황제를 강제로 폐위시키고 순종을 황제로 세워. 그리고 다시 한번 용서받지 못할 만행을 저질러. 세 명의 특사들을 피고인으로 궐석재판을 연 거야. 궐석재판은 당사자 한 쪽이 출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재판이야.
"피고인 이상설에게 사형, 이준과 이위종에게 종신형을 선고한다!"
이준 열사가 사망한 사실을 몰랐을까? 아니. 알고 있었어. 그럼에도 죽은 사람까지 재판에 세워 종신형을 선고한 거야. 일본은 끝까지 특사들에게 굴욕을 주려고 했던 거 같아.
이제 일본은 거침이 없어. 정미7조약을 체결하며 대한제국의 내정권까지 빼앗아. 언론을 탄압하기 위해 신문지법을 만들고, 보안법을 만들어서 집회 결사를 금지시켜. 그리고는 7천 명 밖에 남지 않은 군대마저 해산시켜. 이 모든 게 고종황제가 물러난 후 십여 일 만에 일어난 일이야. 그렇게 대한제국은 그 이름만 남겨둔 채 일제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고 말아.
그럼, 헤이그에 남아있던 이상설과 이위종은 어떻게 됐을까? 두 사람은 주저앉지 않았어. 세계 열강들을 찾아가 마치지 못한 임무를 끝내고자 노력했어. 그 노력중 하나로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미국 워싱턴으로 향해. 일찍이 미국과는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었거든. 어느 한 나라가 침략받을 경우, 서로 돕기로 한 약속이야. 루즈벨트에게 고종황제의 친서를 전달하고 약속을 지킬 것을 촉구할 생각이였어. 하지만 루즈벨트는 면담을 거절했어.
이상설과 이위종은 다시 헤이그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어. 아직 이준 열사의 유해를 제대로 모시지 못했거든.
"원래 모시고 가려고 했어요. 로테르담 항구에 알아봤어요. 상해 거쳐서 월미도 가는 배가 있어요. 그런데 안됩니다. 왜? 서류를 누가 해줘요? 외교권을 박탈해 간 일본 영사가 해줘야 되는데 해줄 리가 없죠."
-송창주, 네덜란드에 사는 한국인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은 헤이그 교외의 공동묘지에 이준 열사의 유해를 안장해. 함께 했던 동지의 시신마저 고향땅에 묻어주지 못하는 심정, 어땠을까?
이상설과 이위종 역시 같은 신세야. 이미 사형과 종신형을 선고받은 몸이잖아. 그들도 조국에 돌아갈 수 없었어. 장례 후 두 사람은 헤어져서 각자의 길을 걷기로 해. 서로 다른 길로 향했지만, 목적지는 같아. 바로 대한제국의 독립. 그후 특사들의 삶은 어땠을까?
▲ 돌아갈 수 없는 고국
이위종은 항일 의병운동에 뛰어들었다고 해. 의병대장 이범윤, 안중근 의사가 속했던 '동의회'라는 항일의병조직이 있거든. 동의회 회장이 바로 이위종이야. 연해주에서 의병활동을 주도하던 그는 러시아 군사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러시아군 장교가 됐다고 전해져. 하지만 1920년 이후 그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고 해. 아마도 어느 전쟁터에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돼.
이상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그의 흔적은 뜻밖의 인물에게서 들을 수 있었어.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세 발의 총성이 울려퍼져. 안중근 의사가 쏜 총탄에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진 거야. 감옥에 갇힌 안중근 의사를 취조하던 일본 경찰은 뜬금없이 "그대는 이상설이란 인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라는 질문을 던져. 안중근 의사는 바로 이렇게 답했다고 해.
"그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다. 이범윤 같은 의병장 1만이 모여도, 이 한 분에 미치지 못한다."
만 명의 의병대장보다 이상설 한 사람이 더 뛰어나다는 얘기야. 안중근 의사도 이상설을 존경했어.
일제는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을 구실삼아 한일병합을 서둘렀어. 1910년, 결국 일본은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탄하게 돼. 그렇게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어.
이상설은 헤이그를 떠난 이후 단 한순간도 독립의 의지를 꺾지 않았어. 그는 국내외 모든 의병을 통합한 단일의병부대, 13도의군을 만들었어. 그리고 최초의 해외정부인 대한광복군 정부를 수립한 이상설은 정통령 자리에 오르게 돼. 대통령 같은 존재인 거지. 하지만 오랫동안 타지를 떠돌며 제 몸을 돌보지 않았던 탓일까? 병을 얻은 이상설은 1917년 러시아 우수리스크에서 사망하고 말아. 그는 죽기 전 이런 유언을 남겼어.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
나라를 빼앗긴 죄 많은 몸이니 어찌 죽어서 흙에 묻힐 수 있겠냐며, 시신과 남은 흔적들 모두 불태우라는 말을 남겼다고 해. 그리고 또 하나의 유언이 있었어.
"아버지를 통해서 들은 얘기죠. '내가 독립을 못 보고 죽으니 이거는 다 없애라' 그래서 '내가 써놓은 책은 태워라' 하는데, 우리 아버지가 그 태우는 임무를 맡으신 거예요. 그래서 태우다가 이제 쭉 태우면서 유언을 하시는 거예요. '자네 아우 있는가' 그러니까 '지금 몇 살짜리 아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 둘째 딸하고 결혼시키게'. 그래서 그 양반이 우리 작은 어머니가 되셨어요. 이상설 선생 둘째 따님이 작은 어머니가 되신 거죠."
-이문원, 前독립기념관장/독립운동가 후손
이상설 선생이 관직을 버리고 용정으로 망명했을 때 아내의 뱃속에 둘째 딸이 있었다고 해. 독립운동으로 세계 각지를 다니는 사이 둘째 딸 가희는 어느새 열두 살이 돼 버렸어. 돌아가시기 직전 어린 둘째 딸이 마음에 걸리셨나봐. 그래서 혼사를 주선하셨던 것 같아. 자신의 몸과 유품은 하나도 남기지 말라고 했지만, 어린 딸 걱정만큼은 지울 수 없으셨던 거지.
그렇게 두 독립운동가의 집안이 사돈으로 맺어졌어. 그리고 '꼬꼬무'가 이상설 선생의 둘째 딸, 이가희 여사님의 따님을 만나봤어.
"이상설 선생님의 직계후손으로 외손녀 이현원입니다. 이모가 한 분 계셨고 외삼촌 한 분이 있었고, 그 다음에 엄마인데 엄마가 이상설 선생님의 막내딸이었습니다. 외할아버지하고는 산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외국에서 계속 계셨기 때문에... 어머님이 얘기해주셔서 알고 있어요. 그런 사진만 봤어요. 그때 당시에는 다 한복 입었었잖아요. 근데 양복 입으시고 저런 것이 참 멋있게 보였어요."
-이현원(93세), 이상설의 외손녀
이상설 선생의 외손녀 이현원 여사는 현재 살아계신 유일한 직계후손이라고 해. 그리고 이현원 여사는 한국전쟁 당시 간호장교로 전선에 나섰대.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마라 하셨지만,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그 마음만은 후손들에게 계속 이어진 게 아닐까.
그렇게 이상설 선생은 춥디추운 먼 타국에서 숨을 거두셨어. 함께 있던 일행들은 이상설 선생의 유언을 따랐어. 우수리스크 수이푼 강가에 장작을 쌓아두고 이상설 선생의 시신을 화장했어. 그리고 뼛가루를 수이푼 강에 뿌렸다고 해.
"제가 블라디보스토크에 갔을 때 그 강을 보니까 눈물이 저절로 나오더라고요. 수이푼 강이라고 그러는데 거기 사람들은, 한국인들은 '슬픈 강'이라, 그렇게 불렀다고 하더라고."
-이현원(93세), 이상설의 외손녀
수이푼 강은 흘러 흘러 동해로 이어져. 묘소 하나 남기지 않고 떠나셨지만 넋이나마 조국으로 돌아가시기를 바랐던 게 아닐까?
이렇게 3인의 특사 모두 세상을 떠났어. 한 사람은 멀리 타국에 묻혔고, 또 한 사람은 언제 어디서 돌아가셨는지조차 알 수 없어.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은 무덤조차 남기지 않았어. 분명한 것은 세 분의 특사 모두 조국땅을 다시 밟지 못했다는 거야.
헤이그 특사는 일제강점기 동안 지워진 역사였어. 하지만 광복을 맞이한 후, 돌아오지 못했던 한 특사가 다시 조국땅을 밟게 돼.
"드디어 9월 30일 이준 열사의 넋은 그리운 고국의 땅을 밟았습니다. 10월 4일 서울운동장에서는 온겨레의 추모를 받으면서 유해 봉환 국민장 의식이 엄숙히 거행됐습니다.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서 낯설은 이국땅에 한민족의 자주성을 세계만방에 호소한 거룩한 선생의 위업을 흠모하는 빛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제 다같이 머리 숙여 열사의 거룩한 뜻을 되새기며 삼가 열사의 영전에 명복을 비는 바입니다".
-이준 열사 유해환국 뉴스 中
너무 오래 걸렸지? 네덜란드 헤이그에 묻힌 지 56년 만에 이준 열사의 유해가 한국에 돌아왔어.
▲ 부부가 인수한 건물의 정체
그리고 헤이그에 또 하나 새로 생긴 게 있어. 맨 처음에 이야기했던 건물 기억나? 이기항 씨 부부가 사재를 털어 인수했던 그 건물. 부부가 인수한 건물은, 헤이그에 도착한 세 특사가 묵었던 호텔건물이야.
왼쪽은 특사들이 묵었던 '드 용 호텔'의 당시 사진이야. 오른쪽은 지금의 모습이야. 이 건물에는 새로운 이름이 붙여졌어. '이준 열사 기념관'. 30년 전 재개발로 매각될 위기에 처했지만 기항 씨 부부가 인수한 후 이준 열사 기념관으로 만들었어.
"이 집이 옛날 작은 호텔인데, 헤이그 특사 이준 이상설 이위종 세 분이 만국평화회의에 오셔 가지고 이 집, 그 당시 드 용 호텔에 머물면서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이 집에서 돌아가셨다. 순국 현장이에요. 아주 쇼크죠. 이걸 그냥 방치할 수가 없지 않냐."
-이기항, 헤이그 이준열사기념관 원장
"(직접 관리하고 운영하는 거) 힘들죠. 안 힘든 거 하나도 없어요 저희는. 글쎄, 그런데 힘든 거를 힘들어서 '내가 못 해!' 하는 그런 심정은 아니라고 말씀드릴 수 있죠. 그러니까 저희가 지금 29년째인데, 그냥 매일 해요."
-송창주, 헤이그 이준열사기념관 원장
1995년 기념관을 개관한 뒤로 부부의 일과는 똑같아. 매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암스테르담에서 매일 아침 기차를 타고 와서 기념관을 열어. 그리고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있어. 건물 앞에 태극기를 내거는 일이야. 117년 전 이곳을 방문한 특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루 종일 방문객을 맞이하고 저녁이 되면 다시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가. 이 똑 같은 일과를 반복한지 29년째. 어느새 부부는 아흔 살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어. 언제까지 기념관을 지키실 건지 물어보는 사람이 많아졌대. 그때마다 부부는 이렇게 대답한다고 해.
"건강이 허락하는 때까지."
-송창주, 헤이그 이준열사기념관 원장
"나라를 위해서, 역사를 위해서, 우리 후대를 위해서 이런 일을 하다가 갔다라고 하는 게, 우리로서는 가장 큰 보람입니다."
-이기항, 헤이그 이준열사기념관 원장
부부가 아니었다면 이 건물은 사라졌을 거야. 비록 가슴 아픈 역사지만, 늘 기억하고 후대에 제대로 전해주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결과적으로 특사들은 임무에 성공하지 못 했어. 만국평화회의에서 세계열강의 지지를 이끌어내서 을사늑약을 무효로 하고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던 목표는 이루지 못했어. 그러면, 헤이그 특사들은 실패한 걸까?
특사들은 대한제국이 처한 상황을 세계 만방에 알리고 지지를 이끌어 냈어. 이들의 외침은 우리 민족에게도 이어졌어. 우리 민족은 한날한시도 저항을 멈춘 적이 없었거든. 그렇게 특사들의 정신이 독립운동의 밑거름이 된 것이 아닐까.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대한민국은 눈부신 발전을 이뤘어. 만약 세 분의 특사가 지금의 대한민국을 본다면 뭐라고 하실까.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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