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러시아·우크라이나전 종전 중재에 나서면서 전쟁의 여파로 러시아 시장에서 철수했던 현대자동차의 사업 재개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문제는 지난 2년 사이 현지 시장이 크게 달라졌다는 점이다. 러시아 정부는 '바이백 옵션'을 부정하고 시장은 중국차가 점유했다. 이에 현대차는 복귀를 놓고 고심하는 분위기다.
21일 자동차 업계에 따르면 현대차는 2023년 12월 러시아 업체인 아트파이낸스에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의 러시아 지분 100%를 1만루블(당시 14만원 상당)을 받고 매각했다. 전쟁 및 대러시아 제재로 정상적인 사업을 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다만 2년 내 공장을 되살 수 있는 바이백 조건을 걸었다. 시장에서는 전쟁이 종식되면 시장에 재진출하겠다는 현대차의 의사가 반영된 것으로 해석했다.

현대차 재고·중국 기술로 '저원가 생산' 드라이브
우선 매입 주체인 아트파이낸스가 전쟁 이후 자국 자동차 산업 육성으로 간주되는 행보를 보이는 점이 눈에 띈다. 2022년 폭스바겐 칼루가 공장을 인수했고 2023년 말에는 현대차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 2곳을 사들였다.
인수 이후에는 자회사 AGR을 통해 완성차 생산을 준비했다. 현대차 러시아법인 총괄 출신인 알렉세이 칼리체프를 최고경영자(CEO)로 선임하며 인적 준비에 들어갔다. 그는 2010년부터 현대차 CIS권역본부와 러시아법인 이사 등을 지낸 인물이다.
이후 AGR은 자체 브랜드 솔라리스를 론칭해 양산을 시작했다. 옛 현대차 생산기지에 남은 자동차 부품을 사용했고 자동차 강판 공급망으로는 현대제철 러시아 공장을 활용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에서는 4종의 차량이 생산되고 있다. HS(세단·솔라리스), KRS(세단·리오), KRX(크로스해치백·리오X), HC(소형SUV·크레타) 등이며 차명의 H, K는 각각 현대차, 기아를 뜻한다. 뒤에 붙은 이니셜은 과거 판매됐던 해당 차종의 약칭을 따랐다.
표면적인 정상화 속도는 상당히 빠르다. AGR그룹은 기존 현대차 공장을 가동한 지 1년 만에 매출 294억루블(약 5130억원), 순이익 19억루블(332억원) 등의 실적을 냈다. 현대차가 남긴 재고 부품을 활용한 덕분에 제조원가 부담이 크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생산도 늘고 있다. 지난해 2만대 이상을 만들었고 올해 3월 말에는 누적 생산량 3만대를 돌파했다. 올해 목표는 일 200대 이상으로 잡았다. 생산관리는 중국 자동차 제조사들의 손을 빌리고 부족한 부품 공급망은 중국 제조사들의 여력을 활용할 계획이다.

현대차-러시아 정부-AGR, 각기 다른 바이백 셈법
가장 큰 변수는 러시아의 태도다. 러시아 하원 법제사법위원회는 올 7월 '외국 소유주 바이백 옵션 행사 제한 법안'을 승인했다. 총 8개 제한 요건을 충족해야 바이백 옵션을 행사할 수 있도록 법을 바꾼 것이다.
현대차에 불리한 조항은 2항과 4항이다. 각각 △매각 시점이 2022년 2월22일부터 같은 해 12월31일 사이일 것 △재매입 옵션의 유효기간이 10년 이상이고 계약 체결일로부터 3년 이상 경과했을 것 등의 내용이 담겨 현대차의 매각 체결 시점(2023년 12월), 바이백 옵션 기간(2년)과 차이가 있다.
또 현대차와 아트파이낸스의 바이백 셈법이 다를 수 있다. 현대차가 기존 조건 이행을 주장할 권리를 가진 상황에서 매수자 측은 현대차 계열 차량의 생산과 보수·정비·인력관리를 이어온 점을 들어 옵션 행사 금액을 과도하게 청구할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 제조사들이 러시아 시장을 침식했다는 것도 부담 요인이다. AGR측이 과도한 바이백 금액을 산정할 경우 중국 브랜드들과 가격경쟁을 벌이며 수익을 내야 하는 상황이 된다.
실제로 서방 자동차 브랜드가 빠진 자리는 현지 제조사와 중국차가 메웠다. 지난해 시장점유율을 보면 러시아 제조사 라다가 28%로 1위를 기록했고 △하발 △체리 △지리 △창안 △오모다 △엑시드 △제투어 △벨지 △탱크 등 중국 관련 브랜드 9개가 10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이항구 한국자동차연구원 전문위원은 러시아 재진입에 대한 현대차의 고민이 가볍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그는 "러시아는 그 자체로도 큰 시장이고 인근 국가(CIS)를 공략할 수 있는 거점"이라면서도 "러시아에 재진입해도 중국 제조사들이 확보한 점유율을 얼마나 가져올 수 있을지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어 "유럽과 동남아시아의 최근 시장들을 분석해보면 중국차가 자리 잡기 시작한 지역에서는 한국, 일본 제조사들이 확연히 밀리는 모습을 보인다"며 "원가경쟁력에서 당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김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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