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X이 되려느냐” 장훈 어머니의 일갈
처음 본 어머니의 화난 얼굴
대망의 고시엔 출전이 이뤄졌다. 하지만 (본선) 1회전에서 탈락이다. 낙심한 그에게 어느 날 연락이 왔다. ‘한국에서 열리는 친선 경기에 출전할 수 있겠냐’라는 의사 타진이다. 재일동포 (고교생) 선발팀 명단에 들어간 것이다.
솔깃하다. 사실 ‘동포’의 의미도 잘 모를 때다. 그냥 야구라니 좋았다. 어머니께도 말씀드렸다. 그런데 한사코 손사래 친다. “안된다. 지금 (한국에) 가면 군대에 끌려갈지도 모른다.” 극구 말린다. 어찌어찌, 간신히 설득했다.
김포 공항에 처음 내렸을 때다. 마중 나온 생면부지의 한국 임원이 일본 쪽 인솔자와 부둥켜안고 엉엉 눈물을 흘린다. 그걸 보고 있자니 왠지 가슴이 뜨거워진다. ‘이건 뭐지?’ 난생처음 느끼는 감정이다. ‘동포’, ‘민족’…. 그런 단어들이 머릿속에 강렬하게 새겨진다.
야구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한국 팀과 15게임을 했는데, 무승부 1번을 빼고는 모두 원정 팀의 완승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하루 휴식일이 있었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갔다. 거기서 또 차를 갈아탄다. 경남 창녕에 사는 조부모를 만나기 위해서다.
90이 넘어 처음 만난 손자다. 눈가는 벌써 그렁그렁하다. 안고, 쓰다듬고, 잡은 손을 놓지 못한다. 그렇게 꼬박 밤을 새웠다. 말은 잘 통하지 않는다. 서툰 한국어와 일본어를 섞어가며 새벽을 맞았다. ‘이게 핏줄이구나.’ 뭉클했다.
사실 10대 시절에는 잘 몰랐다. 덩치도 크고, 성격도 괄괄하다. 감히 괴롭히는 친구는 없었다. 간혹 학교에서 (다른 아이를) ‘조센징’이라고 놀리는 소리를 들었다. 집에 가서 그 얘기를 했다. “조센징이 뭐야? 변변치 못한 사람인가?”
그랬더니 어머니가 정색을 한다. “거기 똑바로 앉거라.” 처음 본 화난 모습이다. 그리고는 이렇게 가르친다. “조선 사람은 이 나라 사람보다 우수하다. 옛날에는 일본이 조선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절대 뒤질 게 없다. 가슴을 펴고 살아라.”
고국 방문 때 얻은 자부심
훗날 장훈(84) 씨는 이렇게 기억한다. “첫 고국 방문에서 어머니 말씀의 진짜 의미를 깨달았다. (한국) 정권이 바뀌면서 (한일 관계, 재일동포에 대한 정책 등이) 달라지기도 하겠지만, 긍지와 자신감을 갖고 산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몇 달 후다. 고교(오사카 나니와상고) 졸업을 앞둔 시점(1958년)이다. 프로 3~4개 팀이 서로 데려가려고 한다. 그중 도에이 플라이어즈(현 니폰햄 화이터즈)가 가장 적극적이다.
계약금 200만 엔(약 1870만 원), 월급 4만 5000엔(약 42만 원)에 입단 계약을 맺었다. 대졸 초봉이 평균 1만 2000엔(약 11만 원) 정도였던 시절이다.
1만 엔 지폐가 없던 시절이다. 계약금 200만 엔은 1000엔짜리 2000장으로 지급됐다. 100장 묶음으로 20개나 된다. 그걸 보자기에 싸서 들고 간다. 도쿄에서 히로시마까지 8시간 거리다. 가는 내내 기차 안에서 한숨도 못 잔다. 형(장세열, 8살 위)과 번갈아 품에 안고, 불안에 떨어야 했다.
어머니는 ‘거액’을 보고 깜짝 놀란다. “또 무슨 나쁜 짓을 했구나”라며 겁부터 낸다. 아니다. 야구해서 받은 돈이다. 그랬더니 비로소 안심하는 눈치다. 그리고 선친을 모신 위패에 보따리를 올려놓고 두 손을 모은다.
일단 100만 엔으로 땅을 사서 집을 지었다. 지금 보면 평범한 2층 건물이다. 하지만 그때는 으리으리한 저택으로 보였다. 2층에는 작은 아들의 방도 마련됐다. 히로시마 원정 때면 그곳에서 머물곤 했다.
장훈 때문에 변경된 외국인 규약
프로 첫 시즌(1959년)이다. 개막을 앞두고 뜻밖의 호출을 받는다. 구단주가 부른다는 소식이다.
“이봐, 자네 아버지가 안 계시다고?” 오카와 히로시 대표가 일찍 타계한 선친에 대해 묻는다. 자서전에 따르면 장훈의 5살 때다. 아버지는 잠시 고국을 방문했다가 불의의 사고를 당한다. 생선 뼈가 목에 걸리는 바람에 생을 달리했다.
“그래서 어머니 혼자 자녀 셋을 어렵게 키우셨다고….” 구단주는 꽤 소상하게 알고 있다. “그럼 자네가 내 양자로 입적하면 어떻겠나.”
갑자기? 양아들로? 아무리 재능이 특출하다고 해도 그렇다. 너무 파격적인 제안이다. 잠시 후 저간의 사정을 듣게 된다. 외국인 선수 제한 때문이다.
당시 규약은 팀당 3명까지 보유할 수 있다. 이 중 엔트리(현역 명단)에는 2명만 가능하다. 즉 게임에 뛸 수 있는 것은 2명뿐이라는 뜻이다. 도에이는 이미 한도가 찼다. 외야수 잭 래드라, 1루수 스탠리 하시모토(일본계 미국인)가 버티고 있었다.
그러니까 양자 입적은 곧 ‘귀화’를 의미한다. 일본 국적을 얻으면 외국인 선수 제한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민할 게 뭐 있겠나. 선수 생활이 걸린 문제다. 당연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답을 내놔야 한다. 그런데 19살 청년은 머뭇거린다. “어머니께 여쭤봐야 한다”라며 뜸을 들인다.
히로시마로 갔다. 어렵게 얘기를 꺼낸다. “사실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다. 어머니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이런 못된…. 네가 지금 야구를 하겠다는 거냐, 일본 X이 되겠다는 거냐. 이러라고 네게 야구를 시킨 줄 아느냐. 당장 때려치우고 히로시마로 돌아오너라.” 설득은 턱도 없다. 그렇게 무섭게 화내는 어머니는 처음 봤다. 아들의 또렷한 기억으로 남았다.
도쿄로 돌아갔다. 구단주에게 저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그랬더니 의외로 호쾌한 반응이다. “역시 한국 여성은 강하군. 대단해.”
오카와 대표는 플랜 B를 가동한다. 비슷한 고민의 팀들이 또 있었다. 이들과 연합 전선을 편다. 구단주 회의에 의제로 올리고, 규약 변경을 주장한다. 난상 토론 끝에 관련 제도가 개정된다. ‘1945년 이전에 일본에서 태어난 사람은 외국인 룰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조항이 이때부터 생겼다.
돌연한 귀화
며칠 전이다. 그의 코멘트 하나가 전해졌다. “이건 처음 하는 얘기다. 몇 년 전에 국적을 바꿨다. 지금은 일본 국적이다.” 늘 한국인임을 숨기지 않던 그였다. 그래서 더 충격적이었다.
이유는 이렇다. “한때 (한국의) 한 정권이 재일(한국인)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인 적이 있다. 자기가 원해서 간 사람들이라든지, 다른 나라에 가서 잘 살고 있다든지 하는 식으로 (치부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아마 그 무렵 한국 정부의 재일동포에 대한 태도가 못 마땅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우리 야구계에 대한 불편한 속내도 털어놓는다.
“몇 년 전에는 한국 야구에 대한 공적으로 상을 주겠다고 찾아왔는데, 거절했다. 20년 넘게 (KBO 총재) 특별보좌역을 하면서 프로 리그를 만들었지만, 한국시리즈나 올스타전 같은 행사에 초청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 나라의 나쁜 점이다. 은혜도, 의리도 잊어버린다.”
사실 논평이 쉽지 않은 문제다. 단순히 국적 변경 자체를 뭐라고 하기는 어렵다. 현실적이고, 개인적인 문제일 수 있다. 책임을 면하거나, 기피하려는 수단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존재할지 모른다. 실제로 법적인 신분과 관계없이 올곧은 정체성을 갖고 활동하는 사람도 많다.
특히 그의 경우는 그렇다. 험한 차별을 이겨내면서 오랜 시간을 지켜주지 않았나. 정치적인 상황에 대한 비판, 한국 야구계를 향한 쓴소리. 거기까지는 각자의 견해이고, 주장이다.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동의할 수 없는 역사 인식
다만 결정적으로 실망스러운 한 가지가 있다. 산케이신문과 인터뷰에서 드러난 역사 인식이다.
“한반도는 일본에 지배됐다. (여기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한국에도 도움이 됐다. 전기불이 켜졌을 때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큰 도로와 학교도 만들어줬다. 한일이 협력하면서 한국은 엄청나게 발전해 근대국가가 됐다.”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생각이다. 어떤 해명과 설명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주장이다.
일찍이 그는 이렇게 말했다. “국적은 종이 한 장으로 바꿀 수 있지만, 민족은 바꿀 수 없다. 그 민족으로서 죽을 때까지 (국적을) 바꾸는 건 남자가 아니라고,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2008년 8월에 방송된 KBS 휴먼 다큐 ‘사미인곡’ 중의 한 대목이다. ‘일본의 야구 영웅, 재일동포 장훈’이라는 부제였다.
이 장면의 배경은 히로시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지금은 인동 장 씨의 가족 묘지가 자리했다. 어머니 고 박순분 여사가 잠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일찍 남편을 잃고, 원폭 피해로 맏딸을 먼저 보내야 했다. 말이 안 통해서, 글을 몰라서, 돈이 없어서. 의사도, 약국도 가보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러야 했다. 그렇게 홀로 3남매를 키워야 했다.
식당 일로 하루하루 생계를 이어갔다. 무시와 천대를 견뎌야 했다. 그러면서도 아들과 딸에게는 역사와 민족을 잊지 않도록 했다. 누구보다 엄하게 꾸짖었다. 그런 가르침은 여전히 모두의 마음속에 깊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