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가은이 돌아왔다. 그것도 아주 시원하게. 30분 만에 끝난 2-0 완승, 거기에 경기 내용까지 완벽했다. 프랑스오픈 첫 경기에서 보여준 김가은의 모습은 지난 몇 달 동안의 답답함을 한 번에 털어내는 듯했다. 이제 그녀는 다시 일본의 니다이라 나츠키를 마주한다. 2년 전 같은 대회에서 2-0으로 제압했던 바로 그 상대다. 공교롭게도 이번에도 프랑스 세숑세비녜, 그리고 16강 무대다. 김가은이 그 기분 좋은 기억을 되살릴 수 있을까.

22일 열린 프랑스오픈 여자 단식 32강전에서 김가은(세계랭킹 19위·삼성생명)은 캐나다의 장웬유(44위)를 상대로 단 30분 만에 2-0(21-8, 21-14) 완승을 거뒀다. 초반에는 잠시 끌려갔지만, 3-4에서 연속 득점을 시작으로 경기 주도권을 단숨에 가져왔다. 리듬이 타기 시작하자, 특유의 빠른 풋워크와 넓은 리치(팔 길이)가 제대로 빛을 발했다. 상대의 높은 클리어를 기다렸다는 듯이 내려찍는 공격이 연달아 터졌고, 수비에서도 네트 앞 드롭을 침착하게 받아내며 장웬유를 흔들었다. 1세트는 말 그대로 ‘김가은의 쇼타임’이었다. 21-8, 압도적인 스코어였다.
2세트에서는 조금 더 끈끈한 싸움이 이어졌다. 초반 1-4로 뒤졌지만, 김가은은 연속 득점으로 흐름을 바꿨다. 9-9 상황에서 3점을 내주며 위기가 찾아왔지만, 그 뒤 곧바로 5연속 득점으로 14-12를 만들며 역전. 그때부터는 단 한 번도 리드를 내주지 않았다. 결국 21-14로 경기를 마무리하며 30분 만에 경기를 끝냈다. 최근 몇 달 사이 가장 완벽한 경기 운영이었다.

사실 김가은의 2025 시즌 초반은 순탄하지 않았다. 안세영과 함께 한국 여자 단식을 이끌고 있지만, 올여름까지만 해도 이렇다 할 결과가 없었다. 출전한 대회 대부분이 16강에서 멈췄고, 간신히 8강에 오른 아시아선수권이 그나마의 위안이었다. 하지만 지난 9월 중국 마스터스에서 반전이 일어났다. 가오팡제, 미야자키 토모카, 왕즈이 등 쟁쟁한 선수들을 잇따라 꺾고 4강까지 올라갔다. 비록 한웨에게 아쉽게 패하며 결승 진출은 놓쳤지만, 경기 내용은 좋았다. 이후 코리아오픈에서도 8강에 오르며 상승세를 이어갔고, 덴마크오픈에서도 풀세트 접전 끝에 16강까지 올랐다. 꾸준히 경기를 치르며 경기 감각이 확실히 돌아온 모습이다.
이번 프랑스오픈은 김가은에게 중요한 분기점이다. 바로 다음 상대가 일본의 니다이라 나츠키이기 때문이다. 김가은에게는 익숙한 이름이다. 2년 전 이 대회 32강에서 맞붙어 2-0(21-13, 21-15)으로 완승을 거둔 적이 있다. 당시에도 김가은은 비슷하게 초반부터 리드를 잡고 흐름을 뺏기지 않았다. 그 기억이 이번 경기에서 큰 힘이 될 수 있다. 게다가 니다이라는 이번 대회 32강에서 랏차녹 인타논(세계 9위·태국)을 풀세트 끝에 꺾고 올라왔다. 21-17, 14-21, 21-18. 체력 소모가 컸다. 반면 김가은은 30분 만에 끝냈으니 체력 면에서는 확실히 우위다.

니다이라는 최근 덴마크오픈 16강에서 안세영에게 0-2로 완패했다. 1세트에서는 그럭저럭 버텼지만, 2세트에서는 체력이 완전히 떨어졌다. 빠른 템포에서 밀리면 뒷심이 부족하다는 게 약점으로 꼽힌다. 김가은 입장에서는 이 부분을 파고드는 게 핵심이다. 2년 전 경기에서도 김가은은 니다이라의 체력 한계를 정확히 짚어내 후반부에서 점수를 몰아냈다. 당시에도 1세트 중반부터 빠른 랠리를 통해 상대의 숨을 빼놓은 뒤, 2세트에서 완전히 흐름을 장악했다.
김가은의 장점은 명확하다. 키 172cm의 장신이지만 움직임이 가볍고, 리치가 길어서 코트 커버 범위가 넓다. 공격에서도 스매시보다는 각을 이용한 컨트롤형 플레이에 강점이 있다. 결정적인 순간에 서두르지 않고, 상대 실수를 유도하는 침착함도 있다. 이런 플레이 스타일은 니다이라처럼 빠르게 점수를 내는 선수보다 후반 집중력이 중요한 매치업에서 효과적이다. 무엇보다 최근 들어 김가은이 눈에 띄게 달라진 건 ‘멘탈’이다. 과거에는 초반 실수가 이어지면 흔들리는 모습이 있었지만, 올해 중국 마스터스 이후부터는 위기 상황에서도 흐름을 길게 가져가는 노련함이 생겼다.

만약 이번 프랑스오픈 16강을 넘어 8강에 오르면, 김가은은 세계 2위 왕즈이(중국)와 마주칠 가능성이 높다. 이는 그녀에게 또 한 번의 시험대다. 9월 중국 마스터스 8강에서 왕즈이를 꺾었던 경험이 있기에, 자신감은 분명 있을 것이다. 왕즈이는 현재 세계랭킹 2위로, 안세영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 중 한 명이다. 김가은이 또 한 번 이변을 일으킨다면, 한국 여자단식의 전력 폭은 훨씬 넓어질 것이다.
김가은은 이번 시즌을 통해 ‘중간 세대’의 대표로 자리 잡는 중이다. 안세영이 압도적인 1인자라면, 김가은은 그 뒤를 받치는 실질적인 2선 리더다. 특히 국제대회 경험이 쌓이면서 경기 운영이 훨씬 안정됐다. 예전엔 공격 일변도였다면, 이제는 수비와 리턴에서도 여유가 생겼다. 코트 위에서 표정도 달라졌다. 예전엔 위기 때 고개를 숙였지만, 요즘은 오히려 웃는다. 경기 흐름을 즐길 줄 아는 선수가 됐다.

지금 김가은의 모습은 단순히 “좋은 경기력” 그 이상이다. 지난 몇 년간 쌓인 시행착오, 부진, 그리고 자신감의 회복이 모두 녹아 있다. 단 30분 만에 끝낸 완승이 보여준 건 체력이나 기술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었다. 김가은은 이제야 진짜 자신의 리듬을 찾았다.
이번 프랑스오픈은 김가은에게 새로운 출발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예전처럼 “안세영 뒤를 잇는 선수”가 아니라, 이제는 “김가은이 만들어가는 길”을 보여줄 때다. 그 길의 첫 장면이 바로 니다이라와의 16강전이 될 것이다. 2년 전처럼 다시 웃을 수 있을까. 김가은의 표정이 말해준다. 준비는 끝났다고.
Copyright © 구독과 좋아요는 콘텐츠 제작에 큰 힘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