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석유화학산업이 장기 불황의 여파로 수익성 악화와 부채 부담 심화라는 이중고에 직면하고 있다. 영업손실 누적과 현금창출력 저하로 채무상환능력이 약화되는 가운데 업계 전반에서 자산 매각과 설비 통합 등 구조조정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7일 나이스신용평가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2분기 기준 주요 석유화학사 합산 영업이익률은 -3.0%로 집계됐다. 2023년 말 이후 적자 국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납사 가격 하락에도 불구하고 에틸렌 등 기초유분 스프레드 회복이 제한적인 수준에 머무르면서 수익성은 직전 분기 대비 오히려 악화됐다.
보고서는 2025∼2027년 사이 중국을 중심으로 에틸렌 약 3000만톤, 프로필렌 약 2200만톤 규모의 신규 설비 증설이 예정된 만큼 공급과잉 구조가 중단기적으로 지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또 미국의 대중국 고율 관세 정책이 이어질 경우 중국의 수출 경기가 위축돼 국내 석유화학 기업들의 대(對) 중국 수출환경도 악화될 수 있다고도 지적했다.
실제로 석유화학사들은 재무 부담을 완화하기 위한 자산 매각을 추진 중이다. 2024년 이후 LG화학, 롯데케미칼, SK지오센트릭, 한화솔루션, SKC, 효성화학 등이 잇따라 매각 작업을 단행하며 대규모 유동성 확보에 나섰다.
LG화학은 올해 6월 워터솔루션 사업을 1조4000억원에 매각했다. 롯데케미칼은 지난해 10월 미국 루이지애나 자회사 지분 40%를 주가수익스왑(PRS) 방식으로 6627억원에 매각한 데 이어 올해 파키스탄 법인(979억원)과 LCI 지분 25%(PRS·6500억원)를 정리했다. SK지오센트릭도 지난해 11월 미국 퓨어사이클 지분을 약 1400억원 규모에 매각했다.
한화솔루션은 자회사 한화저축은행을 한화생명에 넘기며 1785억원을 확보했고 울산 무거동 사옥 부지를 에이치헤리티지에 1602억원에 매각했다. SKC는 SK넥실리스 FCCL 박막사업(950억원)과 SK엔펄스 CMP 패드사업(3410억원)을 잇따라 처분한 데 이어 올해 6∼7월 자사주 교환사채(EB)를 발행해 2600억원을 조달했다. 효성화학은 지난해 12월 특수가스사업부를 효성티앤씨에 매각(9200억원)했고 올 4월에는 베트남 법인 효성 비나 케미칼 지분 49%를 PRS 방식으로 처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업현금흐름 부진으로 채무상환능력은 크게 개선되지 못하고 있다. 업계는 이 같은 매각 작업이 단기적으로는 유동성 확보와 차입 부담 완화 효과를 가져올 수 있지만 영업현금흐름 개선이 지연되고 있는 만큼 채무상환능력 회복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할 것으로 보고 있다. 주요 석유화학사 합산 순차입금/EBITDA 배율은 2025년 6월 말 기준 12.7배로 상승했다.
여기에 정부가 석유화학 업계에 대규모 설비 감축을 요구하면서 업계 전반의 구조조정이 본격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정부는 지난 8월 산업경쟁력강화 관계장관회의를 통해 국내 10개 NCC 기업과 자율협약을 체결하고 연말까지 최대 370만톤 규모의 설비 감축 계획을 제시하도록 했다. 이는 국내 전체 NCC 생산능력의 약 25%에 해당하는 물량으로, 업계에서는 사실상 구조조정 신호로 받아들이고 있다.
LG화학, 한화솔루션, 롯데케미칼, HD현대오일뱅크 등이 집결해 있는 대산 석유화학단지가 핵심 시험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해당 단지는 에틸렌·프로필렌 등 기초유분에서 합성수지·중간원료까지 밸류체인이 얽혀 있어 일부 설비를 독립적으로 매각하거나 폐쇄하기 어렵다. 이에 따라 개별 회사 단위의 조정이 아닌 '단지 차원의 통합·공동운영' 형태가 유력하게 거론된다.
보고서는 이러한 움직임이 대산에 그치지 않고 여수, 울산 등 다른 석유화학단지로 확산될 가능성도 지적했다. 여수와 울산 역시 복수의 대기업이 얽혀 있어 특정 설비의 조정이 다른 계열사들의 원료·제품 수급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단기적으로는 가동률 개선과 원가 효율화로 재무부담을 완화할 수 있으나 중장기적으로는 국내 석유화학산업의 구조와 경쟁 구도 전반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보고서는 "향후 12개월간 국내 석유화학산업은 공급과잉 국면이 지속되는 가운데 범용 제품을 중심으로 경쟁 강도가 높아져 저조한 수익성이 이어질 것"이라며 "구조조정과 디레버리징 부담이 불가피할 전망"이라고 평가했다.
최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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