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튀던 그 곳에서 해방됐다…만신창이 되고 받아든 해고통지

석탄을 가득 실은 무개화차를 끝없이 매달고 가는 기관차는 힘에 겨워 기적을 비명처럼 내지르며 엉금엉금 기어갔다. 한국전쟁 피난민이 몰려들어 지은 판잣집들은 다닥다닥 조개무지 포갠 듯이 부산 산비탈을 타고 올랐다. 용호동 소막 마을은 일본이 소를 수탈해가며 검역 시설로 지은 소 막사를 피난민들이 판자로 칸을 지르고 구들을 놓아 살던 판자촌이었다. 모든 게 부족하던 시절이었던 1960년대 말, 학교도 당연히 부족했다. 아이들은 2부제 수업으로 생긴 반나절 놀거리를 찾아 미로 같은 골목을 헤집고 다녔다. 아이들 달음질로도 따라잡을 수 있는 감만동 연합철강으로 석탄을 실어 나르는 거북이 기차는 최고 놀거리였다. 소막마을 골목에서 내려와 우암역을 지나는 화차에 매달리거나 아예 석탄 더미 위에 올라앉아 가다가 연합철강 앞 굽이에서 뛰어내렸다. 손바닥과 얼굴에 묻은 것은 두고라도 석탄 검댕이 밴 옷은 빨아도 거무튀튀해진다. 그런 날이면 해거름에 저녁도 못 얻어먹고 팬티 바람으로 쫓겨난 아이들이 집안을 향해 내일이면 또 지키지 못할 약속을 읍소했다.

조선소에 건조 중인 선박. /박보근

◇먹고사는 일이 급해 고향을 떠난 아이 = 고점석(63) 씨도 그 아이들 중 한 명이었다. 연합철강 앞에서 왼쪽 굽이로 돌아나가며 속도가 더 떨어진 틈에 뛰어내려 돌아오는 길은 늘 아득하고 허기졌다. 밥이 하늘이었던 부모는 밤낮없이 일했지만, 가난은 석탄 검댕처럼 좀체 지워지지 않았다. 족쇄 같은 가난을 벗어나고자 무리한 일을 벌이다 잘못 틀어졌는지 가족은 어느 겨울밤 작은 어선을 타고 소막마을을 떠났다. 밤바다 파도를 헤치고 한적한 갯마을 농가 문간방에 세간 보따리를 풀었다. 거제 둔덕면 어구마을은 양식장이 많고 고기가 잘 잡히는 곳이라 바다 일거리가 지천이었다. 당장 먹고사는 일이 급했으므로 점석 씨의 어린 손까지 필요했다. 중학교 입학까지 미루고 일손을 보태다가 신현읍에 있는 중국집 배달원이 되었다. 집에서 먹는 입도 줄이고 식당이라 배곯지 않아 좋았다. 하루는 읍내에 나온 아버지가 따라붙은 여동생을 잠시 맡겼다. 배달하면서 틈틈이 배운 솜씨를 다해 수타로 면을 뽑고 짜장을 볶아 내었다. 시골 흙길을 걸어오며 뒤집어쓴 먼지에 콧물에 짜장까지 범벅이 된 얼굴로 누가 뺏을까 그릇을 끌어안고 허겁지겁 먹던 그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월급은 뜨거운 식용유가 남아 있는 웍에 머리통 맞아가며 요리를 배우고 먹여 주고 재워 주는 것으로 퉁쳤다. 무서운 주방장이나 자린고비 주인보다 배달 나가서 마주치는 또래들 교복이 그를 더 힘들게 했다. 15살 소년은 떠났던 부산으로 가서 양말 공장에 취직했다. 저녁 시간이 자유로워 야간 중학교나마 졸업할 수 있었다.

비좁은 공간에서 일하는 조선소 노동자. /박보근

◇조선소 입사와 외항 선원 = 1984년 대우조선공업 도장부에 입사해 조선소와 첫 인연을 맺었다. 선박에 페인트를 입히는 도장 작업은 지금도 힘들지만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전인 당시엔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환기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탱크 속에서 변변한 보호 장비도 없이 작업을 했다. 철판 표면 이물질을 제거하는 블라스팅 작업에서 발생하는 자욱한 분진과 소음은 눈과 귀를 괴롭혔다. 지독한 시너 냄새를 두어 시간 맡으며 일하다 보면 술에 취한 것처럼 몽롱해졌다. 가족이 통영으로 이사하면서 집에서 가까운 신아조선으로 옮겨 일했다. 규모가 작은 신아조선의 작업 환경은 더 나빴다. 저임금으로 벗어나지 못하는 가난과 높은 노동 강도에 발목 잡힌 건강이 그를 옥죄었다.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이 태어나자 이건 아니다 싶었다. 조선소를 떠나 외항 상선 선원으로 일하다가 연봉이 훨씬 높은 원양어선으로 갈아탔다. 소년 시절 중학교 진학도 미루고 중국집에서 배운 요리가 도움이 돼 조리장으로 일했다. 살림이 펴지자 짜장 그릇을 끌어안던 동생들도 짝을 찾아가고 늙은 부모님 일손도 쉬게 되었다. 10년 넘게 원양어선을 타고 세계 곳곳 바다를 누비면서 많은 일을 겪었다. 아프리카 어디에선 택시 기사에게 납치당할 뻔했고 남미 어디선가는 선상 반란을 일으킨 선원들에게 잡히지 않으려고 배에서 뛰어내려 칼 맞은 동료를 업고 병원으로 뛴 일도 있었다. 벌이는 좋았지만 오랜 승선 기간은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과 홀로 지내는 외로움이 자라서 병이 되었다. 십수 년 만에 뭍으로 돌아온 점석 씨는 식당을 해볼까 하였으나 어린 시절 맨몸으로 떠났던 밤바다가 떠올라 생각을 접었다.

쪼그려 앉아 두어 시간 일하다 일어서면 무릎에서 마른 장작 타는 소리가 난다. /박보근

◇다시 조선소 일을 시작하다 = 다시 시작한 조선소 일은 십수 년 전과 상황이 크게 달랐다. 고용 유연화를 들어 작업 물량에 따라 쉽게 채용하고 쉽게 해고할 수 있는 하청 업체 노동자가 많이 늘어났다. 본사 정규직으로 입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선수미 공장(뱃머리와 꼬리 부분을 만드는 공장) 협력업체에 들어갔다. 그가 하는 일은 그라인더로 울퉁불퉁한 용접 부위를 깎아 다듬거나 철판 표면 이물질을 제거하는 작업이었다. 도장부처럼 시너에 취할 일은 없었지만, 분진과 소음은 더 심했다. 7000~2만rpm으로 돌아가는 그라인더에서 갈려 나오는 연마석과 쇳가루가 몇 시간 만에 방진 마스크 필터를 새카맣게 만들었다. 뼛속을 긁어대는 듯한 철판 깎는 소리는 귀마개를 했어도 고막이 찢어질 것 같았다. 무엇보다 엄청난 속도가 만들어 내는 진동은 손가락 관절을 괴롭혔다. 처음 며칠 동안은 손이 떨려 국을 떠먹지 못했다. 자고 나면 손이 부어 주먹이 쥐어지지 않았다.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선수와 선미 부분 내부는 바른 작업 자세가 나오지 못할 정도로 비좁았다. 불편한 자세로 오래 일하다 허리에 무리가 가서 처음으로 산업재해 치료를 받았다. 이후 허리는 고질병이 되었다. 연마석까지 체결하면 3kg이 넘는 그라인더를 든 자세에서 머리 위로 손을 뻗쳐 두 시간 정도 작업하면 허리와 어깨가 끊어져 나갈 정도로 아팠다. 결국, 양 어깨도 병원 신세를 졌다. 대형 블럭을 조립하는 야외 작업장으로 배치되어 일하면서 무릎이 말썽을 일으켰다. 40kg 정도 되는 에어 호스와 공구 통을 메고 5층 높이의 계단을 오르내리고 쪼그린 자세로 일하거나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다 보니 무릎 연골이 닳고 찢어져 인공관절 수술을 했다. 그라인더 일을 시작한 지 20년 만에 사지와 허리 모두가 망가졌다. 몸이 그렇게 망가질 동안 왜 미리 산재 신청을 하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고 씨는 한마디로 '돈' 때문이라고 답했다.

해고통지를 받고 요양보호시설에서 차량 기사로 일하는 고점석 씨. /박보근

◇산재 치료 중에 날아든 해고 통지서 = 산재 휴업급여는 1일 평균임금의 70%를 받는다. 본사 정규직 노동자 3분의 2 수준 임금의 70%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 하청 노동자는 깨지거나 부러지지 않는 한 참고 일한다. 뉴스타파가 더불어민주당 전용기 의원실 자료를 토대로 분석한 내용에 따르면 옛 대우조선에서 하청 노동자 산업재해 신청, 승인 비율은 원청 노동자보다 현저히 낮았다. 2020년부터 3년간 하청 노동자 평균 산재 신청률은 1.77%로 같은 기간 원청 노동자 5.42%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승인율 역시 하청 노동자 1.52%보다 원청노동자가 3.82%로 두 배 이상 높았다. 중대 재해나 사망사고는 하청 노동자가 훨씬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데 산재 신청률이 낮다니 왜 그럴까. 산재 처리 건수가 많아지면 원청과 고용노동부로부터 귀찮은 불이익과 간섭을 받으므로 하청 업체는 어지간하면 공상(합의) 처리를 원한다. 그렇기도 하지만 다친 노동자도 당장 생계가 우선이라 복잡하게 이것저것 따져가며 승인이 늦게 떨어져 언제 나올지도 모르는 산재휴업급여를 목을 빼고 기다리느니 바로 처리되는 공상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고점석 씨는 모두 산재로 처리했다. 그래선지 산재 치료받는 동안 업체 대표가 바뀌면서 고용 승계가 되지 않고 해고 통지서가 날아왔다. 억울한 마음에 하청 노조 등 여기저기 도움을 요청하다 지쳐 포기했다. 만신창이가 되어 장애 등급을 받았다. 내가 아프니 눈에 보였다. 몸이 불편한 이들과 퇴역한 노인들을 돕고자 요양보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실습 나간 노인주간보호센터에서 차량 운행 제의를 받고 현재는 노인보호차량 기사로 일하고 있다.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을 안아 태우고 내리는데 아픈 팔다리가 힘에 부칠 때가 있어도 보람 있다고 한다. 차를 몰고 통영 시내를 돌다 보면 3년 남짓 근무했던 옛 신아조선을 지난다. 황량한 터에 녹슨 크레인만 덩그렇게 서 있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편치 않다. 신아조선이 경영 위기를 외주화보다 탄탄했던 직영 체제로 돌파했으면 아직 망치 소리와 함께 용접 불꽃이 튀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박보근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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