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전력기기 산업이 사상 최고의 호황기를 맞았지만 이면에는 그늘이 짙게 드리웠다. 미국 시장 편중과 기업별 재무 리스크는 활황을 무너뜨릴 수 있는 ‘구조적 뇌관’이다. 화려한 숫자 뒤에 가려진 기업의 민낯을 살펴보고 진정한 글로벌 강자로 거듭나기 위한 방향성을 알아본다. <편집자 주>

“풍년은 풍년인데 논 주인이 언제 물길을 막을지 모른다.”
국내 최대 전기산업 전문 국제전시회인 ‘일렉스코리아 2026’에서 만난 한 업계 관계자는 HD현대일렉트릭을 이렇게 평가했다.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증설과 노후 전력망 교체의 흐름을 타고 사상 최대 실적을 경신하고 있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북미라는 특정 시장에 명운을 맡기고 외줄을 타는 모양새다.
매출 40%가 북미, 해외는 70% 넘을 전망
HD현대일렉트릭은 지난해 창사 이후 최대 실적을 달성했다. 매출은 전년보다 22.8% 증가한 4조795억원, 영업이익은 48.8% 늘어난 9953억원이다. 순이익도 7318억원으로 46.8% 개선됐다. 영업이익률은 24.4%로 1년 전보다 4.3%p 올랐다. 4분기 영업이익률은 27.6%로 분기 기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실적개선은 북미를 중심으로 한 전력기기 판매 확대가 결정적이었다. 현지 전력기기 매출은 전년보다 29.7% 커진 1조6149억원이다. 전체 매출 중 북미권의 비중은 약 40%다. 해외만 보면 절반 수준으로 전문가들은 올해 70%를 넘어설 것으로 관측한다. 올해 북미권, 특히 미국 판매량이 늘면서 현지 판매실적 2조원을 돌파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태현 IBK투자증권 연구원은 "미국의 데이터센터 관련 송전망 구축 수요가 확대되는 가운데 HD현대일렉트릭은 변압기를 비롯한 대부분의 전력기기 판매가 호조세”라며 “미국의 고수익 전력기기 납품량이 늘어나면서 최고 실적 경신은 당분간 이어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올해 예상 매출과 영업이익은 각각 4조9987억원, 1조3011억원”이라며 “미국 판매량이 큰 폭으로 늘어나면서 지난해보다 각각 22.5%, 30.7% 증가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미국 판매량이 매출의 대부분이라는 것이 HD현대일렉트릭에는 호재이자 악재가 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한쪽으로 쏠린 매출구조가 더욱 심화될 수 있어서다. 미국 인프라 투자계획과 현지 전력청의 발주서에 기업의 운명이 좌우되는 이른바 ‘천수답 경영’의 전형이다. 이에 회사는 현지 수주가 줄어드는 순간 수익구조가 붕괴될 수 있는 위태로운 형국이다.
“미국이 재채기하면 독감” 정책 시한폭탄 위협
취임 2년 차에 접어든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실질적인 상호주의를 앞세워 보편적 기본관세와 고율의 특별관세로 수출국가를 전방위로 압박하고 있다. 수입산 전력기기의 경우 우리 기업이 ‘슈퍼 을’인 공급자 우위 구조가 심화하며 미국 기업에서 관세를 부담하는 상황이지만 형세는 언제 역전될지 모른다.
트럼프 대통령이 수입량이 많아지는 K전력기기에 관세폭탄을 터뜨릴 경우 우리 기업들은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된다. 미국이 재채기만 해도 우리 기업은 독감에 걸리는 셈으로 정책시한 위협에 항상 노출돼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국내 3사 중에서는 HD현대일렉트릭이 가장 큰 피해를 볼 것으로 확실시된다. 효성중공업과 LS일렉트릭 등의 북미권 매출 비중은 HD현대일렉트릭의 절반인 20%대에 불과해 미국의 정책변화에 상대적으로 덜 민감하기 때문이다.
HD현대일렉트릭은 최근 앨라배마 제2공장을 착공하며 뒤늦게 현지 생산능력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지만 여전히 주력 물량의 상당수는 국내 공장에서 수출되는 구조다. 미국이 수입산 전력기기에 높은 관세를 부과할 경우 가격경쟁력 상실에 따른 판매량 감소로 실적은 물론 20~30%대에 달하는 압도적인 영업이익률도 한 자릿수로 급락한 공산이 크다.
‘초고압 변압기’ 딜레마, 생존 열쇠는 제품 다각화
HD현대일렉트릭은 현재 전성기를 맞았지만 제품 포트폴리오를 보면 위험신호가 감지된다. 실적의 중추인 초고압 변압기 같은 특정 품목에 치우친 비즈니스 구조는 시장의 온기가 식는 순간 기업에 치명타가 된다. 과거 국내 조선업도 수주 잭팟에 취해 슈퍼사이클의 끝을 대비하지 못하다 공급과잉과 선가하락이 겹치며 수년간 혹독한 구조조정에 시달렸던 적이 있다.
시장에서는 전력기기 산업이 올해를 기점으로 공급자 우위의 정점을 지나 수요정체가 나타나는 ‘피크아웃’ 임계점에 근접했다고 본다. 이 상황에서 북미용 초고압 변압기라는 단일 품목에 쏠린 포트폴리오로는 스스로를 궁지에 빠뜨릴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HD현대일렉트릭은 초고압 변압기를 잇는 캐시카우를 발굴해 일감을 확보해야 하는 상황이다. 물론 현재도 초고압 변압기뿐 아니라 저압 전동기나 배전기기 등도 생산하지만 변압기에 비하면 매출이나 생산량이 낮다.
반면 LS일렉트릭은 단일 품목에 편중되지 않는 촘촘한 그물망을 마련한 뒤 글로벌 시장에 진출했다. 초고압 변압기에 집중하는 HD현대일렉트릭과 달리 배전(중·저압) 기기와 공장 자동화, 에너지저장장치(ESS), 초고압직류송전케이블(HVDC) 등 전력산업 전반을 아우르는 ‘풀라인업’을 갖췄다.
시장은 냉혹하다. 미국에서 초고압 변압기 판매·수주가 많아지며 주가 역시 오름세를 보이고 있지만 현지 정부가 빗장을 걸어 잠그며 변압기의 열풍이 식을 경우 HD현대일렉트릭이 지속적으로 생존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경쟁사가 다변화된 제품군으로 대피처를 마련한 것처럼 HD현대일렉트릭도 하루 빨리 현재보다 더 나은 제품 다변화를 이뤄야 할 필요성이 있다. 수익구조 다각화라는 기본 과제를 외면한다면 미국 ‘초고압 변압기 시장 1위’는 빛바랜 영광이 될 수도 있다.
업계 관계자는 “HD현대일렉트릭의 역대 최대 실적은 실력이라기보다 공급부족이라는 특수한 환경이 만들어준 잔치”라며 “호황이 끝나기 전에 확보한 자금으로 북미를 대체할 신시장과 제품 포트폴리오 다변화를 이루지 못하면 슈퍼사이클이 끝났을 때 HD현대중공업처럼 구조조정의 칼바람을 맞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유호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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