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찬 베일은 왜 55㎏까지 뺐을까?

[장우현의 '당신을 위한 배우수업']

‘81-55-86-61-86-66-90-100’

이 숫자들은 2000년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부터 2019년 영화 <바이스>까지 다양한 작품에 출연한 영화배우 크리스찬 베일의 몸무게다. 183㎝의 키를 고려했을 때, 55㎏의 저체중에서 100㎏가 넘는 거구의 몸까지 그는 몸을 극단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왜 이렇게까지 배역의 외모를 위해 몸무게를 조절한 걸까? 특수분장으로도 충분히 역할의 외모를 구현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정작 크리스찬 베일은 자신을 역할에 동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기술적으로 역할의 외모를 만드는, 즉 옷을 만들어 입듯이 연기를 했다고 설명한다. '역할의 몸을 만든다'는 것이 메소드 연기 이론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보자. 더불어 메소드 연기를 창시한 스타니슬랍스키가 제시하는 배우의 삶을 위한 지침도 소개하고자 한다.

몸도 기억을 한다

메소드 연기를 창시한 스타니슬랍스키는 배우 개인의 마음속에 저장된 기억들을 활용해 역할의 상황으로 연결하는 '정서기억법'을 개발했다. 예를 들어 트라우마 상황을 연기하기 위해 배우는 개인이 가지는 관련 기억들을 반복적으로 떠올리고 섬세하게 조작하여 트라우마 반응을 할 수 있게끔 훈련한다. 배우들은 다양한 정서와 기억들을 체계적으로 훈련해 다양한 역할연기를 위한 재료들을 획득하는데, 그 결과 원할 때마다 반복해서 기뻐하거나 분노하거나 두려워하는 연기를 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의 동료인 메이예르홀드는 정서기억법이 배우의 개인과 역할의 기억들이 융합된 채 분리되지 않는 심리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대신 메이예르홀드는 몸에도 개인의 기억이 각인되어 있으며, 몸을 사용한 정서 혹은 감정 유도가 마음을 활용하는 방법보다 훨씬 안전하다고 주장했다. 한 세기가 지난 최근에서야 몸에 기억된 기억과 감정을 균형감 있게 조율하는 다양한 심리기법들이 트라우마 치료를 위한 임상현상에서적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 메이예르홀드의 직관은 시대를 앞서고 있었다.

실제로 우리는 로댕의 조각상인 ‘생각하는 사람’을 볼 때, 작품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없더라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몸의 모든 곳에서 그 사람의 고통과 고뇌를 느낄 수 있다. 메이예르홀드는 배우가 신체훈련을 극대화해 극심한 감정을 경험하는 사람의 몸을 정교하게 따라할 수 있다면, 관객들은 그로부터 강렬한 감정을 전달받을 것이다. 배우가 머리 속으로는 저녁식사 메뉴를 고민하더라도 말이다.

메이예르홀드는 배우가 서커스단원 수준의 유연성, 힘, 리듬과 템포, 균형 등의 신체 움직임을 구현할 수 있는 체계적인 훈련법을 개발했는데, 이를 서사와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하면서도 역할에 몰입하지 않는 가장 실용적인 방법이라 여겼다.

수만 번의 모방

스타니슬랍스키가 주의집중의 빛을 내면 즉 개인의 마음에 비췄다면, 메이예르홀드는 주의집중의 빛을 외부 즉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사람들의 행동에 비췄다. 이를 '배우의 관찰'이라고 불렀다. 관찰은 대상을 현미경으로 아주 세밀하게 살펴보는 미시적인 관점과 대상과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맥락적으로 성찰하는 거시적인 관점을 동시에 의미한다. 그 다음에 가장 중요한 ‘모방'을 진행하는데, 모방은 관찰한 대상의 신체적 상태를 느낄 때까지 즉 ‘체화’할 때까지 수천, 수만 번 진행한다. 다행히도 관찰은 거듭 연습할수록 진행시간이 줄어든다.

때때로 메소드 연기를 위해 극단적인 체중변화를 실행하는 배우들은 체중 증감을 통해 외모뿐만 아니라 자세, 호흡, 목소리, 움직임, 세상을 지각하는 방식까지도 변화시킨다. 극단적으로 모방하고 체화하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관찰 ‘지름길’이라 할 수 있다.

영화 '바이스'에 닉 체니 전 미 부통령으로 연기한 크리스찬 베일.

맡은 역할에 따라 극단적으로 체중조절을 실행한 영화 배우 크리스찬 베일은 영화 〈바이스〉(2019) 촬영 후 100㎏이 넘는 체중에서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반복적인 다이어트를 했는데, 죽음의 그림자를 보았다는 얘기도 했다고 한다. 이처럼 극단적인 생리적 변화를 유도하는 '지름길' 사용은 배우 개인의 삶과 건강에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배우의 상상, 판따지야

스타니슬랍스키와 메이예르홀드의 기억에 접근하는 방식의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을 보며 또다른 러시아의 연기교육자 Y. B. 박탄고프(Yevgeny Bagrationovich Vakhtangov, 1883~1922)는 답답함을 느꼈다.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에 정통한 최고의 교사이자 메이예르홀드의 예술적 동료였던 박탄고프는 두 사람이 결국 진실되고 가치로운 연극의 구현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위 진정성 있는 연기를 하기 위해 배우는 몸과 마음의 상호연관성을 이해해야 하며, 이 두 가지 방법론을 모두 익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의 사이에 위치하며, 이 둘에게 동시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배우의 '적극적인 상상'을 강조했다. 이를 그는 '판따지야'(фантазия)라 했다.

예를 들어보자. 배우가 왕위를 물려받았지만 실제로는 숙부의 꼭두각시가 된 어린 왕을 연기한다고 하자. 배우는 자신의 머리에 씌워진 ‘굴레’를 상상하고 오감으로 느낀다. 모든 상황과 장면에서 스스로 나아가려 행동하지만 절대로 끊어지지 않을 것 같은 굴레가 그를 구속한다. 왕은 처음에는 강하게 부정하지만, 이어서 분노를 경험하고, 결국 현실과 타협한다. 하지만 무기력이 극대화되며 우울감을 느낀다. 그는 손가락 하나조차 움직일 수 없다.

이처럼 박탄고프는 주어진 상황을 관통하는 역할의 핵심적 이미지로서 판따지야(연극적 환상)를 추출하고, 이를 상상해 역할의 몸과 마음에 영향을 주는 상태를 구현했다. 메소드 연기를 사용하는 배우들은 몸, 마음, 판따지야 중심의 세 가지 방향성과 방법론을 모두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제 4의 벽

스타니슬랍스키, 메이예르홀드, 박탄고프의 방법론들은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의 3가지 중심축들이다. 이들은 각각 사실주의, 연극주의, 환상적 사실주의로 불리는 현대 연기예술의 사조로 발전했다. 이들 간의 차이를 ‘제 4의 벽’이라는 연극학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무대 위에는 좌, 우, 뒤에 세워지는 3개의 불투명한 벽들이 있다. 제 4의 벽은 '무대와 객석 사이'를 경계 짓는 투명한 네 번째 벽을 의미한다. 이는 일종의 약속이다. 배우와 관객은 다른 차원에 존재하며,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고 관찰할 수 있지만, 간섭하지 않는다. 제 4의 벽은 영화나 드라마를 관람하는 관객으로 치면 스크린이나 브라운관으로 이해될 수 있다.

스타니슬랍스키는 제 4의 벽을 세워 무대와 객석 사이의 경계를 명확히 했다. 제 4의 벽 너머에 있는 관객은 무대 위 사건과 배우들을 관찰하지만 물리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약속한 것이다. 때문에 배우들은 자신들의 영역 안에서 관객의 시선에 방해받지 않고 무대 위 사실적 시공간을 살아간다.

반면 메이예르홀드는 설계된 행동과 연기를 통해 시간과 공간 그리고 사건까지 마음대로 변형한다. 연극은 실제 사건이 아니라 연기임을 강조하며, 제 4의 벽을 의도적으로 파괴한다. 관객들에게 사실적 삶의 구현이 아닌 연기의 의도 혹은 메시지를 전달하려 한다. 배우들은 제 4의 벽을 제거해 관객들을 쳐다보거나 말을 걸기도 한다.

박탄고프는 제 4의 벽을 유연하게 활용했다. 사실적인 연기를 하다가 갑자기 관객들에게 말을 걸어 환상과 현실의 시공간을 잇기도 한다. 특히, 그가 연출한 연극 <투란토트 공주>에서는 4명의 광대를 제 4의 벽을 통과할 수 있는 두 차원 혹은 세계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특별한 존재로 만들었다.

영화 <살인의 추억>의 마지막 장면에서 송강호 배우가 연기한 박두만 형사가 화면을 바라본 순간, 이전의 사실주의 연기에서 '환상적 사실주의적' 연기로 전환되며 배우의 시선은 현실 세계로 향한 강렬한 메시지가 된다.

'살인의 추억'에서 박두만 형사를 연기한 송강호 배우.

5가지 가이드라인

메소드 연기는 대중들에게 사실주의, 혹은 극사실주의적 연기방법론으로 알려졌지만, 체계적인 예술방법론이자 배우의 안전한 예술활동을 위한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의 일부라 할 수 있다. 이 스타니스랍스키 시스템에서 배우가 깊이 있고 건강한 연기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핵심 가이드라인을 몇 가지 제시한다.

첫째, 연기의 목적은 개성의 발현이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수천 개의 마스크, 즉 자아를 가지고 태어나며, 배우는 연기를 통해 수많은 상황과 그 속에서 발현되는 잠재된 ‘나’를 만나고 통합하는 것이다. 연기력이란 남들과의 비교가 아닌 배우 개인의 ‘유니크함’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둘째, 연기의 ‘형식’에 얽매일 필요 없다. 배우가 연기를 하고 역할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수단과 도구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또 그 과정과 내용에 맞는 형식을 사용하거나 개발해야 한다. 과정에 충실하다면 결과 및 형식은 저절로 나타난다. 하지만 특정 형식에 맞춰 내용을 재단한다면, 예술로서의 가치는 바로 사라진다.

셋째, 연기는 ‘앙상블’이다. 배우는 다양한 연기를 하기 위해 자신과 타인들 더 나아가 세상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 관점과 신념이 경직되면 세상과 단절된다. 또한 배우는 상대 배우들은 물론 현장스텝과 관계자, 그리고 관객 혹은 잠재적 관객인 대중과 연결된 하나의 앙상블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이들 사이에서 에찌까(этика, 윤리성을 뜻하는 러시아어)를 유지할 수 없다면 연기력은 물론 배우로서 자격이 없다.

넷째, 배우는 무대 위와 카메라 앞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배우로서 살아야 한다. 배우로서의 삶이란 모든 상황에서 두려움 없이 모든 감정을 만끽하며, 이런 모습을 통해 삶이 안전하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메시지를 대중에게 전하는 것이다. 이를 배우의 소명인 삶에 대한 ‘사랑’으로 부를 수 있다. 삶을 배제하고 무대 위와 카메라 앞에서만 배우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지막으로, 배우는 자신을 회복하는 시간을 반드시 가져야 한다. 역할이 끝나면 역할의 극단적인 심리적, 신체적 상태가 배우에게 남는다. 반대로 배우 개인 일상의 중대한 사건이 무대 위 역할연기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따라서 배우는 전문가와 혹은 동료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안전하고 따뜻한 분위기에서 휴식하고 자신으로 회복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 실수와 실패가 필연적인 배우의 삶에서는 과도하거나 불필요한 긴장이 자주 발생하기 때문에 체계적인 회복훈련과 경험은 필수다.


※ 장우현은 러시아의 모스크바 슈킨연극대를 졸업하고, 귀국 후 상담심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이란 통합적 연기방법론과 상담심리를 융합하여,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마약사범을 위한 중독회복, 예술가의 무대공포증 대처, 교사들을 위한 트라우마 대처, 그리고 일반대중을 위한 안전한 감정만끽 등 다양한 주제의 구조화된 프로그램들을 교육하고 있다. 연기예술이 몸과 마음을 이해하고 균형 있게 사용하는 매우 실용적 방법임을 확인하며, 모두를 위한 연기예술 프로그램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