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 횡단 도전기] <5> 블라디보스토크 문화탐방

2024. 10. 1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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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이번에는 더 많은 실수를 하리라...더 자주 여행을 다니고 더 자주 노을을 보리라"미국 켄터키주에 살던 나딘스테어 할머니가 85세에 쓴 시'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은 90년대 최고의 베스트셀러인 '영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에 소개되면 널리 알려졌다. 지난1970년대 소년 윤영선도 김찬삼교수의 세계일주 여행기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아 세계여행을 꿈꾼다. 그의 꿈은 바쁜 관료생활로 하염없이 미뤄졌다. 그랬던 그가 고교 졸업 50년만에 꿈을 실천했다. 나딘스테어 할머니의 시가 큰 힘이 됐다고 한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작해 튀르키예 이스탄불에 이르기 까지 50일간의 자동차 여정이다. 그는 여행기간동안 멈춤과 느림의 시간속에 미지의 세계를 경험하고 태고적 고원의 웅장함을 느꼈다고 한다. 70 나이에 꿈을 이룬 윤영선 법무법인 광장 고문(전 관세청장)의 횡단기를 연재한다   [편집자주]

자동차가 세관에서 나올 때까지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곳곳을 소요(逍遙)한다. 시내 중심부에 있는 러시아정교회 '포크롭스키' 주교좌 교회를 방문한다. 우리는 동방정교회, 러시아정교회, 조지아정교회 등 정교회(正敎會)에 낯설다.

정교(正敎)는 한자 의미대로 '옳은 교회'라는 의미이다. 로마 칼톨릭 교회가 8세기 게르만족 포교에 필요한 성화(聖 ) 제작을 허용할지? 우상숭배로 볼 것인지? 교리 다툼으로 갈라진 교회이다.

성화 제작을 우상숭배로 반대했던 비잔틴 교회는 '옳은 교회', 정교(正敎)회로 스스로 칭했다. 교회 벽면의 이콘 성화가 화려하다. 정교회도 결국은 포교를 위해 성화(聖 )를 허용했다.

예배 시간 내내 사제와 신자 계속 서 있어야 한다. 교회 홀에 의자는 없다. 성가도 악기 없이 육성으로만 부른다. 러시아정교회는 결혼한 사람도 신부가 될 수 있다고 한다. 다만, 결혼한 신부는 주교 등 고위직 사제는 될 수 없다고 한다.

포크롭스키 정교회 야외 미사와 정교회 성인(聖人) 추모 미사의 모습. [사진=윤영선]

러시아 혁명 후 스탈린은 '1 도시 1 교회' 원칙을 정하고 러시아정교회, 이슬람교 등 종교 탄압을 하였다. 원칙적으로 한 도시에 하나의 교회만 인정되고, 나머지 교회나 사원은 폐지하였다. '포크롭스키' 교회는 1 도시 1 교회에 해당하여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이다.

스탈린이 1953년 사망하고, 후계자 후루시초프는 스탈린 격하 운동과 함께 종교 자유도 허용함에 따라 스탈린 사후 많은 신설 교회가 생겼다고 한다. "인류 역사는 세속의 정치권력과 영적인 종교 권력의 투쟁, 내가 믿는 신이 최고신(最高神), 참된 신이라는 종교와 종교의 투쟁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의 말이 생각난다.

블라디보스토크 외곽 러시키 섬에 위치한 '시바토 수도원'에 택시를 타고 갔다. 태평안 연안 러시키섬에 위치한 시바토 수도원은 신부 2명, 수도사 20명이 거주한다고 한다. 검은 사제복을 입고, 수염을 기른 신부에게 한국에서 왔다고 말하고 함께 사진 촬영 요청을 하니 기꺼이 응한다. 향후 이런 오지의 수도원에 찾아올 한국인은 없을 것이라고 우리끼리 말하며 서로 웃는다.

19세기 말 블라디보스토크에 이주한 조선인이 처음 정착한 장소가 '개척리'라고 한다. 현재 이곳은 블라디보스토크 젊음의 거리인 '아르바트' 거리로 변했다. 초창기 정착지로서 움막 등 주거환경이 매우 불결하고, 전염병이 창궐해서 1911년 러시아 정부가 외곽에 새로운 주거지를 만들어 '신한촌(新韓村)'으로 이주시켰다.

윤영선 법무법인 광장 고문 일행이 러시키섬 시바토 수도원 신부와 함께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사진=윤영선]

옛 개척리인 아르바트 거리는 서구식 건물, 예술 조형물, 젊은이 대상 문화거리이다.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은 항구 옆에 있다. 제정 러시아가 1904년에 완공한 시베리아 철도의 종착역이다. 모스크바까지 9300㎞, 기차 정거장 숫자만 850개로 세계에서 가장 긴 철도이다.

이 역에서 1907년 고종의 헤이그밀사인 정사 이상설, 부사 이준, 통역 이위종 세 분이 출발한 역이다. 힘없는 망국의 나라 조선의 젊은 관리 세 명이 비장한 각오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 헤이그로 출발한 역을 바라본다. 상해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를 역임한 이동휘 선생 기념비를 들렸다.

상해 임시정부는 1919년 9월 수립되었다. 상해, 연해주, 한성에 있던 세 개 독립단체를 통합하여 설립한 것이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초대 국무총리 이동휘 선생이다. 이동휘 선생은 조선 말기 한성무관학교를 나온 무관이다. 조선 멸망 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한 사회주의 성향의 독립운동가이다. 1920년 소련의 레닌이 200만 루블을 상해임시정부 독립운동 자금으로 주었다.

이 선생의 측근이 40만 루블을 공산당 확장에 사적으로 사용한 것이 발견되어 감찰 담당이던 김구 선생이 척살했다. 이승만 대통령, 안창호 선생 등과 노선 차이로 일찍 임정과 결별하고 1921년 1월 연해주로 돌아가서 고려공산당 창당 등 평생 공산주의 운동을 하신 분이다. 조선말, 일제 강점기 암울한 시기에 많은 지식인들이 공산주의,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된 것은 당시의 시대상이다.

이 선생은 1920년대, 30년대 스탈린의 공포정치와 잔혹한 숙청 정치를 목격하신 분인데, 공산주의 실상은 실제 잘 모르는 분으로 생각이 든다. 건국훈장도 공산주의 경력 때문에 매우 늦은 1995년 수상하였다. 역사의 현장을 역사학과 대학생처럼 많이 걸어 다녔다.

경기문화재단이 지난 2020년 설치한 이동휘 선생 기념비의 모습. [사진=윤영선]

어두웠던 100여 년 전 우리의 흑(黑)역사(Black history) 현장을 보면서 다시는 어두운 흑역사를 반복하지 아니하도록 냉혹한 역사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블라디보스토크 도착한 지 5일째인 7월8일 오후 자동차가 세관에서 통과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모두가 환호성을 지른다. 한국식당에서 김치찌개로 저녁 식사를 하면서 무사고 완주를 다짐한다. 일행 중에서 가장 연장자인 K 교수는 "걱정을 떨치고 즐겁게 갑시다"로 건배한다.

모두 "가자, 이스탄불"을 힘차게 소리쳤다. 영어로 여행은 travel인데, 어원은 '고생, 고난'이라는 'travail'에서 나왔다고 한다. 우리도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이 있는데, 서양도 여행은 고생이라는 뜻에서 문화적 동질감을 느낀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 장기간 여행하면서 마찰 없이 보내기 것은 쉽지 아니하다. 서로 마음의 거리를 좁혀야 한다. 고난을 함께 겪으면서 우정이 생기기를 희망하며…

윤영선 법무법인 광장 고문.

◇윤영선 법무법인 광장 고문은 서울고등학교,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위스콘신대학 석사, 가천대학교 회계세무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제23회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국세청, 재무부 등에서 근무했으며 청와대 경제수석실 행정관, 기획재정부 세제실장, 제24대 관세청장,삼정kpmg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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