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TV 화면 속 빨강 바지 그 녀석, 내년에 또 보자 [임보 일기]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사실 우리네 삶이란 게 그래요.
거기에다 패션 자신감은 무엇? 빨강 몸뻬 바지를 입고 다니길래 뭐라 했더니 '남이사!' 하길래 그래 네 멋에 살아라 했죠.
그러던 어느 날 내 눈에 비친 새호리기를 우연히 보게 된 누군가가 인간들이 보는 소셜미디어에 올린 후 언론에 기사가 나면서 내 눈을 찾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은 멸종위기 야생생물 2급이다 해서 관심들을 더 많이 가져주었지만 내게는 이제 여름이 기다려지는 이유가 된 빨강 바지 친구 새호리기.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네 삶이란 게 그래요. 움직일 수 없는 곳에 달려 있다 보니 늘 그날이 그날이죠. 주로 차들이 지나다니는 도로를 비추거나 아파트 단지를 기록하는 임무를 띠고 살아서 한시도 눈을 감을 수가 없어요. 좋은 일보다는 안 좋은 일을 더 많이 보게 되는 직업병도 있는데 나는 운이 좋게도 보령해저터널이 있는 국도 77호선 보령 방향을 비추는 역할로 이곳에 배치받았어요.
특별할 것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빨강 바지를 입은 새 한 마리가 찾아왔어요. 나보다 더 피곤한지 짙은 다크서클을 하고 왔어요. 뭔가 억울한 표정 같기도 하고요. 처음엔 멀리서 날아오느라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시간이 지나도 그런 걸 보면 원래 그런 모양이에요. 거기에다 패션 자신감은 무엇? 빨강 몸뻬 바지를 입고 다니길래 뭐라 했더니 ‘남이사!’ 하길래 그래 네 멋에 살아라 했죠. 이름이 뭔지나 좀 물읍시다 했더니, 새호리기라고 했어요. 새를 홀려서 잡아먹는다고 자랑을 하더라고요. 어쨌든 새끼를 키우겠다고 먼 나라에서 이곳 한국까지 오다니 참 대단하다 싶었죠.
올해는 맞은편 CCTV가 달린 철제 구조물에 까치가 지어놓은 둥지에 운 좋게 세를 얻었다고 해요. 암컷이 알을 품는 사이 수컷은 철제 구조물 앞에 자주 날아왔어요. 어느 날은 잠자리를, 어느 날은 매미를 잡아와 먹기도 했는데 얼마나 맛있게 먹던지 나도 한입 먹어보고 싶더라고요. 피곤한지, 와서 한참 졸고 가는 날도 있었고 그런 날은 기지개를 켜도 피곤이 가시지 않는지 참 안쓰럽더라고요. 나는 잘 모르겠지만 자식을 키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닌가 봐요.
새호리기는 발 없는 나에게 어느 날 뜬금없이 찾아와 세상 이야기를 전해주는 친구가 되었어요. 올 때마다 ‘때때때때때’ 하면서 뭐라고 하는데 처음엔 뭔 소린지 통 못 알아듣겠더니 내가 집요하게 쳐다보는 일을 하는지라 요샌 대충 뭔 말을 하는지 알겠더라고요.
그러던 어느 날 내 눈에 비친 새호리기를 우연히 보게 된 누군가가 인간들이 보는 소셜미디어에 올린 후 언론에 기사가 나면서 내 눈을 찾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내 눈을 통해 새호리기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랜선 탐조라나 뭐라나 하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그 녀석을 보려고 들락날락했어요. 심지어는 새호리기를 보려고 멀리서 오는 사람들도 생겼어요. CCTV로 살아오면서 이런 관심은 처음이었네요! 처음에는 수컷이 자주 보이다가 나중에는 암컷과 함께 보이기도 하더니 8월 중순이 넘은 어느 날 빨강 바지를 입지 않은 새호리기가 나타났어요. 나중에 들으니 새끼 세 마리가 태어났는데 어릴 때는 빨강 바지를 입지 않는다고 해요. 새끼는 피곤한지 부모보다 더 자주 졸았고 비가 내리는 날은 온몸으로 비를 맞고 앉아 있어서 얼마나 안쓰럽던지요. 어느새 새호리기한테 정이 들었는지 내 새끼 같은 마음이 들더라고요.
만나면 언젠가는 헤어진다고 했던가요. 언제까지나 함께할 것 같던 친구가 8월 마지막 날 이별을 고했어요. 내년에 다시 돌아온다는 말을 남기고요. 사람들은 멸종위기 야생생물 2급이다 해서 관심들을 더 많이 가져주었지만 내게는 이제 여름이 기다려지는 이유가 된 빨강 바지 친구 새호리기. 내년에 건강하게 꼭 만나자! 인간들에게도 내년에 새호리기가 돌아오면 소식 전해줄게요!
박임자 (탐조책방 대표) editor@sisain.co.kr
▶좋은 뉴스는 독자가 만듭니다 [시사IN 후원]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