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글을 꼭 써야 하는 3가지 이유
글쓰기는 혼자 있는 시간을 즐거움으로 채우고 집중력을 높여 준다
무엇보다 우울함을 줄이는 효과가 좋다
현대인의 생활 패턴과 정 반대로 나아가는 맛이 있다
글쓰기에는 분명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능력이 있다.
이미 많은 학회나 의학계에서는 글쓰기가 정신건강에 좋다는 말이 수도 없이 보고되어 왔고 지금도 그런 사실을 증명하는 글이 쏟아지고 있다. 나도 다독 다작 다상량이 좋다고 말만 들었지 어디에 어떻게 좋은지 몰랐다.
특히 글쓰기에서라면 더더욱 손사래 치던 나 아니던가. 글이란 건강검진 후 운동해라 금주해라와 같은 의사의 공회전하는 말쯤으로 생각했다. 적어도 2년 전까지는 그랬다.
글쓰기를 하면 어떤 점이 좋을까? 직장생활 13년 넘도록, 글이라고는 손도 대지 않던 내가 쓰기 시작하며 경험한 효능을 공개하고자 한다. 글쓰기가 홈쇼핑에 나오는 수분크림처럼 바르기만 해도 광택이 난다거나 누구나 가고 싶게 만드는 매력적인 여행지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평범한 직장인이던 내가 쓰기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듣고 나면 무조건 써야겠다 보다는 쓰기에 대한 거부감이나마 조금 덜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 아닌가? 글쓰기에는 초기 자본이 필요하다거나 장비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두 손과 연필 그리고 노트만 있으면 어디서든 쓸 수 있는 게 글이다.
첫 번째로 글쓰기는 우울함을 줄여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효과 중 하나. 활자가 머릿속에 스미며 부정적인 기운을 씻어내는 것은 아니다. 쓴다는 행위자체에 그 답이 있다. 글쓰기는 어떤 단어를 쓰고 전개는 어떻게 하며 또 결말은 어떻게 맺어야 할지를 끊임없이 묻고 답하는 여정의 기록이다.
이런 과정에서 자신과의 소통의 자리가 마련된다. 끊임없이 묻고 답하며 그간 모르고 살았던 감정의 형체를 매만질 수 있게 된다. 새로운 감정에 눈뜨고 그 감정은 다시 새로운 감각의 발달로 이어진다.
처음부터 있었지만 우리가 모르고 살았던 사실에 안타까워하면서도 앞으로의 삶에 대한 태도를 다르게 가져갈 수 있게 된다.
쓰는 동안에는 세상 그 어떤 불안함도 나와 공통점을 찾지 못했다. 이별에 대한 아픔을 바쁨으로 잊는다 했던가. 쓰면 그런 상황이 연출되었다. 쓰기를 시작하면 뇌는 그 뜻을 표현하기 위해 단어를 맞추고 배열한다. 그러면 내 머릿속 생각은 망각의 체망을 통과하기 시작한다.
잡념과 고집을 거르고 집념과 용서를 모았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말이 머릿속 어디서든 피어났다. 이게 용서고 관용이다 싶다가도 그런 생각에 매몰될 시간조차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에 글 쓰며 더 좋은 감정을 길어 올려야 할 시간도 부족했으니까. 혼자 미소 지었다. 글 쓰는 세상에는 걱정의 씨앗이 뿌리내릴 곳도 없을뿐더러 그럴 시간조차 허락지 않았다.
두 번째로 글쓰기는 혼자 있는 시간의 소중함을 알려준다.
나의 MBTI는 본디 ENFP. 앞자리가 E인 만큼 성격 또한 외향에 가깝다. 이렇다 보니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사람에게 받은 스트레스는 사람 사이에서 풀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러던 어느 날 코로나19 사태가 터졌다. 뉴스에서만 보던 중국의 봉쇄령이 내 주변에도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적잖게 놀랐다. 한국의 코로나 사망률은 0.13%. 다른 선진국에 비해 극히 낮았다.
그럼에도 걸리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체감상 훨씬 크게 다가왔다. 모든 인간관계에 적색불이 켜졌다. 매일 봐오던 사람이 서로가 서로를 병균처럼 보기 시작했고, 마스크 사이로 보이는 반쪽짜리 얼굴은 서로를 반신반의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나도 코로나가 주는 외로움의 중력에 자유롭지 못했다. 갑자기 끊겨버린 인간관계에 뇌세포가 매일 반틈씩 말라죽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빈자리는 이내 불안감으로 채워졌다. 밤에는 불면증에 시달렸고, 낮에는 쏟아져 내리는 눈꺼풀과 맞서 싸워야 했다.
나는 혼자 노는 법을 그간 몰랐던 거다. 티브이 보는 것도, 핸드폰만 만지는 것도 나와 적성에 맞지 않았다. 밖에 나가고 싶어도 내키지 않았다. 숨통을 94% 조여 오는 KF-94 마스크를 써야만 나갈 수 있었으니까.
나는 궤짝 같은 갑갑함 속에서 글쓰기를 시작했다.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몸부림이랄까? 글쓰기는 확실히 어려웠다. 쓰기는 읽기보다 10배는 더 어려워도 성취감은 100배 더 컸다. 뽀얀 백지에 빼곡하게 채워진 내 활자를 보는 것만큼 뿌듯한 일은 없었다.
학창 시절 재생용지에 반성문 쓰고 또 쓰며 자신이 닳아 없어지는 느낌과는 차원이 달랐다. 나도 글을 쓸 수 있구나라는 생각은 날으는 양탄자를 얻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깜깜하고 답답해도 글만 쓰면 어디든지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은 그간 막혀있던 숨통에 찬바람을 넣어주는 격이었다.
나는 이제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다. 오히려 혼자를 더 선호한다. MBTI 첫째 자리가 E에서 I로 변하기까지 했다. 혼자서 속닥속닥 글 쓰며 단어를 들고 다니는 재미에 푹 빠졌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쓰든 간에 나와 나누는 대화의 장은 항상 열려 있었으니까. 40여 년을 같이 살아도 쓸 때마다 새롭다는 감각은 글쓰기 늦깎이에게 삶의 의미를 새로이 부여해 줬다. 프라이팬에 꾸덕하게 늘어 붙어 타들어가기만 하던 내 삶도 쓰기를 만나니 다시 시작할 수 있을듯한 느낌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반 강제적으로 주어지는 혼자만의 시간도 지금 생각하면 나쁘지많은 않은 거 같다. 뉴턴도 아인슈타인도 코로나처럼 질병에 의해 격리되면서 그 새로운 차원에 수식을 발견할 수 있었으니까.
셋째 글쓰기는 집중력을 키워준다.
나의 집중력은 고등학교 시절 이후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더 이상 지문을 읽고 답을 찾아야 할 이유가 없었고 그로 인해 이루고자 하는 목적도 없었다. 성인의 부산스러움을 만끽하며 지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중독성을 높여가는 디지털의 편의성은 이제 몸에 해롭기까지 할 정도.
운영체게 Windows에서 ALT + TAB을 누르면 새로운 창으로 전환되는 현상은 이제 컴퓨터 안에서만 국한되는 현상이 아니었다. 걸으면서 노래를 듣기도 하고, 노래를 들으며 뉴스도 게임도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멀티태스킹은 우리의 집중력 분산을 요구했다. 오히려 집중력 사이를 벌려 자신의 제품 광고를 밀어 넣겠다는 심상일지도 모를 노릇이다.
테이블 위에 쉴 새 없이 발악하는 스마트폰을 본다. 문자, SNS, 광고, 게임, 오만가지 일들의 매듭을 사사건건 알려준다. 이런 소란스러움 덕분에 우리의 집중력은 점점 더 야위어간다. 학회 발표 자료에 따르면 뇌가 외부 요인에 의해 집중력을 상실할 경우 다시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23분이 걸린다 한다. 우리는 그 23분 동안 방해받지 않고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할 자신이 있는가? 아니면 23분 동안 한 가지 일을 하지 못해 집중력을 영원히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쓰지 않는 근육이 퇴화하듯 집중력도 언젠가는 서서히 퇴화하다 진화의 과정 중에 떨어져 나갈지도.
쓰기는 자연스레 집중력을 길러준다. 잘 쓰다가도 앞에 내용이 생각나지 않으면 앞으로 돌아가 다시 읽어야 하고, 앞에 내용을 읽다가도 뒤에 쓴 글이 기억나지 않으면 방금 쓴 글을 읽어야 했다. 문장을 기억해야 단어를 들고 다니며 고칠 수 있었고, 문단을 기억해야 문장을 들고 다니며 글을 써낼 수 있었으니까. 세상에 반복 보다 효율적인 학습방법이 있을까?
아무리 집중력이 낮아도 글 몇 편 쓰며 고치다 보면 어떤 생각이 어디에 묻어나고 어떤 단어가 있는지 즈음은 금방 외울 수 있다. 글은 생각의 사진을 촬영해 현상하는 일이다. 몸이 기억하고 있는 형체를 오만가지 감각을 통해 겨우 알아차릴 수 있다. 집중력과 그에 걸맞은 기억력이 없으면 글 한편을 완성할 수가 없는 이유가 이 때문인 것이다.
지금껏 내가 글도 잘 모르는 내가, 무턱대고 글 쓰며 느낀 점을 끄적여 봤다. 처음부터 겁먹고 포기할 필요는 없다. 반성문 이후 수십 년간 글 한편 안 써봤던 나도 지금 황금 같은 주말에 쭈그리고 앉아 글만 쓰고 있으니까. 자신의 흐름에 맞게 천천히 쓰면 된다.
한 달에 한편이라도 쓰는 사람은 수십 년간 한 편도 안 쓰는 사람보다 수백 수천 배 더 마음이 젊어진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글/이눈비 필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