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약 당첨됐지만 계약금 없다는 비정규직 웹디자이너의 고향 방문

▲ 영화 <은빛살구> ⓒ (주)마노엔터테인먼트

한국영화아카데미(KAFA)가 2025년 처음 선보인 신작 <은빛살구>는 비정규직 웹디자이너 '정서'(나애진)가 아파트 청약 계약금을 구하기 위해 이혼한 아버지 '영주'(안석환)를 찾아 강원도 동해시로 향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장만민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자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호평받은 기대작으로, 지난 1월 11일에 진행된 '유지태와 함께하는 독립영화 보기' GV에서도 "가족 관계의 이중성을 섬세하게 포착했다"라는 유지태의 평을 받으며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인정받고 있다.

<은빛살구>라는 다소 낯선 제목은 영화의 본질을 함축적으로 담아낸다.

장 감독은 이혼한 엄마의 차용증을 들고 자식이 아버지에게 돈을 받으러 간다는 플롯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초고의 제목은 '차용증'이었다고 소개했다.

감독은 "망해가는 곰치국 식당에서 벌교횟집으로 바꿀 때 작성하게 된 '차용증'은 매일의 노동으로 빚은 가족의 시간을 실없는 투기로 사라지게 한 '영주'의 색소폰에 붙여진다.

이 색소폰은 '미영'이 '영주'를 사랑해서 선물했고, 그 사랑으로 태어난 '정서'는 어릴 적부터 해변에서 연주하는 아버지의 연주를 듣고 자랐다"라면서, '차용증이 붙이 색소폰'으로 2고의 이름을 바꾸게 됐다고.

하지만 촬영을 마치고, 편집하는 과정에서 영화의 이름은 지금의 <은빛살구>가 됐다.

장 감독은 "편집된 장면이긴 하지만 '너도 니 냄새 피우면서 살고 싶지 않냐?'라고 '정서'에게 건네는 '영주'의 대사가 떠올랐다"라고 소개했다.

이어 그는 "30년은 되어야 열매를 맺고, 자기 냄새를 피우며 떳떳하게 살아가는 은행나무처럼 '정서'가 자신의 향을 이루기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라고 <은빛살구>를 최종 이름으로 선택하게 됐다.

돈과 노동으로 이뤄지고 무너진 가족의 시간 속에서, 자신만의 향기를 찾아가는 여정이 바로 이 영화의 중심축인 것.

그렇게 <은빛살구>는 현재 대한민국 청년들이 마주한 현실을 섬세하게 담아낸다.

계약직 웹디자이너로 일하며 부업으로 웹툰을 그리는 '정서'의 모습은 'N잡러'가 된 청년세대의 자화상이다.

여기에 결혼을 앞두고 아파트 청약에 당첨되었지만, 계약금조차 마련하기 힘든 상황은 현재 부동산 시장에서 고군분투하는 청년들의 모습과 정확히 포개진다.

특히 장만민 감독은 이러한 사회적 맥락을 개인의 욕망과 절묘하게 연결한다. "아파트를 갖고 싶은 마음이 원래 자기의 것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에 영향을 받아 생긴 것"이라는 장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제도와 문화가 심어준 욕망의 실체를 날카롭게 파고든다.

강원도 동해시 묵호항이라는 공간적 배경은 단순한 로케이션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고요한 바다와 도심이 공존하는 이 공간은 정서의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장소다.

특히 가족의 역사가 깃든 곰치국 식당이 '벌교횟집'으로 변모한 것은 시대의 변화와 가족의 변천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장만민 감독은 "동해시가 고향이라는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곳이자, 한편으로는 공사 중인 아파트, 교회, 시장과 공장이 있는 친숙한 평범함을 가진 도시"라고 소개했다.

<은빛살구>는 등장인물 각각의 결핍과 욕망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서울에서 정착을 꿈꾸는 '정서',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영주', 음악인의 꿈을 안고 사는 '영주'의 이복동생 '정해'(김진영), 새 가정을 지키려는 '영주'의 현 처 '주희'(최정현), 그리고 권리금을 모아 가게를 차리려는 '영주'의 친엄마 '미영'(박현숙)까지.

이들의 욕망은 서로 충돌하고 얽히면서 이야기를 추동한다.

"니네 엄마가 오빠 버린 거야"라는 '주희'의 대사나, "착하게 살면 맛이 없지"라는 '영주'의 말은 각 인물의 욕망이 얼마나 날것으로 드러나는지를 보여준다.

<은빛살구>가 가장 돋보이는 지점은 현실과 환상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연출이다.

특히 뱀파이어 시퀀스는 단순한 판타지가 아닌, 정서의 무의식과 가족들의 욕망을 중첩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피를 갈구하는 뱀파이어처럼 각자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서로를 물어뜯는 가족의 모습은, 관객들에게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한다.

여기에 싱어송라이터 김사월이 음악감독으로 참여해 완성한 사운드트랙은 영화의 분위기를 한층 깊이 있게 만든다.

'누구의 피가 진짜 맛있는지', '거북이 생일', '뱀파이어' 등의 곡들은 영화의 주제의식을 강화한다.

한편, '정서'를 맡은 신예 나애진은 이번 작품으로 전주국제영화제 배우상을 받으며 존재감을 입증했다.

"서울에서 연기 활동을 하며 겪었던 삶의 궤적과 정서가 많이 맞닿아 있다"는 나예진의 말처럼, 캐릭터와 배우의 진정성 있는 만남이 빛을 발한다.

나애진 배우가 언급했듯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본인을 위한 선택을 내리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용기가 필요한 일인지" 깨닫게 하는 <은빛살구>는, 단순한 가족 드라마를 넘어 우리 시대의 자화상을 그려낸다.

욕망과 결핍으로 가득한 시대, <은빛살구>는 우리에게 진정한 '뿌리'란 무엇인지 다시 한번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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