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인 학살 사과 안해도 돼요...우리가 전쟁 이겼잖아요” [신짜오 베트남]

홍장원 기자(noenemy99@mk.co.kr) 2023. 2. 11.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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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피해 목격자인 응우옌득쩌이 씨(오른쪽)이 지난해 8월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대회의실에서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국가배상 소송 법정 진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신짜오 베트남 - 232]얼마전 베트남전쟁 관련 의미있는 판결이 나왔습니다.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따른 피해를 한국 정부가 배상해야 한다는 법원의 1심 판단이 나온 것입니다. 이 판결은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대한 우리 정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첫 사례입니다.

쟁점이 된 사건은 1968년 2월 벌어졌습니다. 당시 한국군 해병 제2여단 군인들이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현 퐁니 마을에서 70여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입니다. 당시 살아남은 소녀가 성인이 되어 2020년 4월 ‘한국 정부가 배상하라’는 취지의 소송을 냈는데, 1심 판결은 대부분 이 피해자의 주장을 받아들였습니다.

1심 재판부는 “당시 해병 제2여단 1중대 군인들이 원고 집에 이르러 실탄과 총으로 위협하며 원고 가족들이 밖으로 나오게 한 뒤 총격을 가했다. 이로 인해 원고의 가족은 현장에서 사망했고 원고 등은 심각한 부상을 입은 사실이 인정된다. 원고의 모친은 외출 중이었는데, 군인들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한곳으로 강제로 모이게 한 뒤 그곳에서 총으로 사살한 사실도 인정할 수 있다. 이 같은 행위는 명백한 불법 행위다”고 판시했습니다.

이번 판결은 베트남 현지에서도 보도를 통해 알려졌습니다. 남북으로 갈려 치열한 전쟁을 벌였던 전쟁은 베트남에서도 상처이기에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런데 베트남 현지 반응이 한국에서 가진 고정관념과는 좀 다릅니다. 한국을 비난하는 댓글이 꼬리에 꼬리를 달고 이어지는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베트남에서 한국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비난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전쟁 범죄는 인간이 저지르는 가장 끔찍한 범죄중 하나다”, “우리들은 한국 영화를 통해서 한국이 낙원이라고만 알고 있다. 하지만 역사의 어두운 구석이 있다. 한국이나 베트남의 사랑 이야기만 영화로 만들지말고 80·90세대를 위해 이런 영화를 만들어라”, “한국인은 베트남전쟁 참전이 세계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서였다고 알고 있는데 이건 바꿔야 한다” 등의 댓글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댓글을 꼼꼼히 읽어보면 ‘과거를 묻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내용이 상당히 많이 보입니다. “동정심을 미래로 가져와 지속적인 우정을 쌓자”, “과거는 닫혀 있지만 진실은 항상 진실이어야 한다. 우정과 협력이 베트남과 한국을 더 가깝게 만들기를 바란다”, “6년전에 베트남에 있는 한국 회사를 다녔는데 한국 사람들이 미안하다고 했다”는 댓글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해병 청룡부대가 1965년 파병을 위해 부산항을 떠나는 모습. <연합뉴스>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과 싸운 한 군인으로 추정되는 사람도 글을 올렸습니다. “1964년부터 1975년까지 직접 싸운 군인으로서 과거의 고통을 잊을 수 없지만 증오를 가지고 가면 무엇을 해결할 수 있나. 우리의 자녀와 손자 손녀에게 좋은 미래를 기대하게 해야 한다. 과거를 잊지 말되 불행한 기억은 일시적으로 닫아 새로운 삶을 구축하자”는 제언입니다.

심지어 “정말로 우리 베트남 사람들은 사과가 필요하지 않다. 이야기는 끝났다. 우리는 그것을 놓아야한다”는 댓글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베트남 정부의 공식 입장 역시 ‘과거를 제쳐두고 베트남이 한국과 협력해 전략적 관계를 발전시키고 전쟁의 결과를 극복하기를 원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베트남 중부 관광도시 냐짱 전경. <게티이미지뱅크>
한국인 특유의 ‘한(恨)의 정서’는 베트남에는 없는 것일까요. 저는 베트남 체류 당시 베트남 전쟁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한 원로 언론인과의 만남 이후 상황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그는 구순이 넘은 백발의 할아버지였습니다. 만나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던 중 주제가 베트남전쟁으로 넘어갔습니다. 저는 잔뜩 긴장하며 ‘한국이 베트남전쟁 당시 잘못한 게 많았다고 들었다’는 얘기를 꺼내려했는데, 그는 저에게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당시 그가 전한 말은 이랬습니다.

“과거 전쟁할 때 우리는 그래도 이겨서 나라가 통일을 했다. 하지만 한국은 아직까지 통일을 못하지 않았느냐. 일이 잘 되어서 한국도 통일의 길을 이루기 바란다.”

저는 순간 머리가 멍해지는 듯 했습니다. 위로하는 것은 그였고 위로받는 건 저였습니다. 베트남은 전쟁에서 이긴 나라고, 한국은 진 나라였습니다.

흩어져있던 퍼즐이 하나로 맞춰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베트남의 정서를 한줄로 요약하면 이런 것일 겁니다. ‘한국 너네들이 그때 잘못한 것은 맞지. 하지만 우리가 이겼고 너네들은 졌으니 이긴 우리가 잘못을 용서해준다.’

베트남전을 바라보는 베트남의 여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이겼다고 생각하는 쪽에서는 ‘한의 정서’가 자리잡을 공간이 없었던 셈이었습니다.

실제 베트남 정부가 1992년 한국과 수교할 이후부터 베트남 전쟁 관련 이슈에 대해 ‘승전국 입장에서 굳이 사과 받을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한국이 사과하지 말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과거 벌어진 잘못된 일을 사과한다고 국격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사과하지 않는다고 국격이 올라가지도 않습니다. 과거를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성숙한 대한민국이 취해야 할 자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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