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로그 – 대선수를 키워낸 명장
리오 듀로서(1905~1991)라는 인물이 있다. 뉴욕 양키스, 브루클린 다저스 같은 명문 팀에서 뛰던 유격수다. 올스타로 3번 뽑혔다. 그렇다고 대단한 실적을 남긴 선수는 아니다.
대신 은퇴 이후가 더 주목받는다. 감독으로 보낸 시간이 길고, 화려했다. 다저스와 자이언츠, 컵스, 애스트로스 등을 지휘했다. 재임 기간이 23시즌이다. 그동안 월드시리즈 우승을 4번 차지했다. 1994년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캐릭터는 확실하다. 뜨겁고, 직선적이다. 마음에 안 맞으면 가차 없다. 동료, 심판, 관중을 가리지 않는다. 일단 들이받고 보는 스타일이다. 퇴장 많이 당한 걸로는 당할 사람이 없다. 감독하면서 95번이나 쫓겨났다. 당대 1위, 역대로도 3위에 꼽힌다.
후세에 남긴 자서전이 유명하다. ‘Nice Guys Finish Last’라는 제목이다. ‘사람 좋으면 꼴찌’라고 번역됐다. 이건 실제로 그가 한 말이다. 자이언츠 감독 취임 때였다. 쫓겨난 전임자(멜 오토)를 향한 경멸의 대사였다.
까칠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그가 위대한 리더로 기억되는 순간이 있다. 최고의 선수를 데뷔시키고, 키워냈다는 업적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윌리 메이스(1931~2024)다. 바로 오늘 얘기의 주인공이다.

맨발로 외야를 주름잡는 18살
1947년은 MLB의 역사를 바꾼 해다. 재키 로빈슨의 데뷔가 이뤄졌다. 이후 니그로 리그에 대한 시선은 완전히 달라졌다. 특히 스카우트들이 바빠졌다. 그들에게는 이제 노다지가 가득한 금광이나 다름없었다.
윌리 메이스도 그중 하나다. 16살 때부터 남달랐다. 몸집은 작은데 펄펄 날아다닌다. 성인이 된 뒤에도 178cm, 77kg의 체격이었다. 아마 이 무렵은 더 작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미 여럿이 눈독을 들였다.
그러던 18살 때다. 다저스가 가장 적극적이었다. 그런데 스카우트 한 명의 보고서가 멈칫거리게 했다. ‘치고, 달리는 건 수준급. 그런데 결정적 취약점이 있음. 커브볼에 꼼짝도 못 함.’ 후세에는 인종차별적 시선을 가진 담당자의 리포트였다는 말도 전해진다.
답답한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이번에는 자이언츠가 관심을 보인다. 에디 몽테뉴라는 스카우트가 경기장을 찾았다. 본래 목표는 다른 선수였다. 그런데 현지에서 눈이 휘둥그레진다.
“1루수 알론조 페리를 보러 갔어요. 그런데 엄청난 선수가 나타난 거예요. 곧바로 전화를 걸었어요. 그리고 이렇게 소리쳤죠. ‘이봐 리오, 대단한 녀석이 하나 있어. 맨발로 뛰는데, 외야로 가는 공을 모조리 잡아내고 있어.’”
전화를 받은 사람은 감독이다. 바로 프롤로그에서 말한 리오 듀로서다.
계약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사이닝 보너스가 4000달러였다. 현재 가치로 20만 달러(약 2억 7800만 원) 정도다. 월급은 250달러였다. 요즘으로 환산하면 1만 2500달러(약 1700만 원)다. 신발 사기도 어렵던 그에게는 엄청난 거액이다.

영화 상영이 중단되고 긴급 장내 방송
출발은 마이너리그였다. 처음에는 아이오와주의 수시티(Sioux City) 팀으로 배정됐다. 그런데 마침 인종 문제가 일어났다. 백인 묘지에서 흑인이 장례를 치른 게 화근이었다. 여론이 매일 들끓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메이스가 뛰는 건 불가능했다.
별수 없이 트렌튼으로 가야 했다. 물론 따가운 시선은 여전했다. 그쪽 리그의 첫 흑인 선수였기 때문이었다. 훗날 당사자의 기억이다. “그라운드에 나가면 관중석 여기저기서 비웃음이 들렸죠. ‘검둥이 녀석’ 같은 말은 흔한 일상이었어요.”
팀에서도 마찬가지다. 백인 선수들과는 한 호텔에 묵을 수 없다. 길 건너편에 흑인 전용 호텔을 잡아야 했다. “새벽 1~2시쯤 백인 선수들이 몰래 놀러 왔어요. 창문을 통해 들어와서 아침까지 있다가 갔죠.”
그러던 어느 날이다. 마침, 경기가 없어 극장에 갔다. 그런데 갑자기 영화 상영이 중지된다. 불이 켜지며, 장내 방송이 나왔다. “윌리 메이스 씨 계시면 빨리 숙소로 연락 바랍니다.”
무슨 일이지? 호텔로 돌아갔더니 (마이너리그) 감독이 기다리고 있다. 환하게 웃으며 “축하해. 전화 왔어. 너 올라 오래.” 메이저리그 콜업 소식이다.
소리 지르고, 펄쩍펄쩍 뛰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당사자는 시큰둥하다. 아니 뭔가 겁먹은 표정이다. 그러더니 뜻밖의 말을 내뱉는다. “저 거기 가기 싫어요. 메이저리그 감독님에게 못 간다고 전해주세요.”
이건 또 무슨 황당한 일인가. 설득도 안 통한다. 어쩔 수 없다. 본인들끼리 직접 얘기해야 한다. 메이저리그 감독(듀로서)과 마이너리그 애송이가 직접 통화한다.
감독 “왜 오기 싫다는 거야?”
애송이 “안 돼요. 제가 어떻게 메이저리그 투수 공을 쳐요. 자신 없어요.”
어이가 없다. 헛웃음이 나온다.
감독 “너 지금 거기서 타율이 얼마니?”
애송이 “4할 7푼 7리요.” (당시 16게임 연속 안타에 장타율도 0.799를 기록 중이었다.)
감독 “대단하네. 여기 오면 얼마나 칠 것 같니?”
애송이 “글쎄요. 한 2할 5푼 정도나 될까요?”
감독 “그래. 그 정도면 충분해. 겁먹지 마.”

13연속 무안타에 눈물…감독의 불호령
어쩔 수 없다. 콜업은 이뤄졌다. 그런데 애송이의 걱정은 현실이 됐다. 데뷔 첫 12타석 동안 무안타에 시달렸다. 다행히 첫 홈런이 터졌다. 상대가 워렌 스판이다. ML 역사상 최고의 좌완으로 불리는 투수다.
이제는 좀 나아지겠지. 하지만 쉽지 않다. 또다시 13타석 동안 헛손질만 한다. 급기야 클럽 하우스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에 까칠한 감독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이런 약해 빠진 녀석.”
물론 그렇게 끝날 리 없다. 그랬다면 ‘더 캐치(The Catch)’는 탄생할 수 없었다.
듀로서는 곧 정색한다. 그리고 이렇게 달랜다. “내가 자이언츠의 감독으로 있는 한 우리 팀 중견수는 바로 너야. 그건 절대로 변하지 않아. 넌 내가 본 최고의 외야수야. 그걸 의심하면 안 돼.”
그걸로 끝이 아니다. 한 가지 중요한 팁을 준다.
“유니폼을 입을 때 말이야. 바지를 조금 더 위로 올려서 입어봐.”
그때는 아마 170cm가 조금 더 됐을 것이다. 스트라이크 존에는 유리한 키였다. 그걸 최대한 이용하라는 조언이다. 그리고 그 말은 효험이 있었다. 이후 33타수 14안타(0.424)를 치며 완전히 살아났다.
날이 갈수록 좋아진다. 20살짜리 타자는 점점 안정을 찾았다. 시즌 최종 기록은 0.274-0.356-0.472(타출장)였다. 홈런 20개를 넘기며, OPS는 0.828이었다. 그해 신인상을 수상했다.
본격적인 활약은 군 복무(1953년)를 끝낸 다음부터다. 스물셋의 나이가 됐고, 몸도 조금 커졌다(178cm, 77kg). 1954년 시즌부터 크레이지 모드를 시작한다. 41홈런에 OPS 1.078을 기록했다. MVP 투표에서 단연 1위를 차지했다. 첫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도 손에 넣었다.
그 뒤로 19년 내리 올스타로 뽑혔다. 골드글러브도 12년 연속 차지했다. 늘 MVP급 활약을 펼쳤다(두 번째 수상은 34세 시즌은 1965년). 통산 홈런은 660개다.

샌프란시스코의 냉대
그의 나이 27세(1958년) 때다. 큰 변화가 생긴다. 팀의 연고지가 바뀐 것이다. 자이언츠가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옮겼다. 당연히 선수들도 집을 새로 알아봐야 한다.
그 무렵의 메이스는 리그 최고의 스타였다. 연봉도 10만 달러 정도였다. 지금으로 따지면 400~500만 달러 가치다.
가족을 위해 괜찮은 동네를 알아봤다. 마음에 드는 집을 찾았다. 금액도 얼추 맞췄다. 계약서도 작성했다. 그런데 이사를 앞두고 문제가 생겼다. 부동산 중개인이 계약 파기를 요청한 것이다.
이유가 황당하다. 이웃 주민들의 반대가 맹렬했다. ‘흑인이 이사 오면 동네 집값이 떨어진다. 절대 안 된다.’ 이 얘기는 큰 사회 문제로 번졌다. 유력지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이 1면 톱기사로 다룰 정도였다.
마침 얼마 전에 (구) 소련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가 미국을 방문했다. 뉴욕과 LA 등 주요 도시를 순회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마켓에 들러 시민들의 환대를 받았다. 이를 빗댄 조롱이 빗발쳤다.‘ 흐루쇼프를 그렇게 환영한 도시가 윌리 메이스에게는 싸늘하기 짝이 없다.’
결국 시(市)가 나섰다. 조지 크리스토퍼 시장이 사과 성명을 냈다. 그러면서 기막힌 대안을 제시했다. “일이 해결될 때까지 메이스 부부가 얼마든지 우리 집에 와서 함께 살아도 좋다.” 실제로 집에서 만찬을 함께 하기도 했다.
며칠 뒤 집주인이 무릎을 꿇었다. 계약이 이뤄지고, 입주가 성사됐다. 새로 이사한 다음 날이다. 그의 집 창문으로 벽돌이 날아들었다. 못된 도시의 ‘뒤끝’이었다.

‘아버지 같은’ 듀로서의 곁으로
샌프란시스코가 냉대했던 그는 14년을 그곳에서 뛰었다. 그러면서 프랜차이즈 최고의 스타가 됐다. 그들은 재정 악화로 41세의 노장을 메츠로 트레이드시켰다(1972년). 그러면서 그의 24번은 아무도 달 수 없는 번호가 됐다.
지금도 홈구장 오라클파크 앞을 지키는 동상이 있다. 중견수가 혼신을 다해 공을 뿌리는 모습이다. 그 주인공 윌리 하워드 메이스 주니어가 이틀 전(한국시간 19일) 잠들었다. 그리고 첫 감독이자, 아버지 같았던 듀로서의 곁으로 떠났다.
“누군가 4할 5푼을 치고, 100개의 도루를 성공시켰다고 합시다. 그리고 매일 기적 같은 플레이를 한다고 칩시다. 그래도 나는 그 사람 앞에서 눈을 똑바로 뜨고 이렇게 말할 겁니다. ‘이봐요. 아무리 그래도 당신은 윌리(메이스) 뒤꿈치도 못 따라갑니다.’ 그는 존재만으로 그라운드를 환하게 빛나게 만들죠. 카리스마가 가득한, 그야말로 슈퍼, 슈퍼 스타란 그런 선수죠.”
리오 듀로서가 자서전에 남긴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