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화재 위험 확 줄인 꿈의 배터리, 한국 스타트업이 개발했다
에이에스이티 박석정 대표
전기차 구매를 망설이는 가장 큰 이유는 ‘화재’다. 화재 발생률 자체는 그렇게 높지 않지만, 배터리에 한번 불이 나면 다른 장치로 쉽게 불이 옮겨붙어 걷잡을 수 없다. 폭발하는 사례도 더러 있다.
에이에스이티의 박석정 대표(41)는 LG화학, 현대자동차, 르노자동차에서 전지 개발 연구원으로 일했다. 15년간 배터리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지만, 전기차를 구매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화재 우려 때문이다. 안심하고 탈 수 있는 전기차를 만들고 싶어서 차세대 배터리를 개발한 박 대표를 만나 창업기를 들었다.
◇잘나가던 LG화학, 현대자동차 연구원을 그만두고 선택한 길
박 대표는 2006년 인하대 재료공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 신소재공학과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8년 석사 졸업 후 전자 재료 제조 기업 경원산업을 거쳐 LG화학, 현대자동차, 르노자동차에서 15년간 전지 생산을 담당했다. “대기업에서 여러 번 세계 최초의 전지를 개발했어요. LG에너지솔루션 전신인 LG화학에서는 리튬이온 배터리보다 저렴하고 안전한 나노입자 활물질(LFT) 배터리를 개발했죠. 현대자동차에서는 수소 전기차 투싼, 넥쏘에 쓰이는 수소연료전지를, 르노 자동차에서는 친환경 차세대 배터리팩을 만들었습니다.”
창업을 위해 2020년 르노자동차에서 퇴사했다. “안정적인 대기업 연구원 자리를 관뒀을 때 주변에서 반대부터 했다. “다들 퇴사를 뜯어말렸어요. 그럴 때마다 대기업에서 제가 낸 성과를 증명하며 제 사업도 잘할 수 있다고 설득했어요. 제가 이루어낸 결과가 있으니 결국 믿어주더라고요.”
에프씨엠티라는 수소연료전지 개발 기업을 공동 창업해 부대표로 일했다. “자동화 양산 라인을 구축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전지 분야에만 15~20년 이상 근무한 전문가들로 구성돼 양산 설비를 빠르게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설립 3년 만에 중소벤처기업부에서 핵심 기술을 인증받은 벤처 기업으로 성장했죠.”
그러던 중 전고체 배터리를 개발하고 있던 대학원 선배 장보윤 박사에게 솔깃한 제안을 받았다. “차세대 배터리로 알려지기 시작한 복합계 전고체 전지 사업화를 제안하더군요. 연구하고 싶은 주제였어요. 연구자라면 모두 공감할 텐데요.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를 구상해도 이를 현실에 적용하지 못하면 소용없습니다. 대기업에서 배터리 양산 시설을 구축해 본 저의 경험이 사업화에 도움이 될 거라 판단했습니다. 합류하기로 했죠.”
◇화재 걱정 없는 전기차라는 꿈
그가 두 번째 창업을 통해 해결하고 싶었던 문제는 전기차 화재다. “어느 날 뉴스를 통해 전기차 배터리 폭발로 인한 화재 소식을 접했어요. 뉴스에서는 안전하게 피신하는 게 중요하다는 식으로 보도하더라고요. 하지만 폭발의 원인인 배터리를 안전하게 만드는 게 우선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전기자 화재는 전기차 보급을 가로막는 가장 큰 요인이기도 했어요. 전기차의 화재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게 급선무였죠. 전기차 대중화에 도움이 될 안전한 배터리를 직접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2023년 8월, 전기차용 이차전지 개발사 에이에스이티를 설립하고 차세대 배터리 개발에 들어갔다. “기존 전지의 문제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습니다. 전기차의 고질적인 문제는 화재였어요. 전기차 화재가 무서운 이유는 불이 쉽게 안 꺼지기 때문이에요. 배터리 내부에 불이 한번 붙으면 순식간에 다른 부품에 불이 옮겨붙습니다. 화재를 완전히 진압하기까지 5시간 이상이 걸리기도 해요. 불이 잘 붙지 않는 소재로 배터리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재활용되지 못하고 버려지는 배터리 문제도 해결하고 싶었다. “전기차 배터리는 수명이 20%만 줄어도 버려집니다. 반대로 말하면 80%나 남아있지만 못 쓰는 거죠. 혹시라도 불이 붙어 폭발하면 책임을 질 사람이 없어 다른 산업군에서도 재사용되지 못합니다. 폭발 걱정 없이 안전하게 재활용할 수 있는 배터리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대부분의 전기차 배터리는 양극과 음극, 그리고 음양의 이온이 이동하는 통로인 액체 전해질로 구성된다. 전기차 화재가 발생하는 이유는 배터리를 충전할 때 음극 표면에 뾰족한 모양의 결정체가 생기는 ‘덴드라이트’ 현상 때문이다. 결정이 분리막을 통과하게 되면 양극과 음극이 닿아 화재가 발생한다. “잘 움직여서 덴드라이트 현상이 발생하기 쉬운 액체 전해질 대신 쉽게 움직이지 않아 분리막이 필요 없는 고체 전해질을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분리막이 없어 확보된 공간만큼 에너지의 밀도가 높아져 한 번에 많은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거든요.”
위험한 소재는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황화물계는 고체 전해질의 소재 중 하나입니다. 동전 크기로 만들 수 있어 성능 검증이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죠. 하지만 공기 중에 있는 수분과 만나면 황화수소 가스를 배출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어요. 황화수소 가스에 사람이 1000ppm 농도로 1분만 노출돼도 식물인간 상태, 심각하면 사망에 이를 수 있어 다루기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황화물계 대신 산화물계와 고분자계를 결합한 새로운 복합계 전고체 전지를 개발했다. “산화물계는 비교적 안전하고 공정비용이 낮지만 쉽게 깨지고, 고분자계는 가격이 저렴하고 충격에 잘 버티지만, 배터리의 성능을 저해해 전고체 전지 소재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응용 가능성이 많은 소재라고 생각했어요. 두 소재를 결합해 단점을 보완했습니다. 고분자계-산화물계-고분자계 삼중 구조 필름 형태로 복합 고체 전해질을 만들었어요. 전해질을 세 겹의 필름 형태로 구현해 안전성과 내구성을 잡은 거죠. 가격 경쟁력도 확보했습니다.”
안정성을 확보한 복합계 전고체 전지는 완성차뿐만 아니라 다른 시장에도 적용 가능하다. “에너지 밀도를 높여 가벼워진 배터리는 소형 모빌리티에도 적용할 수 있어요. 대표적인 소형 장치인 드론은 가벼울수록 성능이 좋다고 평가해요. 하늘을 나는 장치는 공기의 저항을 많이 받으면 연비가 낮아지거든요. 급격히 변화하는 온도도 문제가 돼요. 하늘 높이 올라가면 온도가 영하로 떨어져 배터리 잔량이 급격히 줄어드니까요. 배터리가 가볍고 온도 변화에 제약받지 않는 차세대 배터리는 소형 모빌리티 시장 발전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기존에 없던 차세대 배터리
세상에 없던 배터리를 만드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아이디어로만 존재하고, 아직 손에 잡히지 않는 대상을 설명하는 일은 지난했다. 초기 스타트업이라 큰 투자를 받는 게 현실적으로 어려워, 부품 구매조차 부담됐다. 그러다 작년 12월에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과 기술 협약을 맺고 연구 지원을 받게 됐다. 드디어 한숨 돌리게 된 것이다.
안전성 테스트도 완료했다. 에이에스이티의 배터리는 0~7단계로 평가되는 안전성 테스트(Hazard Level)에서 Level 5를 받았다. 숫자가 높을수록 위험성이 크다는 의미다. 기존 중대형 배터리가 폭발 위험 단계인 Level 7을 받은 것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안전한 편이다.
난연성 물질인 고체 전해질로 만들어 가연성 액체 전해질보다 불이 크게 나지 않는다. “온도가 지나치게 낮거나 높은 환경에서도 안전하게 구동된다는 점을 인증받았습니다. 60도 이상 고온의 환경에서만 충전할 수 있었던 다른 전고체 전지와 달리 25도 상온에서도 구동할 수 있어 친환경 전기차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낮은 온도에서 충전할 수 있으니 냉매 장치의 크기도 작아져 에너지를 더 많이 충전할 수 있어요. 결론적으로 주행 거리를 늘릴 수 있죠. ”
국가에서 시행 중인 전기차 지원 정책의 도움도 받았다. “정부는 2028년까지 차세대 배터리 사업 지원에 1172억원을 투입한다고 밝혔는데요. 이 발표 자체가 차세대 배터리 개발을 위한 좋은 흐름을 만들어줬다고 생각합니다. 기술 협약을 맺은 한국에너지기술원도 정부 지원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등 혜택을 받고 있어요. 내년에는 에이에스이티도 적극적으로 프로젝트에 참여할 예정입니다.”
◇우리나라 이차 전지 시장을 책임지는 1등 기업
차세대 배터리 개발 기업과 공동 연구에 착수할 계획이다. 배터리 시장의 주요 기업과 서로 수요를 확인한 상태다. 투자 유치도 확정됐다. 지난 8월 신용보증기금이 지원하는 스타트업 네스트(Start-up NEST) 15기에 선정돼 5억원을 투자받을 예정이다. 이차전지 개발 기업 에코프로가 설립한 에코프로파트너스 벤처기업에도 선정됐다.
지난 6월에는 은행권청년창업재단(디캠프)의 창업경진대회 디데이 본선에 진출했다. 소프트웨어, 플랫폼이 대부분인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제조업이라는 차별점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공장을 지어서 사업하고 있는 스타트업은 에이에스이티가 유일했어요. 배터리 제조 현장에서 15년 이상 일하면서 체득한 노하우 덕분에 빠르게 자리를 자리 잡았던 것 같아요. 대기업도 새로운 제조 사업을 시작할 때 준비 기간이 최소 1년 이상 걸리거든요.”
에이에스이티를 전 세계를 아우르는 배터리 솔루션 기업으로 키울 구상이다. “2026년까지 복합계 전고체 전지 양산 라인을 갖추고 차세대 배터리를 본격 상용화할 계획이에요. 배터리 제조 기업과 완성차 기업 진출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미국과 유럽에도 판매를 시작할 예정입니다. 2028년에는 매출 2450억원을 예상합니다. 최종적으로는 우리나라를 이차 전지 시장을 주도하는 국가로 만드는 데 일조하고 싶습니다.”
/진은혜 에디터, 이소연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