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긴 지명, 그 땅을 흔드는 지진

[김형진의 걸쭉한 뉴질랜드 이야기]

뉴질랜드의 낭만적인 언덕 이름

타우마타와카탕이항아코아우아우오타마테아투리푸카카피키마웅아호로누쿠포카이웨누아키타나후
Taumatawhakatangihangakoauauotamateaturipukakapikimaungahoronukupokaiwhenuakitanatahu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하시겠지만, 와이너리로 유명한 뉴질랜드 북섬의 혹스베이 (Hawke’s Bay) 지방에 있는 한 작은 산등성이 언덕의 이름입니다. 알파벳으로 총 85자에 달하는, 기네스북에 의하면 세계에서 가장 긴 지명입니다. 이름은 “먼곳에서 이곳으로 바람에 불려온 타마테아라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피리를 불어준 언덕”이라는 아주 낭만적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뉴질랜드의 공식적인 지명의 상당수는 유럽인들이 들어오면서 영국식으로 작명을 한 것인데, 그들이 오기 전부터 이 땅에 살고 있었던 마오리들이 먼저 붙여놓은 이름을 쓰고 있는 곳도 상당히 많습니다. 마오리식 지명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대표적인 단어를 두 가지 들어보자면 ‘Te(테)’와 ‘Whanga(퐝가)’입니다. Te는 영어의 ‘the’라는 의미를 비롯해 용도가 아주 다양한 단어인데, Te Awamutu(테 아와무투), Te Anau(테 아나우) 등 지명의 앞에 쓰일 때에는 ‘땅’이라는 의미를 가지며, 주로 내륙에 있는 지역의 이름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제가 뉴질랜드 북섬 중앙에 있는 Te Awamutu(테 아와무투)라는 곳에 몇 년간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이 나라에서 가장 긴 강인 Waikato(와이카토) 강과 그보다는 조금 작은 Waipa(와이파) 강 사이에 위치한 아주 아름다운 시골마을인데, “물(Awa)이 멈추는(mutu) 곳(Te)”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강 이름의 앞머리에 붙어있는 Wai(와이)라는 단어 역시 강이나 개울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에 반해 Whanga(퐝가)는 Whangarei(퐝가레이), Whanganui(퐝가누이) 등 주로 바닷가에 위치한 지역에 많이 붙이는 이름인데, 만(灣 bay, cove) 또는 강어귀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주말에 골프를 치러 가는 Whangaparaoa golf club(퐝가파라오아 골프 클럽)의 상징은 고래입니다. paraoa(파라오아)는 마오리말로 '고래'인데, 이 지역이 예전엔 고래잡이의 중심지였다고 합니다. 거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레드 비치(Red Beach)라는 아름다운 해변이 있는데, 고래잡이로 인해 바닷가가 고래의 피로 붉게 물들어 있는 걸 보고 유럽인들이 붙인 이름이라는 슬픈 사연이 있습니다.

아름답지만 위험한 도시들

뉴질랜드의 대부분 도시들은 북섬 중부 내륙의 중심지인 Hamilton(해밀턴)을 제외하면 모두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수도인 Wellington(웰링턴), 뉴질랜드에서 가장 큰 도시 Auckland(오클랜드), 남섬에서 가장 큰 도시 Christchurch(크라이스트처치), 세계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 도시인 Invercargill(인버카길)까지 모두 바닷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섬나라이다 보니 유럽에서 오는 사람들에겐 내륙보다는 바닷가에 정착하는 것이 여러모로 잇점이 있었던 듯합니다. 뉴질랜드의 서쪽 해안은 반대쪽에 비해 대체로 파도가 세고 지형이 험준한 편입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New Plymouth(뉴 플리머스)라는 북섬 서해안의 아름다운 도시를 제외하면 모든 도시들은 동쪽 바닷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미대륙 서부와 일본 동남아를 잇는 이른바 '불의 고리' 환태평양 조산대가 뉴질랜드 동부 해안을 지나가기 때문에 그 지역에서는 크고 작은 지진이 자주 발생하기도 합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막아주고 있듯이, 지진에 관련해서는 뉴질랜드가 호주를 비교적 안전한 곳으로 지켜주고 있습니다.

제가 북섬 동남부 바닷가에 있는 Napier(네이피어) 라는 곳에 살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느 주말 밤늦은 시각, 한잔 하면서 거실 소파에 누워 TV를 보다가 살짝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제 몸이 구름 위로 두둥실 떠다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겁니다. 잠결에 ‘술이 좀 과했나 보군’하고 생각하면서 그 ‘두둥실’을 즐기고 있었는데, 자고 있던 아이들이 모두 방에서 뛰쳐나와 지진이 났다고 아우성하는 겁니다. 사실 그전에도 몇 초 정도씩 살짝 흔들리는 것을 몇 차례 경험해 본 적이 있는데, 그때처럼 몇 분 동안 크게 흔들렸던 건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가만히 서 있기가 힘들 정도였습니다. 조금 무서웠지만, 아이들을 달래고 안전한 곳에서 몸을 낮게 숙인 채 잠시 기다렸더니 다행히 큰 피해 없이 진동이 가라앉았습니다.

하지만 같은 시각에 발생한 지진으로 웰링턴에서는 막심한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이 나라의 수도이다 보니 도심에 많은 관공서들이 모여 있었는데, 지진으로 그 건물들이 큰 피해를 입는 바람에 행정업무의 상당 부분이 마비되었습니다. 일부 주요 기관들은 네이피어를 비롯한 가까운 도시에 임시 사무실을 마련하여 업무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늦은 밤이었기 때문에 큰 인명피해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뉴질랜드의 주택은 대부분 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웬만한 지진에는 큰 피해를 입지 않습니다. 지진에 무너진 건물들은 대부분 철근콘크리트로 지은 고층 건물들이었습니다.

대지진 피해를 극복하는 뉴질랜드인들

1931년에 혹스베이 지역에 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 바람에 혹스베이의 중심 도시인 네이피어 시내 건물의 절반 이상이 무너지고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고 합니다. 그 폐허를 재건하면서 그 자리에 당시 유행하던 아르데코 양식으로 건물들을 다시 새롭게 지었는데, 약 백년 전에 지은 건물들이 아직도 잘 관리되어 상가나 사무실, 관공서 등의 용도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덕분에 세계에서 아르데코 양식의 건축물 비중이 가장 높은 도시가 되어버린 네이피어에서는 매년 2월 셋째 주말에 온 도시와 사람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100여년전으로 돌아갑니다.

도시 전체가 빈티지 모드로 전환되어 모든 사람들이 그 시절에 유행하던 복장을 하고, 그 시절의 음악에 맞춰 길거리에서 춤을 추고, 전국에서 모여든 100살이 넘은 자동차들을 도시 곳곳을 돌아다닙니다. 뉴질랜드에서 가장 핫하다고 할 수 있는 그 유명한 아르데코 축제(Art Deco Festival)가 바로 그것입니다. 축제 기간에 맞춰 호주에서 출발한 대형 유람선이 네이피어 항에 정박하는 등 전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과 분위기를 함께 즐깁니다. 지진의 아픈 기억과 그 유산을 슬기롭게 관광상품으로 잘 활용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2011년에 일어난 크라이스트처치 대지진은 여러분들도 잘 기억하실 겁니다. 크라이스트처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대성당을 비롯해 많은 건물들이 무너지고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중국의 쓰촨성에서도 대지진이 일어났었습니다. 피해 규모가 크라이스트처치보다 훨씬 컸지만, 불과 수년만에 도시를 다시 말끔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반면 크라이스트처치는 아직도 재건 공사가 진행 중이고, 심지어 정부 측과의 피해보상 합의조차 마무리되지 않은 건물주들도 상당히 있다고 합니다. 건설 인력이나 인프라 부족 등의 이유가 크겠지만, 결코 서두르지 않는 국민성도 한몫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진이나 화산 등의 천재지변으로 인한 건물의 붕괴가 거의 일어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는, 그 대신 사람들이 멀쩡한 건물들을 부숴버립니다. 20~30년 밖에 안된, 조금만 손보면 몇십년 이상 넉넉히 사용할 수 있는 아파트를 재개발, 재건축이라는 명목으로 헐어 버리고, 그 자리에 초고층으로 새로운 건물을 올리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경제적인 효과는 분명히 있겠지만, 허물어진 건물에서 나오는 각종 폐기물들은 모두 어디로 갈 것이며, 재건축 과정에서 발생하는 골재 채취, 산림 훼손, 그리고 이산화탄소를 비롯한 각종 공해물질 등으로 인해 벌어지는 여러가지 문제점들은 과연 누가 감당해야 하는 걸까요?

몇몇 사람들, 특히 돈 많은 사람들의 주머니를 더 불려주기 위해 열대우림이 사라지고 빙하가 녹아버리고 북극곰이 살 곳이 없어지게 된다면 이건 너무나도 슬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경제적인 번영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과 물과 공기는 우리들만의 것이 아닌 만큼, 조금 더 아끼고 살펴서 훗날 후손들에게 깨끗하게 물려주는 것이 훨씬 더 가치있고 소중한 일이라 생각하는데,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하신지요?


※ 글을 쓰는 김형진 님은 이렇게 본인을 소개합니다. "뉴질랜드에서 버스 운전 하고 있는 꼰대심 투철한 대한의 '아재'입니다. 제가 이 곳에 살면서 보고 듣고 느낀 이야기들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제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행복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