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자배구 대표팀이 2026 AVC 네이션스컵 첫 경기에서 키르기스스탄을 세트 스코어 3-0, 세트별 스코어 25-7, 25-5, 25-7로 완파했다. 3세트를 합산해 상대에게 허용한 점수는 고작 19점. 세트당 평균 6.3점만 내줬다는 뜻이다. 차상현 감독 체제 첫 공식전에서 나온 결과다. 수치만 놓고 보면 그야말로 일방적인 경기였으나, 이 경기가 단순한 대승 이상의 의미를 갖는 이유는 따로 있다.

2026 AVC 네이션스컵은 국제배구연맹(FIVB) 주관 발리볼 네이션스리그(VNL)에 출전하지 않는 팀들이 참가하는 아시아 지역 대회다. 한국이 이 무대에 서게 된 배경은 단순하지 않다. 한국 여자배구는 지난해 VNL에서 강등되며 최상위 무대 자격을 잃었다. 아시아 배구 강호로 여겨지던 팀이 VNL 잔류에 실패했다는 것 자체가 당시 국내 팬들에게는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체제도 바뀌었다. 차상현 감독이 대표팀 지휘봉을 넘겨받으며 세대교체와 재건이라는 과제를 동시에 안았다. 이번 대회는 그 첫 공식 무대였다. 대회는 총 12개국이 참가해 A·B 두 조로 나뉘어 조별리그를 치르고, 각 조 상위 2개 팀이 4강 토너먼트에 진출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한국이 속한 A조에는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필리핀, 호주, 대만이 포함돼 있다. B조는 이란, 베트남, 카자흐스탄, 인도네시아, 홍콩, 레바논으로 구성됐다.
우승 후보들의 면면을 살피면 한국의 목표가 가시적으로 보인다. 아시아 배구의 전통 강호인 일본, 중국, 태국은 모두 VNL에 출전하기 때문에 이 대회에 없다. 한국 입장에서는 충분히 정상을 노려볼 수 있는 구도다. 다만 챌린저컵과 달리 이번 대회 우승이 VNL 재승격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랭킹 포인트가 걸려 있는 만큼 매 경기 결과가 세계 랭킹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경기 자체는 예상 범위 안에서 흘러갔다. FIVB 랭킹 38위 한국과 69위 키르기스스탄의 전력 격차는 처음부터 명확했다. 키르기스스탄은 지난달 중앙아시아배구연맹(CAVA) 선수권에서 5위를 기록한 팀이지만, 이번 대회에 2006~2009년생 위주로 구성된 젊은 선수단을 꾸렸다. 평균 연령 19.7세, 평균 신장 177cm의 팀이었다.
한국은 선발부터 주전 전원을 투입했다. 세터 김다인(현대건설), 아웃사이드 히터 이예림(현대건설)·강소휘(도로공사), 미들블로커 이다현(흥국생명)·박은진(정관장), 아포짓 스파이커 나현수(현대건설), 리베로 이영주(현대건설)·한다혜(SOOP)가 첫 코트를 밟았다.

1세트는 이다현의 다이렉트 킬 블로킹으로 첫 포인트를 따낸 뒤 이예림, 나현수, 강소휘 등이 고르게 득점에 가담했다. 세터 김다인은 미들 활용을 적극적으로 택했고, 이다현이 1세트에서만 5득점으로 팀을 이끌었다. 중반 이후 더블 스위치로 투입된 이수연(도로공사)이 서브 에이스를 3개 추가해 주전과 후보 간 격차 없는 전력을 과시했다. 한국은 22-7에서 3점을 내리 따내 1세트를 마무리했다.
2세트는 초반부터 한국이 4연속 득점으로 분위기를 굳혔다. 점수 차가 벌어지자 이수연, 정윤주(흥국생명), 이주아(IBK기업은행), 김세빈(도로공사), 박여름(정관장) 등 후보 자원들이 순차적으로 투입됐다. 2세트 최종 스코어는 25-5. 한국은 19-5에서 6연속 득점으로 마무리지었다.
3세트는 사실상 박여름의 시간이었다. 국가대표 데뷔전을 치른 박여름은 이 세트에서만 서브 에이스를 6개 작성했고, 3연속 서브 에이스를 두 차례나 기록했다. 전체 12점 중 서브 에이스가 6개라는 수치는 경기의 일방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박여름 개인의 임팩트를 잘 드러낸다. 마지막 포인트도 박여름의 공격으로 끝났다. 이예림은 10점, 이다현은 8점으로 에이스 역할을 소화했다. 한국은 이 경기로 랭킹 포인트 5.47점을 추가해 누계 105.00점이 됐고, 세계 랭킹 40위에서 38위로 두 계단 상승했다.
한편 B조에서는 이도희 감독이 이끄는 이란이 인도네시아에 1-3(15-25, 25-21, 21-25, 22-25)으로 패하며 첫 경기를 내줬다.
3-0 완승은 전력 차를 감안하면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결과였다. 그러나 이 경기에서 더 눈여겨볼 지점은 스코어가 아니라 운영 방식과 선수 구성이다.
차상현 감독은 주전과 후보를 기계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세트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로테이션을 돌렸다. 전력 열세 팀을 상대로도 주전을 무리하게 끝까지 기용하기보다 후반 세트를 후보 자원들의 실전 무대로 활용했다는 점은, 대회 전체를 염두에 둔 체력 및 컨디션 관리 전략으로 읽힌다. A조에는 우즈베키스탄, 필리핀, 호주, 대만 등 만만치 않은 상대들이 남아 있다.

박여름의 활약은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이수연, 이영주, 김효임(GS칼텍스) 등과 함께 이번이 국가대표 데뷔전인 그가 3세트에서 서브로만 경기 흐름을 흔들었다는 사실은 세대교체 중인 대표팀 내부 경쟁의 온도를 보여준다. 키르기스스탄이 약체인 만큼 이 수치를 절대화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데뷔 무대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사실이다.
FIVB 세계 랭킹 포인트 구조상 약체를 상대로 한 승점의 가치는 크지 않다. 그러나 랭킹이 낮은 현재 한국의 상황에서 포인트를 꾸준히 쌓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38위까지 끌어올린 랭킹을 향후 VNL 복귀를 위한 발판으로 이어가려면, 이번 대회 남은 경기들에서도 실점 최소화와 세트 우위를 유지해야 한다.
차상현호의 첫 단추는 완벽하게 꿰졌다. 7일 오후 10시(한국시간) 예정된 우즈베키스탄과의 2차전이 첫 번째 실질적인 검증대가 될 것이다. 한국 여자배구가 이번 대회에서 우승을 넘어 VNL 복귀의 발판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다음 경기에서 어떤 그림을 그릴지 지켜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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