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핵시설을 이례적으로 공개한 이유
북한이 13일 핵탄두를 만드는데 사용하는 고농축 우라늄(HEU) 제조시설을 대외적으로 처음 공개하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핵무기연구소와 핵물질 생산 시설을 현지 지도하며 무기급 핵물질 생산을 늘리기 위한 중요 과업을 제시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김 위원장이 우라늄 농축시설을 돌아보며 “보기만 해도 힘이 난다”고 말했다며 “커다란 만족을 표시했다”고 전했다.
북한이 우라늄 농축 시설을 외부에 공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앞서 지난 2010년 미국 핵물리학자인 지그프리드 해커 박사를 초청해 영변 핵시설을 보여준 적이 있지만, 대외적으로 공개되진 않았다.
이번에 이례적으로 핵 농축시설을 공개한 배경에 관심이 쏠리는 가운데, 전문가들은 이번에 공개된 시설 자체보다 이를 공개한 배경에 주목해야 한다는 반응이다.
'시설은 알려진 대로, 원심분리기는 짧아져'
함형필 한국 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은 “2010년 해커 박사에게 보여준 것과 같은 P2 모델의 원심분리기와 캐스케이드 구성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해커 박사는 2010년 11월 북한의 초청으로 영변을 방문해 1000개 이상의 원심분리기를 직접 목격했다고 밝힌 바 있다.
북한이 조선중앙통신이 공개한 사진에는 원심분리기 수백 개가 늘어선 모습이 보인다. 원심분리기는 고속 회전을 통해 핵무기 제조에 필요한 고농축 우라늄(HEU)를 생산하는 장치며, 원심분리기를 수백~수천 개 이어 붙인 것이 캐스케이드다.
함 위원은 “P2 원심분리기를 기반으로 해서 캐스케이드를 구성한 것”으로 “기존 파키스탄이나 리비아 등에서 적용한 모델”이라고 설명했다.
북한은 1990년대 이후 파키스탄과의 핵 협력을 통해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북한은 파키스탄으로부터 P1, P2 원심분리기 수십 대와 설계도면 및 관련 기술을 제공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파키스탄식 캐스케이드는 하나당 300여 개의 P2 원심분리기를 이용한다.
아산정책연구원 양욱 연구위원은 원심분리기의 “배열 등도 기존에 알려진 것과 비슷”하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양 연구위원은 이번에 공개된 원심분리기가 기존보다 “길이가 짧아졌다”는 점에는 주목했다.
기존 P2 원심 분리기는 길이가 약 2m 정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번에 공개된 사진에선 원심분리기의 높이가 키가 170cm가량으로 알려진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양 위원은 길이가 짧아진 데 대해 “북한이 효율을 조금 더 개선했을 수 있다”면서도, “성능이 좋아졌는지에 대해선 아직 알 수 없다”고 진단했다.
한편 조선중앙통신은 김 위원장이 "이미 완성단계에 이른 신형의 원심분리기 도입사업도 계획대로 내밀어 무기급 핵물질 생산 토대를 한층 강화"하라고 지시했다고 전하며 원심분리기 개발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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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도 부정도 하지 않았던' 시설을 공개한 이유?
북한이 그동안 시인도 부정도 하지 않았던 핵시설을 공개한 것은 결국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기 위한 행보의 일환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레이프 에릭 이슬리 이화여대 교수는 BBC에 북한이 “핵 개발을 자랑하고 핵무기 프로그램이 돌이킬 수 없다는 신호를 보내기 위해” 이 시설을 공개했다고 전했다.
통일연구원 홍민 선임연구위원도 AF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공개가 차기 대선을 염두에 둔 "메시지"일 수 있다며, 차기 행정부에 "북한의 비핵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전했다.
양 연구위원도 “핵보유국 지위를 굳히기 위한 행보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섣부른 해석은 경계할 것을 지적했다. 양 위원은 이번 공개에서 “새로운 부분은 아직 잘 보이지 않는다”면서, “북한이 뭔가를 보여줄 때마다 너무 흥분해서 바라볼 필요는 없다”고 전했다.
함형필 위원 또한 “새로운 국면 조성의 첫 단추일 수 있다”면서도, “아직은 섣불리 판단하기 조심스러운 단계”라고 전했다. 그러면서도 “전략적인 다음 행보를 위한 포석 깔기라는 해석은 가능하다”고 밝혔다.
한편 함 연구위원은 대내적으로는 “내년이 북한의 무기체계개발 5개년계획의 마지막 해”라는 점에 주목했다.
북한은 지난 2021년 8차 당대회를 통해 ‘국방과학발전 및 무기체계개발 5개년계획’을 세워 핵무기 실전화를 명시한 바 있다. “내년도가 5개년 계획의 마지막 해이기 때문에 그걸 중간 점검하고 독려하고 또 확인하려는 차원으로 보인다”는 것.
영변, 강선 아니면 제 3의 핵시설?
이번에 공개된 핵시설이 어디인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주목된다.
기존에 알려진 평안북도의 영변핵시설과 평양 인근의 강선단지, 아니면 제3의 장소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지난 8월 발표한 ‘북한 안전조치 적용’ 보고서에서 최근 영변과 강선 두 시설 모두 가동 중인 징후가 발견됐다고 보고한 바 있다.
보고서는 영변 핵시설에서는 지난해 8월 이후 1년간 “냉각수 배출을 포함한 5MW(e) 실험용 원전의 가동 징후가 계속 관찰됐다”고 전했다. 강선 핵시설에 대해서는 올해 2월 새 별관 공사가 시작돼 4월까지 외부 공사가 완료됐다고 밝혔다.
IAEA 사무총장인 라파엘 그로시는 지난 9일 성명을 통해 “강선 단지는 영변 원심 분리기 농축 시설과 인프라 특성을 공유하고 있다”면서 “보고 기간 동안 이 단지에서도 활동이 진행 중이라는 징후가 있었다”고 밝혔다.
특히 강선 단지의 경우 최근에 공사가 끝난 만큼 일각에서는 이번에 북한이 공개한 단지가 강선 단지가 아니냐는 추측이 나온다.
이에 대해 양 연구위원은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라며, “영변이나 강선 둘 중 하나일 것으로 추측되지만, 시설이 깔끔한 것으로 보이는 만큼 최근에 지어진 곳이 아니겠느냐”고 전했다.
그러나 두 곳이 아닌 제3의 장소일 가능성에 대해 양 위원은 “(정보기관 등이) 김정은 위원장의 동선을 다 보고 있는 상황에서 알려지지 않은 데로 갈 이유가 없다”며 가능성이 낮다고 전했다.
현재 북한은 1만 대 이상의 원심분리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의 연간 핵무기 개발 능력에 대해 한국과 미국의 정보기관은 연간 최대 12대 정도로 추정하는 것으로 미국 외교협의회가 지난 2022년 발표한 바 있다. 아산정책연구원과 미국 랜드연구소는 지난해 발표한 보고서에서 북한이 연간 최대 18기까지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고 추정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