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자연 영화] 친구가 된 문어와 인간
어떤 영화 한 편을 언급할 때 우리는 대부분 주연배우를 떠올리게 마련이다. 영화라는 장르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아마 감독 이름도 함께 떠올릴 것이다. 배우와 그의 연기가 작품 대부분을 차지하는 영화도 있고, 감독의 독특한 개성이 작품 전반을 지배하는 영화도 있다. 배우와 감독은 영화의 가장 큰 두 축이다.
하지만 한 편의 영화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필요하다. 프로듀서(제작), 각본가, 편집자, 촬영감독, 캐스팅 디렉터, 의상 디자이너, 프로덕션 디자이너(미술), 음악가, 음향 담당, 분장 아티스트, 시각효과 담당, 마케팅 담당….
이 모든 영화인들의 가장 큰 꿈의 하나는 자신들이 만든 작품이 세계적 영화제에서 인정받는 것일 게다. 영화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권위 있는 3개의 국제 영화제를 '세계 3대 영화제'라고 부르는데, 프랑스 칸(1946년 설립), 독일 베를린(1951년), 이탈리아 베니스(1932년) 영화제이다.
칸 영화제는 2019년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으로 대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았고, 베니스 영화제는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
(2012)로 대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바 있다. 하지만 베니스 영화제의 경우, 홍상수 감독이 2등상인 심사위원대상이나 감독상, 각본상을 받은 바 있으나 대상인 황금곰상을 수상한 대한민국 장편영화는 아직 없다.
이 세계 3대 영화제와 별도로 미국 아카데미상이 있다. 미국의 가장 권위 있는 영화 시상식이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 시상식이다. 시상식에서 수여하는 트로피의 이름인 '오스카상'으로도 불린다.
엇비슷한 영화 행사처럼 여겨지지만 아카데미상과 3대 국제영화제는 성격이 매우 다르다. 아카데미는 상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열리는 행사인 '시상식award'이고, 3대 국제영화제는 영화들을 상영하는 목적을 가진 '영화제film festival'이다. 3대 국제영화제 모두 폐막일에 시상식을 개최한다. 이런 까닭에 아카데미상이 이미 개봉한 영화들을 대상으로 하는 반면, 3대 국제영화제는 거의 대부분 미개봉작을 대상으로 한다.
아카데미 장편 다큐멘터리상
인지도와 영향력 면에서 아카데미는 전 세계에서 열리는 영화 행사 중에서 최고 수준으로 대우받는다. 미국이 초강대국인 데다가 비교 불가능한 압도적인 영화 시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영화는 제작 편수가 많고 질적 수준도 높은 데다 전 세계로 수출되며 인기를 끌고 있기에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수상하거나 후보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북미 최대 시장은 물론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면서 파급력이 엄청나다.
아카데미 후보작의 자격은 그해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미국 내 극장에서 상영(최소 7일 연속)되었던 영화를 기준으로 한다. 단, '외국어영화상'(2020년부터 '국제영화상'으로 이름을 바꿨다)과 '장편 다큐멘터리상', '단편 다큐멘터리상'의 경우에는 다른 방식으로 후보작을 선정한다. 다큐멘터리 영화들은 7일 연속 상영 기준을 채우기 힘든 경우가 많아 3일 이상 상영으로 조정됐다. 외국어영화상은 LA 영화관 중 최소 1개 이상에서 상영하되 3회 이상 상영하면 자격이 있다.
우리나라는 <기생충>(감독 봉준호, 2019)이 제92회 아카데미상에서 작품상·감독상과 각본상·국제영화상·편집상·미술상 6개 부문에 후보로 지명되었으며, 작품상·국제영화상·감독상·각본상 4개 부문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역대 시상식 사상 작품상을 받은 최초의 비영어 영화이기도 하다.
그 이듬해에는 <미나리>(감독 리 아이작 정, 2020)로 배우 윤여정이 한국 연기자로서는 처음으로 아카데미에서 여우조연상을 받는 쾌거를 이뤄냈다.
이들이 정말 대단한 것이, 3대 국제영화제는 매해 심사위원으로 선정된 10인 이하 소수 영화 전문가들의 상의로 수상자가 결정되는 데 반해 아카데미는 1만여 명에 육박하는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cademy of Motion Picture Arts and Science, AMPAS 회원들의 투표로 선정되기에 좀더 수상하기 어렵고, 객관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AMPAS 회원은 전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영화 종사자·실무자들로만 구성된다. 매년 심사위원들의 취향에 따라 운에 좌우되는 국제 영화제와는 달리 아카데미는 명실상부 '영화인에 의한, 영화인을 위한 상'인 셈이다.
윤여정이 한국 연기자의 자존심을 드높인 제93회 아카데미에서 '장편 다큐멘터리상Best Documentary Feature Film' 부문에는 모두 다섯 작품이 후보에 올랐다.
루마니아의 광범위한 정치권 부패를 다룬 <콜렉티브Collective>(감독 알레그잔데르 나나우), 1960~1990년대 활동한 장애인 아동 캠프 '제네트' 멤버들의 이야기를 담은,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부부 제작의 <크립 캠프: 장애는 없다Crip Camp>(감독 니콜 뉴햄·짐 레브레흐트), 요양원에 입주 잠입한 80대 노인의 활약을 그린 칠레 다큐 <요양원 비밀요원El Agente Topo, The Mole Agent>(감독 마이테 알베르디), 미국 루이지애나주 교도소에서 출소한 뒤 남편과 싸우며 여섯 아이를 키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성을 그린 <타임Time>(감독 로렌 도미노) 등이었다.
개 수준의 지능을 가진 문어
이 쟁쟁한 후보들을 제치고 수상의 영예를 안은 작품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제작한 <나의 문어 선생님My Octopus Teacher>(감독 제임스 리드·피파 에리치, 2020)이었다. 한 나라의 정치 부패, 미국의 사회 부조리, 장애인 운동 등 굵직한 현안들을 다룬 작품들을 물리치고 문어를 다룬 영화가 오스카상을 거머쥔 것이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영화 촬영감독이자 자연 보호 활동가인 크레이그 포스터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수도인 케이프타운 인근의 펄스 만에 거주하고 있다. 2010년 그는 외딴 바닷속 다시마 숲에서 우연히 문어 한 마리와 조우한다. 이후 그는 1년여 이 암컷 문어를 따라다니고, 둘은 놀랍게도 마치 강아지와 주인이 교감하듯 친밀하게 교류한다.
사실 문어는 우리의 막연한 예상과 달리 아주 지능이 높은 생명체이다. 주변 움직임을 흉내 내거나 모방할 수 있으며, 높은 사고능력과 학습능력을 갖추고 있다. <나의 문어 선생님>에서도 주인공 문어는 주변 환경을 이용한 위장술에 능하고, 코코넛 열매껍질이나 큰 조개껍데기를 들고 다니다가 적이 나타나면 숨기도 한다.
지능을 잴 척도가 없어 추정할 수밖에 없지만, 문어의 지능이 개 수준은 된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영화에도 믿기지 않는 장면이 여럿 나오는데, 그중에는 문어가 바닷속 물고기들을 상대로 장난을 치는 모습도 나온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문어에겐 심지어 놀이본능까지 있다는 얘기다.
촬영과 제작에 10년 걸려
영화는 경계심을 푼 문어가 포스터의 손등과 가슴에 올라가는 모습, 어두운 밤에는 상어가 없는 얕은 바다에서 사냥하는 생태, 천적인 파자마상어에게 다리 하나를 뜯겨(촬영 125일째) 한 달 동안 사경을 헤매는 모습, 물어뜯긴 자리에 앙증맞게 새로 자그맣게 올라온 다리(250일째) 등을 생생한 화면에 담았다.
또 수컷과 교미한 뒤 수천 개의 알을 낳은 후 알을 돌보면서 죽는 모습, 상어가 문어의 사체를 물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모습까지 고스란히 화면에 담았다.
촬영과 제작에 총 10년이 걸린 이 작품은 미국 아카데미 외에도 영국 아카데미영화상 '최우수 다큐멘터리' 부문을 수상하는 등 그 작품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영화를 연출한 감독은 수상 소감에서 "이 영화는 아프리카 끝에 있는 바다 숲에서 일어난 소소한 개인적인 이야기이다. 하지만 좀 더 보편적인 차원에서 인간과 자연의 다른 관계를 엿볼 수 있기를 바랐다"라고 말했다. 영화를 직접 보면, 분명 감독의 바람 이상의 그 '무엇'이 가슴 한켠에 묵직하게 자리 잡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월간산 1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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