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턴 애창곡 틀어주는 센스…외교의 시작과 끝에 '의전'이 있었다
''외교 숨은 꽃' 의전 국가 예의 넘어 국익 확보 전략
의전 기본원칙은 '5R'... 규모보다 품격과 배려 중요
3년 만에 한국을 다시 찾은 세계 최대 산유국 사우디아라비아의 실권자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19시간 한국에 머무는 동안 국빈급 예우를 받았다.
자정을 넘겨 도착한 왕세자를 영접하기 위해 밤잠을 마다하고 나온 이는 한덕수 국무총리였다. 통상 국빈이나 정상급 인사 '마중'에 외교부 장관이 나섰던 관례에 비춰보면 '특별 대우'였다. 윤석열 대통령 부부도 한남동 관저 이사 후 첫 손님 맞이에 나섰다. 보안을 중시하는 빈 살만 왕세자를 배려하기 위해 사적 공간까지 내어준 것이다.
대통령부터 총리까지 '국가적 환대'에 나선 건 사우디의 경제 안보적 가치를 감안한 조치다. 이른바 '제2의 중동 특수'에 대한 기대감 표출이다. 극진한 대접에 대한 보답이었을까. 빈 살만 왕세자는 한국 기업들과 26개 경제 협력 프로젝트를 체결, 40조 원 규모의 선물 보따리를 풀고 돌아갔다.
흔히들 의전(儀典·protocol)을 외교의 '숨은 꽃'이라 부른다. "타인을 나의 방식에 따르도록 만드는 예술 행위가 곧 외교"라는 서양 격언에 빗댄다면, 의전은 그 예술을 가능케 하는 무대다.
의전은 형식이면서도 전략이다. 그 나라의 품격을 드러내주는 동시에 국가적 목표를 달성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의전상 결례가 생기면 잘나가던 회담도 한순간에 어그러질 수 있고, 사소한 배려 하나에 떠났던 상대국 정상의 마음을 다시 붙들 수도 있다. '소리 없는 전쟁'이라는 외교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품격과 배려의 경쟁, '의전 외교' 사례들을 정리했다.
클린턴 애창곡 틀어주는 센스, 술 입에 대지 않는 부시 위해 주스 준비
의전에는 5가지 원칙(5R)이 있다. 첫째는 상대에 대한 존중(Respect)이다. 세계 각국의 다양한 문화와 관습을 존중하는 게 의전의 대원칙이다. 이슬람 국가 정상에게 돼지고기를 대접하지 않는 식이다.
상대국 정상의 취향을 살뜰히 챙기는 것도 기본이다. 1993년 7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방한 기간 청와대 녹지원에서 조깅 후 연무관 수영장에서 수영을 즐겼는데, 우리 외교부가 클린턴 대통령의 애창곡을 사전에 파악해 운동시간마다 엘비스 프레슬리 노래를 틀어줬다고 한다. 클린턴 대통령은 퇴임 이후 회고록 'My Life'에서 '한국의 멋진 환대(Korea's famous hospitality)에 감사한다'고 사의를 표하기도 했다. 상대에 대한 관심에서 나온 외교 센스가 빛을 발한 경우다.
'애창곡 의전'은 우리도 받았었다. 2015년 9월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일대일 특별 오찬장에 박 대통령의 애창곡인 가수 '거북이'의 '빙고'를 비롯해 '아리랑', TV 드라마 대장금에 수록된 '오나라',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OST '나의 운명(MY Destiny)' 4곡의 한국음악이 흘러나오며 분위기를 띄웠다.
음식도 의전의 중요 포인트다. 2002년 2월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 방한 때 김대중 대통령 주최 오찬에 샴페인, 레드와인과 함께 사과주스와 포도주스가 준비됐는데,술을 입에 대지 않는 부시 대통령을 위한 배려였다.
실수였나, 무시였나... 中 국가 명칭 잘못 부르고, 후진타오 잡아끌기도
외교 원칙 두 번째는 상호주의(Reciprocity)다. 상대에게 배려를 받은 만큼 되돌려주고, 내가 상대를 배려한 만큼 기대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 상호주의 원칙이 무너지면 외교적 결례가 될 수 있다.
2006년 4월 미국에서 열린 미중정상회담에서 미국의 중국 '홀대' 논란이 불거졌다. 당시 미국은 백악관을 방문한 후진타오 주석에게 크고 작은 의전적 결례를 범했는데, 미국 측이 중국의 공식 영어 명칭을 'People's Republic of China'(중화인민공화국)가 아닌 대만의 명칭인 'Republic of China'(중화민국)로 잘못 소개한 것부터 시작이었다.
후 주석이 연설을 마치고 계단으로 내려가려는 순간 부시 대통령이 후 주석의 팔 소매를 잡아 끈 것도 논란이 일었다. 동선을 바로 잡아주려는 부시 대통령의 의도와 달리, 후 주석은 상당히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고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국가 원수가 상대의 옷을 잡아 끄는 것은 무례로 비칠 수 있다는 걸 부시 대통령이 순간 간과한 것이다. 미국의 무성의한 의전에 양국의 긴장 관계는 더욱 고조됐었다.
의전의 세 번째 원칙은 문화의 반영(Reflecting culture)이다. 각국마다 고유한 문화와 관습을 의전을 통해 알리는 게 통상적이다. 2010년 11월 서울에서 개최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참여한 각국 정상급 외빈 32명에게 이명박 대통령 명의로 특별 제작된 도자기를 건넨 것이 대표적이다. 한국의 전통 문화와 아름다움을 홍보하기 위한 선물이었다.
盧 군사분계선 넘어 방북, 김정일 아닌 최룡해 영접에 '급' 논란도
의전의 네 번째 원칙은 '서열'(Rank)이다. 참석자 급을 맞추지 못하거나 어긋나면 개인뿐 아니라 해당 국가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될 수 있는 만큼, 서열 정리는 의전의 핵심이다.
'급'은 남북 간 만남에서도 예민한 사안이다. 고위급 회담에서도 '급이 맞느냐'를 놓고 서로 신경전을 벌이기 일쑤다. 남북 정상 만남 때도 영접 논란이 벌어졌었다.
북한 최고지도자가 정상회담을 위해 북한을 방문한 남쪽의 정상을 마중 나온 건 총 3번. 2000년 6월 13일 역사적 첫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 순안 공항에 김대중 대통령을 영접 나온 게 처음이었다. 김 위원장의 등장에 전 세계가 깜짝 놀랐지만, 공항 영접은 남북 사전에 조율된 내용으로 경호상의 이유로 미리 공개하지 않았던 정보였다.
2007년 10월 2일 육로로 방북한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 1차 영접은 군사분계선(MDL)에서 이뤄졌다. '대남 사업 실세'로 2차 정상회담의 북쪽 준비위원장을 맡았던 최승철 노동당 통일전선부 부부장과 최룡해 당시 황해북도당 책임비서가 가장 먼저 노 대통령을 맞았다. 남측 대통령이 직접 군사분계선을 넘어 가는 성의를 표시한 것에 비하면 '급'이 떨어져도 너무 떨어지는 인사여서 논란이 일었다. 다만 김 위원장이 평양과 한참 떨어져 있는 지역까지 나와 자리를 비우는 게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을 거란 반론도 있었다. 결국 김 위원장은 평양시 모란봉구역 4·25 문화회관 광장에서 열린 환영행사에 등장해 노 대통령을 맞았다.
2018년 9월 18일 3차 남북정상회담 당시엔 북한이 이전 두 번의 정상회담보다 '격(格)'이 높아진 의전을 보였다.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 방북 당시 김정일 위원장 홀로 공항 영접을 나왔다면, 이번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부부가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를 맞았다. '국가 원수' 예우 의미가 담긴 예포 21발을 발사하고, 평양 주민들 앞에서 양 정상이 함께 카퍼레이드를 한 것도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 방북 당시에는 없었던 모습이다.
한편 통상 정상급 외빈들의 의전 서열은 국가수반, 행정수반 순이다. 동급일 경우 재임기간 순서로 정한다. 여러 정상이 참석하는 다자회의일 경우엔 통상 알파벳 순으로 서열을 정해 오해를 피한다고 한다. 2000년 서울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에서 우리 외교부는 외국 정상들의 차량을 회의장에 1분 간격으로 정확하게 도착시키며 동선을 정리했다. 불필요한 서열 논란을 피하기 위한 사전 예방책이었다.
규모와 형식보다 품격과 배려... 오바마·메드베데프의 '햄버거 회담'
다섯 번째 원칙은 오른쪽(Right)이 상석이라는 것. 역시 자리에 관한 내용이다. 행사 주최자는 손님에게 오른쪽을 양보하는 것이 기본으로, 정상회담 때 방문국 정상에게 오른쪽 자리를 양보하는 게 보통이다.
외교부 홈페이지에 공개된 각종 의전 원칙은 복잡하고 까다로운 디테일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품격과 배려'라는 게 공통된 평가다. 무조건 크고 성대하다고 좋은 의전은 아니다. 오히려 상대는 부담만 느낀다. 소박하고 간소하더라도 품격과 배려가 있다면 통할 수 있다.
2010년 6월 24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의 '햄버거 정상회담'은 좋은 예다.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마친 오바마 대통령은 자신의 단골 햄버거집으로 메드베데프 대통령을 데려갔다. 두 사람은 치즈버거와 감자튀김을 먹고, 콜라를 마셨다. 식사를 마친 뒤엔 경호원 없이 길거리를 자유롭게 거닐었다.
순서도 형식도 갖추지 않은 파격적 의전이었지만, 젊은 리더들이 격의 없이 소통했다는 점에서 외교 결례 논란은 없었다. 오히려 과거 냉전시대의 정치군사적 대결 중심에서 벗어나 경제 등 다양한 영역으로 협력을 넓혀가는 미러 관계의 '재설정(reset)'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꼽혔다.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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