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솔그룹이 전개하고 있는 반도체 중심의 사업 재편은 저수익 사업을 줄이고 고부가가치 영역을 확장하는 승부수로 읽힌다. 그러나 이에 따라붙는 재무부담과 고객 편중 심화라는 과제도 함께 지적된다. 공격적으로 사업 외연을 넓히는 과정에서 향후 현금 유출 가능성을 안은 풋옵션성 금융부채가 설정된 데다 새로 품으려는 윌테크놀러지로 삼성전자향 매출 의존도가 더욱 높아질 수 있어서다.
연이은 M&A에…잠재적 풋옵션 부담 825억원
22일 나이스신용평가에 따르면 한솔테크닉스가 안고 있는 잠재적 주식매수청구권(풋옵션) 부담은 총 825억원 수준으로 추산된다. 풋옵션은 일정 조건이 충족되면 지분을 보유한 투자자가 회사나 최대주주에게 미리 정한 가격 또는 산식에 따라 지분을 되팔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회사 입장에서는 해당 권리가 행사될 경우 추가로 지분을 사들여야 해 잠재적 현금 유출 부담으로 작용한다.
최근 인수를 결정한 윌테크놀러지의 경우 한솔테크닉스가 지분 83.4%를 먼저 사고, 나머지 16.6%는 기존 주주들이 계속 보유한다. 잔여 지분 가운데 기존 주주 보유분 5.9%(43만주)에는 오는 2027년 4월부터 2032년 3월까지 주식매수청구권이 설정돼 있다. 해당 권리가 행사되면 한솔테크닉스는 약 125억원을 추가로 투입해 이 지분을 사들여야 한다.
앞서 지난해 회사가 인수한 한솔오리온텍과 에스아이머트리얼즈 관련 주식매수청구권 약 700억원도 잠재 부담으로 남아 있다. 두 회사 모두 기한 내 기업공개(IPO)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재무적투자자(FI)이자 사모펀드(PEF) 운용사인 하일랜드EP가 지분 매수를 청구할 수 있어서다.
한솔테크닉스는 한솔오리온텍에 대해 2028년 7월까지(2030년 7월로 연장 가능), 에스아이머트리얼즈에 대해서는 2030년 9월까지 적격 상장에 이르지 못할 경우 잔여 지분을 사오겠다는 계약을 체결한 상태다. 이에 관련 한솔테크닉스는 713억원의 기타금융부채를 인식하고 있다.

시장에서는 윌테크놀러지 인수에서도 유사한 주주 간 약정이 반복될 경우 한솔테크닉스가 앞으로 떠안아야 할 재무 부담이 더 커질 수 있다고 본다. 인수시 지급하는 매매대금 외에 일정 시점 이후 남은 지분까지 다시 사들여야 할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상장이 지연되거나 약정상 조건이 충족되면 회사는 추가 자금을 투입해 잔여 지분을 매입해야 한다.
잇따른 인수합병(M&A)이 외형 확대에는 도움이 될 수 있어도 인수 이후 붙는 풋옵션 부담까지 함께 관리하지 못하면 재무 부담이 예상보다 빠르게 커질 수 있다. 실제 나이스신용평가는 윌테크놀러지 인수 후 한솔테크닉스의 총차입금의존도와 순차입금의존도가 작년 말 22.9%, 11.0%에서 27.2%, 14.5%로 상승할 것이라 전망하고 있다.
윌테크놀러지 삼성전자 매출 비중 90%대
동시에 삼성전자향 매출 의존도가 커지는 점도 부담으로 꼽힌다. 윌테크놀러지의 지난해 매출 가운데 삼성전자 관련 비중은 90%대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한솔테크닉스가 윌테크놀러지를 품을 경우 반도체 사업 외형은 확대되겠지만 고객 측면에서는 삼성전자 쏠림이 한층 심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한솔테크닉스 역시 삼성전자 의존에서 자유롭지 않다. 파워보드와 전자제품 위탁생산(EMS) 등 기존 주력 사업 상당수가 삼성전자 수요와 맞물려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새로 편입하는 자산까지 삼성전자 의존도가 높은 회사라면 표면적으로는 사업 포트폴리오가 넓어져도 실제로는 특정 고객에 대한 노출이 더 커지는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 사업군은 늘어나는데 매출 기반은 오히려 더 좁아질 수 있다는 얘기다.
한솔테크닉스는 과거에도 삼성전자향 사업 확대 뒤 철수라는 경험을 겪었다. 회사는 삼성전자 요청으로 2020년 TV용 액정표시장치(LCD) 모듈(LCM) 사업에 진출했지만 수익성 악화 끝에 2023년 해당 사업을 접었다. 2023년 사업보고서에서도 회사는 “LCM 사업 시장경쟁력 하락으로 손실이 지속 발생해 관련 사업을 중단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에는 삼성전자 협력회사 리스트에서도 제외됐다.

더구나 아직 회사의 반도체 사업 비중이 회사 전체를 바꿔놓을 만큼 크다고 보기도 어렵다. 한솔테크닉스의 지난해 반도체 매출은 전체 매출의 16% 수준에 그친다. 반도체를 새 성장축으로 키우겠다는 방향은 분명하지만 당장 회사 수익성을 좌우하는 단계까지 올라섰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의미다.
실적 흐름도 이런 한계를 드러낸다. 한솔테크닉스의 지난해 매출은 1조2524억원으로 전년 대비 4% 늘었지만 영업이익은 204억원으로 39% 감소했다. 외형은 커졌지만 수익성이 이를 따라가지 못한 셈이다. 인수합병으로 사업 범위를 넓히는 전략이 당장은 외형 확대 효과를 낼 수 있어도 수익성 개선과 고객 다변화가 함께 이뤄지지 않으면 반도체 중심의 사업 재편도 실질적인 체질 전환으로 이어지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한솔이 반도체로 무게를 옮기고 있지만 지금 모습은 고객 다변화라기보다 삼성전자 의존도를 다른 업종에서 반도체로 옮기는 데 더 가깝다”며 “풋옵션 부담까지 있는 상황에서 삼성의 상황에 따라 재무 부담도 함께 커지는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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