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극을 보면 임금은 옥좌에 앉아 있고, 그 앞의 중앙 통로는 비워둔 채 좌우로 늘어선 신하들이 임금과 정사(政事를 처리하는 장면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이때 자주 나오는 연출이 임금의 말에 따라 신하들이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등 합창하는 장면인데, 이와 관련해 실제로는 그런 발언을 한 기록이 없고, 상황상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내용의 영상을 게재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표현 외에도 사극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죽여주시옵소서. 전하"입니다. 주로 임금에게 직언할 때나 진짜 잘못한 일이 있을 때 사용하는데, 이 표현에 내포된 진짜 의미는 상황에 따라 다르긴 해도 진짜 죽여달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여기서 주제의 궁금증이 생깁니다. 이러한 표현을 신하들이 실제로도 사용했을까요? 만약 사용했다면 그 말에 따라 죽은 경우도 있었을까요?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김한빛님이 투고한 원고를 바탕으로 조선시대 때 어땠는지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신하가 임금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한 경우는 왕왕 있었고, 크게 네 가지 상황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상황이 앞서 나왔던 왕에게 직언할 때인데, 왕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목적에서 사용하는 일종의 겸양어입니다. 이 표현을 사용하면 신하로서는 왕에게 대드는 것이긴 해도 충신의 입장을 취할 수 있고, 실제 왕이 죽이면 폭군이 되는 것이기에 신하는 죽을 일 없이 강력한 명분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말하는 강도와 어감이 다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번 죽여보시든가?'처럼 말입니다. 만약 이처럼 지나치게 무례하면 죽지는 않았어도 강한 처벌을 받았는데, 광해군 일기 중초본 광해 즉위년 5월 2일 기사를 보면 관련 사례가 있습니다.
정경세는 광해군의 정책을 조목조목 꼬집으며 비판했고, 상소 말미에 '罪當萬死(죄당만사)'라고 적었습니다. 그 의미는 '자신의 죄가 만 번 죽어 마땅하다'는 것인데, 이걸 본 광해군은 진짜로 강력하게 처벌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신하들이 그 표현이 겸손하고 진지하다며 반대했고, 정경세는 잠시 파직당했다가 복귀하는 수준의 약한 처벌을 받았습니다.
이외에도 조선 말기 개항과 외국과의 수교를 반대한 최익현의 사례가 있습니다. 그는 서울에 도끼를 가져가 궐 앞에 내려놓고 앉은 뒤 상소에 말 그대로 자신을 죽일 테면 죽여보라는 아주 과격한 표현을 써서 올렸습니다.

상소 말미의 내용을 번역하면 '이 도끼로 신에게 엄한 형벌을 내려 신으로 하여금 지하로 돌아가 유교 성인들을 모시게 해주시면 조정의 큰 은혜일 것입니다'였는데, 자기 말을 수용하지 않을 거면 죽이고, 죽여주면 오히려 좋다는 무례한 표현이었습니다. 이에 최익현은 3년 유배라는 무거운 형벌을 받았습니다.
다음으로 많이 쓰이는 상황은 잘못을 시인할 때입니다. 이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죽을 만큼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사용한 것인데, 중종실록 중종 3년 12월 1일 기사를 보겠습니다.
내용을 보면 반역죄를 저지른 신복의가 심문을 받을 때 담당관에게 목숨을 구걸하며 "영감님. 저 좀 살려주십시오. 저는 잡것들과 국사를 논의한 적이 없습니다. 제 죄가 죽어 마땅하니 어찌 돌아보고 아낄 게 있겠습니까?"라고 합니다.

풀어보자면 자신은 반역과 관련해 아는 사람이 없으며, 내 죄가 무거워 이미 성실히 진술하여 숨긴 적이 없다는 뜻이고, 여기서 내 죄가 죽어 마땅하다고 한 말은 내 죄가 그만큼 무겁고 뉘우치고 있다는 표현으로 살려달라고 간청하는 의미입니다. 어쨌든 그는 5일 후 처형됐고, 스스로 죽어 마땅하다고 한 사람 중 진짜로 죽은 몇 안 되는 사례로 남았습니다.
또 다른 상황으로는 왕을 찬양할 때입니다. 보통 왕에게 무언가를 요청하거나 감사를 표할 때 왕의 은혜를 갚기 위해 자신이 죽어 마땅하다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세종실록 세종 27년 3월 17일 기사를 보겠습니다.
내용을 보면 판서를 지낸 박종우가 함길도 도 절제사직을 사양하며 "만약 만분의 일이라도 성은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다면 비록 만 번을 죽어도 감히 피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현재 부친상을 지내고 있고, 병이 났으므로 직을 맡을 수 없다고 거절했는데, 죽음으로라도 왕에게 충성하고 싶으나 개인 사정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의미로 쓰인 겁니다. 하지만 황희를 죽을 때까지 직무에 종사하도록 한 세종인 만큼 해당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상황에서도 쓰입니다. 요즘의 말과 비교해보면 "내가 거짓말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처럼 쓰이는 건데, 내 말이 거짓이면 나를 죽이라고 강하게 주장하는 표현으로 쓰였습니다.

숙종실록 숙종 27년 10월 26일 기사를 보면 숙종대에 장희빈이 처형당할 때 장희빈의 작은 오빠였던 장희재도 같이 처형됐습니다. 그리고 관련자들도 줄줄이 조사 대상에 오른 뒤 처벌받았는데, 관련자 중 한 명인 박명겸이 다른 사건 관련자들을 알고 있는지 추궁을 받았습니다.
이에 박명겸은 아는 사람이 없다고 주장하며 "만약 서로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비록 죽어도 마음에 달갑게 여기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즉, 내 진술이 거짓이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것으로 실제 그는 며칠 후 풀려났습니다.

정리해 보면 실제 신하들은 임금에게 "죽여주시옵소서 전하"와 비슷한 표현을 다양한 상황에서 쓰곤 했습니다. 이 표현은 실제 죽여달라는 게 아니라 겸양어나 과장을 위한 수사로 쓰인 것이고, 실제 죽는 일은 무거운 죄가 있을 때 그 탓에 죽은 것이지 죽여달라고 해서 죽은 일은 사실상 없었습니다. 궁금증이 해결되셨나요?
- 원고 :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김한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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