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로에서 자원으로, 외교의 지평을 바꾸다
카자흐스탄에서 시작된 한 건의 도로 사업이 자원 협력의 문을 열어젖힌 사례로 기록되고 있다. 전통적으로 자원 확보 경쟁에서 일본과 중국이 강자로 꼽혀 왔지만, 카자흐스탄이 한국과 손을 맞잡으며 ‘인프라-자원’ 연계 모델을 본격화했다. 출발점은 교통 체증에 시달리던 알마티 외곽의 순환도로였고, 도착지는 리튬 탐사권 협력이라는 전략 광물의 심장부였다.

알마티 66km, 1조 원의 신뢰를 쌓다
알마티를 한 바퀴 감는 66km 순환도로 사업은 카자흐스탄 최초의 본격적인 민관협력(PPP) 인프라 사업으로 추진되었다. 한국 도로공사와 SK에코플랜트가 핵심 컨소시엄 일원으로 참여했으며, 수십 개의 교량과 나들목을 포함하는 대규모 토목과 장기 운영·유지보수를 결합한 구조로 설계되었다. 공사와 운영의 효율을 묶은 이 방식은 초기 건설 품질과 중장기 관리 성과가 일체로 평가되기 때문에, 발주국 입장에서는 리스크를 낮추고 사용자 입장에서는 체감 품질을 높일 수 있었다. 총 사업비가 원화 기준으로 약 1조 원에 이르는 가운데 통행료 기반의 수입과 가용성 대가가 결합되어 10년대 중반에서 20년 전후의 운영기간 동안 안정적인 현금 흐름을 기대할 수 있게 설계되었다. 도시 혼잡 완화, 물류 회랑 최적화, 대기오염 저감이라는 정책 효과를 동시에 겨냥한 점도 이 사업의 특징이었다.

기술·금융·운영의 삼박자, PPP의 교과서가 되다
순환도로는 단순한 ‘공사’로 끝나지 않는다. 재원 조달, 금융 종결, 공사 리스크 배분, 운영 성과 지표, 요금·정책의 조화가 동시 달성되어야 한다. 이 프로젝트는 유럽계·중동계 개발금융기관과 민간 금융이 맞물려 자금을 공급했고, 건설-운영 분리의 약점을 상쇄하도록 일관된 품질 관리 체계를 작동시켰다. 한국 측은 도로 구조물의 내구성 설계, 동절기 운영 표준, 장비·인력의 운영 효율화를 접목하여 혹한·고지·대륙풍 등 카자흐스탄 특유의 자연조건을 반영한 유지관리 체계를 구축했다. 결과적으로 ‘첫 번째 대형 PPP’라는 상징성과 함께, 대도시 교통 문제의 실질 해법을 제시하며 국익과 상호 신뢰를 함께 적립하는 효과를 냈다. 발주국 입장에선 성과가 눈에 보였고, 민간 자본 입장에선 수익 가시성이 올라갔다.

리튬으로 이어진 제안, 탐사권 협력의 문이 열리다
인프라에서 축적된 신뢰는 곧바로 자원으로 이어졌다. 카자흐스탄은 우라늄 생산 1위의 자원 부국으로 수십 종의 전략 광물을 보유하지만, 광역 정밀 탐사·자원성 평가·산업화 연계에서 고도화 파트너가 필요했다. 이 시점에 한국 지질자원 연구기관과 기업이 ‘탐사-평가-개발’의 전 주기에 걸친 기술 역량과 산업 생태계를 함께 제시하면서 리튬 공동 탐사 제안을 수용하게 되었다. 대상지는 동(東)카자흐스탄 지역의 특정 광구들로, 과거 탄탈럼 채광 이력이 있던 지대의 지질 특성을 바탕으로 리튬·세슘 연계 가능성을 검토하는 방식이다. 공동 탐사는 독점적 조사 권한과 자료 확보의 이점을 제공하며, 경제성 검증이 끝나면 개발권 협상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단계적 로드맵을 마련했다.

‘하얀 석유’의 전략성, 한국 공급망의 체인을 잇다
리튬은 전기차·에너지저장장치의 핵심 소재로, 세계 각국이 주권적 확보와 공급망 다변화에 사활을 걸고 있다. 남미 소금호의 자원 국유화 흐름과 중국 중심의 정제·소재 공급 집중은 불확실성을 키웠다. 한국은 배터리 셀·소재·장비 분야의 경쟁력을 가지고 있으나, 리튬 원재료는 대부분 수입에 의존한다. 카자흐스탄과의 공동 탐사는 외교·산업·학술이 결합된 형태로, 자원 탐사권 단계에서부터 ‘데이터 주권’을 함께 확보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지질 데이터, 코어 시추, 3D 모델링, 광체 연속성 분석, 제철·정제 테스트까지 누적되는 데이터는 경제성 판단의 근간이자 향후 투자·개발·오프테이크 계약의 협상력으로 작동한다. 이는 단순 원료 확보를 넘어 정제·소재·셀로 이어지는 다운스트림 가치사슬을 견고히 하는 기반이다.

인프라-자원 연계 모델, 한국형 경제안보 외교의 청사진
이번 사례는 도로 하나로 시작한 신뢰가 전략 광물의 문을 여는 ‘한국형 모델’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첫째, 인프라 PPP에서의 성과는 눈에 보이는 공공 혜택으로 귀결되어 발주국의 정치·사회적 신뢰를 빠르게 축적한다. 둘째, 공공 인프라 성과를 바탕으로 자원 협력에서 데이터·기술·자본을 패키지화하면, 개발권·오프테이크·현지화 산업까지 단계적으로 확장할 수 있다. 셋째, 현지 대학·연구소·공기업과의 공동연구·기술이전·인력양성 프로그램을 병행하면, ‘투자와 기술’의 교환이 ‘공동 번영’의 설계로 격상된다. 넷째, 원재료 확보에 머물지 않고 정제·소재·모듈 단계의 현지 합작 또는 역내 분산 생산을 병행하면, 지정학 리스크와 물류 리스크를 동시에 줄일 수 있다. 다섯째, ESG·환경 기준을 선제적으로 내재화해, 물·에너지 사용량과 잔사 처리까지 투명하게 설계하면 글로벌 조달 시장에서의 평판도 높아진다.

다음 단계, 데이터를 자산으로 만드는 법
이 협력이 진정한 성과로 이어지려면 다음 단계가 중요하다. 탐사 단계에선 코어 분석과 광체 모델링의 정밀도가 승부처다. 지화학 시료의 품위 변동과 불순물 프로파일, 회수율을 좌우하는 광물학적 특성이 조기에 확보되어야 제련·정제의 공정 설계가 가능하다. 동시에 시추·시료·분석 데이터의 표준화를 통해 데이터 자산의 상호 인정 체계를 만들면, 투자 유치와 금융 조달에서 신뢰도를 높일 수 있다. 개발 단계에선 현지 전력·용수·인력·규제의 제약을 고려한 모듈화·에너지 효율형 공정이 핵심이며, 환경영향평가와 지역사회 수용성 확보가 일정의 병목이 되지 않도록 선제적 협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오프테이크에서는 장기·변동·지수연동·바닥가격 조합을 통해 원가 안정성을 설계하고, 국내 소재·셀 기업과의 수급 연동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도로에서 시작된 관계를 철도·물류·에너지 전환 프로젝트까지 확장한다면, 인프라-자원-제조-물류로 이어지는 입체적 동맹이 구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