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의 대물림이 전부가 아니다…이재용 키운 ‘상위 0.1% 교육법’

2022. 11. 30.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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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SK·현대차·LG그룹 일군 창업자들
경영보다 중요한 겸손·경청 리더십 물려줘

[비즈니스 포커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 6월 27일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의 장녀 진희 씨 결혼식이 열리는 서울 중구 정동교회로 딸과 함께 들어서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삼성가 장녀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의 아들이 또래들과 함께 대치동의 일반 학원을 다니는 것을 봤다는 목격담이 화제가 됐다.

다른 재벌가 자녀들이 유명 학원 강사들을 직접 고용해 개인 교습을 받으며 특권 의식을 갖기 쉬운 환경에서 성장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이부진 사장은 오은영 박사의 강연도 직접 찾아갈 정도로 교육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고 자녀 교육 방식이 재벌가답지 않게 소탈하다는 평가가 주를 이뤘다.

기업을 창업한 세대들은 부를 일구는 것 못지않게 부를 다스리는 법을 중히 여겨 자녀가 어릴 때부터 학업뿐만 아니라 인품·인성에 대해서도 교육한다. 삼성·SK·현대차·LG 등 그룹마다 독특한 경영 철학이 존재하는 것은 기업의 경영 철학에 창업자의 인생 철학이 스며 있기 때문이다. 

‘창업보다 수성이 어렵다’는 격언이 있다. 당 태종 이세민의 충신 위징은 창업보다 수성이 더 어려운 이유로 ‘예로부터 임금의 자리는 간난(艱難) 속에서 어렵게 얻어 안일(安逸) 속에서 쉽게 잃는 법’이라고 말했다. 상위 0.1%의 금수저로 태어나도 재산을 지키고 유지하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경영 환경이 급변하면서 기업의 생존율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글로벌 컨설팅 업체 맥킨지가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500대 기업의 평균 수명을 조사한 결과 1935년만 해도 90년이던 이들의 평균 수명이 1975년에는 30년으로 줄더니 21세기에 들어선 이후에는 15년까지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한때 재계를 호령하던 대우·해태·쌍용 등이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기업은 생존과 성장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경쟁에서 도태된 기업들은 자연히 사라지는 게 현실이다. 굴지의 대기업들도 1년 뒤를 장담할 수 없는 시대다. 선대가 맨손으로 일군 기업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후계자들은 선대를 뛰어넘어야 한다. 재벌가가 부를 만들고 유지하며 존속하는 법을 각 그룹의 독특한 자녀 교육 방식에서 찾아봤다.

 

 경영학보다 인문학 먼저 가르치는 삼성

초일류 기업을 일군 삼성가에서는 경영에 앞서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을 경영자의 최우선 덕목으로 삼았다. 이건희 삼성전자 전 회장은 최고경영자(CEO)의 덕목으로 ‘지행용훈평(知行用訓評)’을 강조했는데, 리더는 많이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솔선수범해 행동으로 옮기고 아랫사람을 지도하고 평가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인재 중심 경영 철학을 보여준다.

이건희 전 회장은 평소 자녀에게 군주론과 제왕학의 고전인 ‘한비자’를 읽도록 권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법가이자 사상가인 한비자가 지은 책으로 “삼류 리더는 자기 능력을 사용하고 이류 리더는 남의 힘을, 일류 리더는 남의 지혜를 사용한다”고 쓰여 있다. ‘한비자’를 통해 자녀에게 용인술, 사람을 쓰는 법을 깨우치게 한 것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경기초-청운중-경복고를 거쳐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게이오기주쿠대 MBA와 하버드대 경영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1987년 초 대학 진학을 앞두고 있을 때 할아버지인 이병철 창업자는 당시 “교양을 쌓는 학부 과정에서 사학이나 문학과 같은 인문학을 전공하고 경영학은 유학을 통해 배우면 좋겠다”고 권유했다.

이건희 전 회장은 ‘경청과 목계’라는 부친의 가르침에 ‘삼고초려’를 더해 이재용 회장에게 물려줬다.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누군가 싸움을 걸어와도 나무로 만든 닭처럼 자기 감정을 제어하고 평정심을 유지하며 삼고초려로 인재를 확보하라는 의미다.

이재용 회장과 초중고·대학을 다녔던 이들이 이 회장의 성격에 대해 공통적으로 거론하는 것은 삼성의 공인된 후계자였지만 부를 티 내지 않고 예의 바르고 겸손했다는 점이다. 이 회장과 일본 게이오기주쿠대 MBA를 함께 마친 한 동문은 자신의 장학금 신청을 하면서 이 회장에게 장학금을 신청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을 때 이 회장이 장학금이 필요 없다는 얘기를 하며 웃음으로 얼버무렸다는 일화를 전하기도 했다.

이 회장은 서울대 학적부에 아버지 직업을 회사원이라고 적고 학과 MT에도 빠지지 않고 참가해 동기들과 토론과 논쟁을 즐기며 무난한 대학 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장의 딸인 원주 씨도 비슷한 진로를 선택해 눈길을 끈다. 미국에서 사립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 명문 리버럴 아츠 칼리지 중 하나인 콜로라도 칼리지에서 공부하고 있다. 콜로라도 칼리지는 인문학·순수과학 등의 학부 과정을 중점적으로 운영하는 대학이다.

최태원 SK 회장이 2020년 11월 24일 두 딸과 함께 전북 군산에 있는 창업지원센터 ‘로컬라이즈 타운’을 방문한 모습. 로컬라이즈 타운은 SK E&S가 군산 지역의 도시 재생을 위해 추진하는 ‘로컬라이즈 군산’ 프로젝트 지원 공간이다. 사진=로컬라이즈 군산 제공



 

 과학적·합리적 사고력 물려준 SK 교육법

SK그룹을 직물 회사에서 에너지·통신·반도체·배터리·바이오 등을 아우르는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는 토대를 일군 최종현 전 회장은 평소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것은 물적 재산이 아니라 재산이 만들어지는 방법”이라며 “지식이 있으면 재물은 절로 따라오며 지식 없이 재물만 있다면 오히려 불행해진다”고 강조했다.

아들인 최태원 SK 회장이 경영상의 어렵고 힘든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선친을 찾아갔을 때 최종현 전 회장은 “네 문제로구나. 네가 고민하고 네가 풀어보라”며 최 회장이 스스로 해법을 찾을 기회를 만들어 줬다. 이런 부친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최 회장도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스스로 선택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둘째 딸 민정 씨가 해군에 자원 입대했을 때도 최 회장은 자녀의 선택을 존중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 전 회장은 “경제의 기본 원칙은 합리(合理)다. 따라서 경제를 잘 알려면 ‘이(理)’, 즉 물리나 화학, 생물 가운데 하나를 공부해야 한다”며 자연과학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최 회장과 최재원 수석 부회장 형제가 대학 학부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것도 선친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최 회장은 고려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시카고대 대학원 경제학 석박사 통합과정을 수료했다. 최 수석 부회장은 브라운대 물리학과, 스탠퍼드대 대학원 재료공학 석사를 거쳐 하버드대 경영학 석사를 취득했다.

최 회장은 고교시절 문과와 이과 중 문과를 희망했는데 최 전 회장의 강권으로 이과를 선택했다. 대학에서는 물리학을 전공했다. 최 수석부회장도 최 전 회장의 가르침에 따라 대학에서 물리학을 선택했지만 ‘천재들이 하는 학문’이라는 생각이 들어 나중에 전자공학, 기계공학, 고분자공학 등의 토대가 되는 재료공학으로 전공을 바꾼 것으로 알려졌다. 

평소 자녀의 자립심, 독립심을 중요하게 여겨 스스로 해법을 찾도록 했던 최 전 회장이 이례적으로 두 아들에게 자연과학 공부를 강권한 이유는 인문학 공부는 서른이 넘어서도 할 수 있지만, 자연과학 공부는 때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 전 회장은 자신이 위스콘신대에서 화학을 공부하면서 과학적이며 합리적인 사고력을 키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SK그룹은 최 전 회장의 유지를 이어받아 그가 직접 개발한 SK의 경영 철학인 ‘SKMS’와 ‘수펙스(SUPEX)’를 통해 모든 임직원에게 고교 수준 이상의 물리·화학·생물 실력을 갖출 것을 요구한다.

 

 현대가는 밥상머리에서 예절교육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역시 어릴 적부터 엄격한 가정 교육을 통해 물려받은 올곧은 성품으로 재벌 총수답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다. 현대가 오너들은 단순히 경제적 부뿐만 아니라 경영인의 기본까지 자녀들에게 물려주려고 애썼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의 자녀 교육 원칙 중 하나는 ‘밥상머리 교육’이었다. 정 창업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자신에게 준 ‘일근천하무난사(一勤天下無難事 : 한결같이 부지런하면 천하에 어려움이 없는 법이다)’라고 쓰인 족자를 화장실에 걸어 놓고 신념으로 삼았다.

경영만 하기에도 매우 바빠 자녀 교육에 따로 시간을 낼 수 없었던 정 창업자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5시에 청운동 자택에 가족들과 모여 앉아 아침 식사를 함께했다. 자녀나 손자들이 아침 식사에 늦거나 빠지면 불호령이 떨어졌다고 한다. 아침 7시 조찬 모임에서 정 창업자가 “이게 오늘 셋째 식사”라고 얘기한 일화가 유명하다.

정의선 회장이 겸손하고 예의가 바르다는 평가를 받으며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적이 없었던 것도 어릴 적부터 집안 어른들과 아침 식사를 하며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법, 남을 배려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 자신을 낮추면서 남을 높이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기본 예절을 배운 데서 출발한 것이다.

전통적 유교 가풍으로 유명한 LG그룹도 자녀 교육이 엄격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구 씨(LG)와 허 씨(GS) 가문이 57년이나 동업 관계를 유지해 온 만큼 자손이 많은데 그로 인한 재산 다툼이나 분쟁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장자 승계 원칙을 고수했고 가족 간의 인화를 중시하는 가풍이 만들어졌다.

구인회 창업자는 자녀들에게 “한 번 사귄 사람과는 헤어지지 말고 부득이하게 헤어진다면 적이 되지 말라”고 가르쳤다. 이 때문에 범LG가는 서로 사업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다. LG그룹에 뿌리를 둔 GS·LS·LIG·LF 등이 계열 분리 시에도 경영 분쟁 등 잡음이 없었던 이유로 꼽힌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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