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 T-72 전차를 한 방에 날려버리며 세계적 스타가 된 터키의 바이락타르 TB2 무인기의 제조사인 바이카르(Baykar)가 지난 7월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린 국제방위산업박람회에서 뜻밖의 파트너와 손을 잡았습니다.
바로 대한항공과의 협력 양해각서(MOU) 체결이었죠.
겉으로는 단순한 무인기 분야 협력으로 보이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훨씬 복잡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숨어있습니다.
터키가 전 세계 무인기 시장을 휩쓸고 있는 상황에서 왜 굳이 한국과 손을 잡았을까?
여기에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가져온 예상치 못한 나비효과와 한국이 조용히 키워온 무인기 엔진 기술의 숨겨진 실력이 얽혀있습니다.
바이락타르의 성공, 그 이면의 엔진 고민
터키의 바이락타르 TB2는 그야말로 21세기 무인기 산업의 성공신화를 쓰고 있습니다.

대당 500만 달러라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실전에서 검증된 성능을 자랑하며 폴란드, 우크라이나, 카타르, 아제르바이잔 등 전 세계로 수출되고 있죠.
특히 2020년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에서 아르메니아군의 T-72 전차들을 속절없이 파괴하는 영상이 공개되면서 전 세계 군사 관계자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바이락타르의 성공 뒤에는 고질적인 문제가 하나 있는데 바로 엔진 문제입니다.
현재 TB2에는 오스트리아제 Rotax 912 iS 엔진이 탑재되어 있습니다. 수평대향 4기통 피스톤 엔진으로 출력은 100마력 정도입니다.
민간용 경비행기에나 쓰일 법한 엔진을 군용 무인기에 사용하고 있는 셈이죠.
더 큰 문제는 터키가 개발 중인 차세대 무인기들입니다.
바이락타르 크즐엘마(Kızılelma)라고 불리는 제트 추진 스텔스 무인기는 훨씬 더 강력한 터보팬 엔진이 필요합니다.

터키는 이를 위해 우크라이나의 이브첸코-프로그레스(Ivchenko-Progress)와 AI-322 터보팬 엔진 공급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그런데 이마저도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모든 계획이 틀어져버렸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바꾼 무인기 엔진 시장
우크라이나 전쟁은 바이락타르에게는 최고의 홍보 무대였지만, 동시에 최악의 공급망 위기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구소련 시절부터 항공 엔진 분야에서 상당한 기술력을 보유한 국가였습니다.
특히 이브첸코-프로그레스는 대형 수송기 An-225의 D-18 터보팬 엔진부터 소형 무인기용 AI-25 엔진까지 다양한 라인업을 갖춘 명실상부한 항공 엔진 전문업체였죠.

하지만 전쟁이 시작되면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우크라이나의 항공 엔진 생산 시설들이 러시아군의 공격을 받으면서 정상적인 생산이 어려워진 것입니다.
터키 입장에서는 차세대 무인기 개발에 필수적인 엔진 공급에 빨간불이 켜진 셈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서방 국가들의 엔진 공급은 더욱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무인기용 엔진은 미사일 기술통제체제(MTCR)와 국제무기거래규정 등 각종 수출통제의 대상이기 때문에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전문가들은 "무인기용 제트엔진은 파는 사람이 '갑'인 공급자 우선 시장"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구하기 어려운 상황인 것이죠.
한국의 숨겨진 무인기 엔진 기술력
바로 이 시점에서 한국이 터키의 레이더망에 포착되었습니다.
한국도 무인기 엔진을 구하기 어려워 우크라이나산 엔진을 수입하는 처지였지만, 동시에 독자적인 무인기 엔진 개발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무인기 엔진 개발은 KUS-X라는 스텔스 무인전투기 개발 프로젝트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국방과학연구소와 대한항공이 주도하는 이 프로젝트는 KF-21 보라매와 함께 운용할 무인 편대기를 개발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이를 위해 5,500파운드급 터보팬 엔진이 필요했고, 한화테크윈(현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이 2018년까지 개발을 완료했습니다.
한국의 무인기 엔진 개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국방과학연구소와 함께 1,400마력 터보프롭 엔진부터 1만 파운드급 터보팬 엔진까지 다양한 라인업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2025년까지 5,500파운드급 완제 엔진 개발을 완료한 후 2026년부터 실제 무인전투기에 탑재해 테스트할 계획까지 세워놓은 상태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의 무인기 엔진이 서방의 수출 통제나 정치적 제재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점입니다.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과 달리 한국은 터키와 특별한 정치적 갈등이 없어 안정적인 공급이 가능한 파트너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죠.
무인기 엔진 시장의 숨겨진 기회
한국과 터키의 협력 배경을 이해하려면 먼저 무인기 엔진 시장의 특수성을 알아야 합니다.
전통적인 항공기 엔진 시장과 달리 무인기 엔진은 상당히 폐쇄적인 시장입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극소수 국가만이 제대로 된 무인기용 터보팬 엔진을 생산할 수 있고, 대부분 자국 내 수요를 우선시하거나 정치적 이유로 수출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 들어 무인 편대기(Loyal Wingman) 개념이 부상하면서 중간 급 무인기용 엔진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CCA(Collaborative Combat Aircraft)라는 이름으로 1,000여 대 이상의 무인편대기를 구매할 예정이고, 다른 선진국들도 비슷한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수요 증가에도 불구하고 공급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기존 엔진 제조업체들은 유인 전투기용 대형 엔진 개발에 집중하고 있어 중간급 무인기 엔진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바로 이 틈새시장에서 한국의 기회가 열리고 있는 것이죠.
양국의 윈-윈 전략
터키와 한국의 협력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완벽한 윈-윈 구조입니다.
터키는 세계적으로 검증된 무인기 플랫폼 기술과 글로벌 마케팅 역량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바이락타르 TB2의 성공으로 이미 전 세계에 터키제 무인기의 신뢰성이 입증되었고, 수십 개국이 도입을 검토하거나 계약을 체결한 상태입니다.

반면 한국은 상대적으로 무인기 플랫폼에서는 뒤처져 있지만, 엔진 기술에서는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습니다.
특히 한국의 엔진은 서방의 수출 통제나 정치적 제재에서 자유롭다는 큰 장점이 있어, 터키 입장에서는 우크라이나산 엔진의 불안정한 공급을 대체할 수 있는 안정적인 파트너를 찾은 셈이죠.
더욱 흥미로운 것은 양국 모두 무인기 분야에서 후발주자였다는 점입니다.
터키는 미국이 무인기 판매를 거부하자 자체 개발에 나섰고, 한국도 KF-21과 연동할 무인 편대기가 필요해 독자 개발을 시작했습니다.
이런 공통점이 양국 간 협력의 기반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무인기 시대의 새로운 파트너십
대한항공과 바이카르의 협력은 단순한 기술 제휴를 넘어 무인기 시대의 새로운 국제 분업 구조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항공 산업은 미국과 유럽이 독점해왔지만, 무인기 분야에서는 터키, 이스라엘, 중국 같은 신흥 강국들이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의 경우 그동안 항공기 제조에서는 부품 공급업체 역할에 머물렀지만, 무인기 엔진 분야에서는 완제품 수출업체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맞고 있습니다.
터키와의 협력이 성공한다면 한국산 엔진이 바이락타르라는 검증된 플랫폼을 통해 전 세계로 수출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죠.
물론 아직 구체적인 협력 내용이 공개되지 않아 섣불리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양국의 협력 필요성과 상호 보완성을 고려할 때, 이번 MOU는 단순한 의례적 협약이 아닌 실질적인 기술 협력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가져온 예상치 못한 기회를 한국이 어떻게 활용할지 주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