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우(穀雨), 봄비가 곡식을 살찌우는 시기
볍씨 담그는 날, 부정 탄 사람은 얼씬도 못해
고로쇠 수액과 다른 봄 약수 ‘곡우물’ 받기도
남쪽 차농가, 동틀 무렵 찻잎 따는 손길 분주
바닷물 온도 올라 조기·도미 등 해산물 제철

“곡우에 가물면 땅이 석 자나 마른다.”
봄비가 내려 백곡(百穀)을 기름지게 한다는 뜻의 곡우(穀雨)는 이름 자체가 농부의 간절함을 품고 있다. 24절기 여섯번째로, 올해는 4월20일이다. 입하(立夏)가 오기 전 바쁜 농부의 발걸음 사이로 만물이 화사함을 뽐낸다.

농사에 중요한 볍씨를 다루기에 많은 금기가 존재했다. 초상집에 다녀왔거나 부정한 일을 겪은 사람은 볍씨 곁에 얼씬도 못했다. 부정한 기운이 닿으면 싹이 트지 않는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부득이한 경우라면 대문 밖에서 짚불을 피워 그 위를 뛰어넘고, 소금과 쑥 연기로 몸을 정화한 뒤에야 집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일부 지역에는 곡우날 부부의 합방을 금하는 풍습도 있었다. 만물이 싹을 틔우는 이날에 남녀가 함께 잠을 자면 땅을 관장하는 토신(土神)이 질투해 가을에 쭉정이 농사를 짓게 만든다고 믿기도 했다.
이른 봄 경칩 무렵에 마시는 고로쇠 수액과 비슷해 보이나 다르다. 고로쇠 수액은 단풍나무과, 곡우물은 자작나무과 나무에서 얻는다. 농가 기록을 보면 곡우물은 고로쇠 수액보다 더 투명하고 산뜻한 맛이 나지만 채취할 수 있는 기간이 훨씬 짧아 구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흥덕왕 3년(828년), 당나라로 갔다가 돌아온 대렴(大廉)이 차 종자를 가져와 지리산 자락에 심었다. 한국 차의 시배지(始培地)로 여겨지는 이곳의 다원들은 해마다 곡우 무렵 분주하다. 봄볕을 받은 새순은 봄비를 맞는 순간 빠르게 자라기 때문이다. 한번 자라버리면 그 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기계를 사용할 수도 없다. 가장 여리고 작은 새순만 골라 손으로 일일이 꺾어야 한다. 한 사람이 하루 종일 잎을 따도 거둘 수 있는 양은 한정적이다. 그러니 곡우 전에 딴 찻잎이 귀할 수밖에 없다.

곡우가 지나면 찻잎은 비를 맞고 훌쩍 자란다. 곡우에서 입하 사이에 딴 차를 세작(細雀)이라 한다. 작설차(雀舌茶)라는 별칭도 여기서 비롯됐다. 곡우 전후로 찻잎이 참새의 혀처럼 작고 뾰족한 모양을 갖출 때 붙인 이름으로, 통상적으로 곡우 이전부터 입하 무렵까지 수확하는 우전과 세작을 아울러 가리키는 말이다. 세작은 우전에 비해 생산량은 늘어나지만, 맛의 섬세함은 조금 준다. 이후 잎이 더 자라면 중작(中作)·대작(大作)으로 이름이 바뀐다.

바다에서는 조기가 올라왔다. 흑산도 근처에서 겨울을 난 조기 떼가 산란을 위해 북상하며 인천 부근까지 올라오는데, 이때 잡힌 조기를 특별히 ‘곡우살이’라 불렀다. 크기는 크지 않지만 알이 꽉 차고 살이 부드러워 최상품으로 쳤다. ‘동의보감’에도 조기는 성질이 온화하고 위장을 돕는 효능이 뛰어나 노약자와 병을 앓는 이들에게 좋다고 기록했다. 서해 지역에서는 무와 조기, 고추장과 된장을 푼 ‘곡우사릿국’을 제철음식으로 여겼다.
도미도 제철이었다. 조기잡이가 마무리될 즈음 뒤를 이어 올라오는 도미는 흰 살이 단단하고 담백해 환영받았다. 국과 구이는 물론 손이 많이 가는 어만두(魚饅頭) 재료로도 쓰였다. 어만두는 밀가루 대신 얇게 저민 생선살을 피로 삼아 소를 감싼 음식이다. 왕실과 양반가를 중심으로 즐겨 먹던 별미였다.
◇도움말=‘24절기 이야기’(한호철 지음, 지식과교양), 한국세시풍속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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