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미문화원 폭탄테러 고교생 즉사…애먼 대학생 고문, 범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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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독재 시절인 1983년 9월 22일 대구 시내 중심가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났다.
이날 밤 9시께 고등학교 1학년 허병철 군은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던 길 대구 미국문화원 정문 앞에서 수상한 가방을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앞서 발생한 1980년 광주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은 대구 미국문화원 폭탄테러 수사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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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공작원 소행으로 밝혀져…억울한 옥살이 보상은 겨우 6300만원뿐
(서울=뉴스1) 김송이 기자 = 군부독재 시절인 1983년 9월 22일 대구 시내 중심가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났다. 이날 밤 9시께 고등학교 1학년 허병철 군은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던 길 대구 미국문화원 정문 앞에서 수상한 가방을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관할 파출소 순경과 함께 다시 현장에 돌아간 허 군이 가방을 들어 보이는 순간 엄청난 폭발음이 터져 나오면서 건물이 진동했다. 주변 유리창 500여 개가 깨졌을 정도로 큰 폭발이 일어났고, 허 군은 즉사했다.
◇ 희대의 '고문 기술자' 앞에서 자백한 5명의 대학생
앞서 발생한 1980년 광주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은 대구 미국문화원 폭탄테러 수사에도 영향을 미쳤다.
전두환 정권은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경찰 등으로 합동신문조(합신조)를 구성해 1년간 무려 74만여 명을 용의선상에 올리고 수사했으나 범인은 나오지 않았다.
수사가 길어질 조짐을 보이자 합신조는 5명의 범인을 특정했다. 당시 경북대학교 학생이었던 박종덕, 안상학, 우성수, 손호만, 함종호 씨였다. 앞선 두 문화원 방화 사건의 범인이 대학생과 청년이었기 때문이다.
대구 원대동 대공분실로 끌려간 5명은 혐의를 부인했다. 그러자 당시 '고문 기술자'로 악명이 높았던 공안 경찰 이근안이 투입됐고, 한 달간 지독한 고문과 신문이 이어졌다. 갖은 가혹행위에 시달린 5명의 학생은 그렇게 항복, 자백했다.
◇ 다대포 침투 간첩 "남파되기 전 '대구 미국문화원 폭파 성공' 보고 들었다"
3개월 후인 그해 12월 3일 부산 다대포 해안에서 무장간첩 2명이 생포됐는데 이들은 뜻밖의 사실을 털어놨다.
간첩 전충남은 기자회견에서 "(북한에서 훈련받을 때 훈련소 무전장이) 9월 말쯤 나한테 와서 본인이 전파 감청해서 암호를 해독한 결과 '대구 미국문화원 폭파 성공'이라는 내용을 감청했다고 자랑삼아 말했다"며 "남조선 청년 학생들이 반미 감정이 높아서 일으킨 게 아니고 우리 공작원의 용감한 행동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구나 하고 높은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대구 미국문화원을 폭파한 진범은 북한 노동당 연락부 소속 공작원 이철이었고, 붙잡혀간 5명의 대학생은 억울하게 누명을 쓴 것이었다. 하지만 진실이 드러난 뒤에도 재판받기 위해 수감돼있던 5명의 학생은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이들의 원래 혐의는 해소됐으나 국가보안법, 반공법, 집시법 위반 등 각종 죄목이 추가됐다.
억울하게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됐던 박종덕 씨는 재판에서 징역 3년을, 나머지 4명은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 수십 년 세월 고문 트라우마에 시달렸으나 국가배상은…
억울한 청년들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진 건 수십 년 뒤였다. 이들은 2013년 재심을 청구했고, 폭발 사건 후 35년이 지난 2018년 10월에서야 비로소 재심이 열렸다.
주범으로 몰렸던 박종덕 씨는 "밤마다 꿈을 꾸면 악몽에 시달리고 두들겨 맞고 고문당하는 꿈을 꾼다. 그걸 30년 넘게 해보세요. 그게 사람 사는 겁니까"라며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최종적으로 2019년 10월 재판부는 대구 미국문화원 폭파 사건과 관련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등으로 기소된 박종덕 씨 등 피고인 5명에 대한 재심에서 징역형 등이 선고됐던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 안타깝게도 5명의 피해자 중 우성수 씨는 2005년 사망해 재심 결과를 보지도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박종덕 씨는 국가폭력의 희생자로 살아온 세월에 대해 18억 원의 배상금을 청구했는데, 그가 인정받은 금액은 단 6300만 원이었다. 법원은 다른 피해자 4인에 대해선 소멸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syk13@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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