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체 모든 것… K바이오, DNA로 미래질병 해독하다
지난해 31조원 규모서
2034년 93조원 육박할듯
미·영 등 주요 선진국은
국가 차원 데이터 구축 속도
韓은 규제 묶여 제자리걸음
美,中견제 '생물보안법' 추진
K기업 대체 파트너로 부상

혈액 한 방울로 암 위험을 예측하고, 타액(침) 한 방울로 노화 속도를 측정하는 기술이 더 이상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의 모든 유전 정보를 읽어내는 유전체 분석은 정밀 의료와 신약 개발, 맞춤 영양, 질병 예방을 아우르는 핵심 기술로 자리 잡았다.
시장조사업체 프리시던스 리서치에 따르면 글로벌 유전자 검사 시장은 지난해 약 218억달러(31조원) 규모에서 2034년에는 650억달러(93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연평균 11.5%에 달하는 성장률이다.
유전체 분석은 인간이 가진 모든 유전 정보(DNA 염기서열)를 읽어내 질병 위험과 약물 반응, 체질적 특성 등을 파악하는 기술이다. 즉 사람의 몸속에 저장된 '타고난 설계도'를 해독하는 과정이다. 분석은 혈액이나 타액 등에서 DNA를 추출해 염기서열(ATGC)을 하나씩 해독한 후 그 데이터를 분석해 유전적 변이를 찾아내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이는 혈액 속에서 질병 신호를 찾아내는 액체생검이나 병원·검사실에서 시행하는 임상 진단과는 구별된다. 액체생검이나 임상 진단이 현재 인체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질병을 '진단'하는 기술이라면, 유전체 분석은 개인의 유전적 정보를 기반으로 미래 질병 위험을 '예측'하는 기술이다.
유전체 분석은 목적과 활용 영역에 따라 여러 형태로 나뉜다. 가장 대중적인 방식은 소비자가 직접 신청하는 '소비자직접의뢰(DTC) 검사'로, 병원 처방 없이 타액 등으로 체질·영양·피부유전형을 확인하는 서비스다. 임상유전체 분석은 병원에서 암·희귀질환·약물 반응 등을 진단하기 위해 시행하는 검사로, 차세대염기서열분석(NGS) 기술이 핵심이다. 국가나 연구기관이 대규모 인구집단의 유전정보를 수집·활용하는 연구·코호트 유전체 분석, 개인의 유전형에 따라 약물 반응을 예측하는 '약물유전체'도 있다.
미국과 영국 등 주요 선진국은 이미 국가 단위의 유전체 데이터 구축에 속도를 내고 있다. 미국은 국립보건원(NIH)이 주도하는 '올오브어스(All of Us)' 프로젝트를 통해 100만명 이상의 국민 유전체를 분석해 맞춤형 의료 데이터베이스를 구축 중이다. 이 데이터는 제약사와 연구기관에 개방돼 신약개발과 질병 예측 연구에 활용되고 있다.

영국은 세계 최초로 '10만 게놈 프로젝트(100000 Genomes Project)'를 완료하며 암·희귀질환 환자의 유전체 정보를 국가 보건의료시스템(NHS)과 연계했다. 현재는 500만명 규모의 차세대 '지노믹스 잉글랜드(Genomics England) 2.0'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이 같은 국가 차원의 유전체 데이터 구축은 단순한 연구 차원을 넘어 정밀진단, 신약개발, 공중보건 전략의 핵심 인프라로 활용되고 있다. 실제로 영국에서는 유전체 정보 기반으로 암 맞춤 항암제를 처방받는 사례가 늘고 있으며, 미국 주요 병원들은 개인의 유전적 약물 반응 정보를 전자의무기록(EMR)에 연동해 부작용 없는 처방 체계를 운영하고 있다.
유전체 분석은 단순히 질병을 예측하거나 건강을 진단하는 수준을 넘어 글로벌 바이오산업의 핵심 동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미국의 '일루미나'는 유전체 시퀀싱(염기서열 분석) 분야의 절대 강자로, 전 세계 분석 장비 시장의 70% 이상을 점유하며 사실상 글로벌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단일세포(싱글셀) 분석을 기반으로 유전자 발현 차이를 정밀하게 해석하는 미국 10x지노믹스(10x Genomics)는 혁신 기술을 앞세워 세포 수준의 유전자 연구를 선도하고 있으며, 시가총액은 약 15억달러(2조원) 안팎으로 형성돼 있다. 중국의 BGI와 자회사 노보진 등은 대규모 염기서열 분석 처리 능력과 저비용 경쟁력을 내세워 글로벌 연구기관과 제약사들의 대형 프로젝트를 잇달아 수주하고 있다.
이에 반해 한국의 유전체 산업은 제자리걸음이다. 세계 시장이 수십 조원 규모로 성장하는 사이 국내 유전자 검사 시장 규모는 500억원 수준(업계 추정)에 머물러 있다. 기술력은 세계 상위권으로 평가받지만 까다로운 규제와 낮은 수익성, 제한적인 데이터 활용 구조가 발목을 잡는다. 한국유전체기업협의회에 따르면 회원사는 2023년 28곳에서 올해 18곳으로 줄었고, 이 가운데 실제 매출을 내는 곳은 14곳 정도에 불과하다.
국내 기업들 중에서는 상장폐지나 거래정지, 폐업, 인수·합병 과정에서의 사업부 정리 등으로 사업 지속이 어려워진 사례가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
업계는 시장의 급속한 위축 원인으로 제도적 한계를 지적한다. 2020년 도입된 DTC 유전자검사 인증제는 산업 신뢰도 제고를 목표로 했지만, 실제로는 과도한 심사와 제한적인 검사 항목 탓에 기업들의 수익성을 오히려 떨어뜨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질병 예측이나 진단 항목이 금지돼 헬스케어 항목에만 머물면서 소비자 관심이 급감했고, 검사 단가 역시 장비 고도화에 비해 낮게 형성됐다. 분석 장비 발달로 비용이 줄었음에도 경쟁이 과열되면서 업계 수익성은 5년 전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엔젠바이오와 바이오니아 등은 수익성 악화로 DTC 사업을 축소하거나 철수했다.
특히 국내에서는 유전체 데이터를 의료·보험·제약 연구와 연계하기 어렵고, 개인정보 규제가 엄격해 확보한 데이터조차 산업화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유전체 분석업계 관계자는 "2020년대 초까지만 해도 기업들이 시장에 활발하게 뛰어들었지만, 인증제가 시행된 뒤 과도한 규제와 관리가 발목을 잡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라고 말했다.
국내 기업들은 내수 한계와 제도적 제약을 벗어나기 위해 해외 시장에서 돌파구를 찾고 있다. 마크로젠은 하반기 미세잔존암(MRD) 액체생검 서비스를 출시해 완치 후 재발 위험이 높은 환자군과 프리미엄 검진 시장을 공략할 계획이다. 혈액 속에 남은 미량의 암세포 DNA를 분석해 재발 여부를 조기 진단하는 기술로, 기존 조직검사보다 환자 부담이 낮고 정확도가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 자회사 소마젠을 통해서는 모더나와 미국 국립보건원(NIH) 프로젝트를 잇따라 수주하며 해외 매출 비중을 전체의 60% 이상으로 끌어올렸다.
GC지놈은 비침습적 산전검사(NIPT) 'G-NIPT'와 다중암 조기선별검사 '아이캔서치'의 고도화를 추진하고 있다. 아이캔서치는 상반기 매출이 8배 이상 성장했으며, 하반기에는 검사 항목을 10종으로 확대하고 일본암치료학회와 중동 현지 학회 발표도 준비 중이다. 메디젠휴먼케어는 노화 관련 유전자를 분석해 신체 나이를 측정하는 안티에이징 서비스로 동남아 시장 진출을 추진 중이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호주 등 주요 거점에서 현지 파트너십을 확보하며 이르면 연내 출시를 앞두고 있다.
최근 미국 의회가 추진 중인 '생물보안법(Biosecure Act)'도 글로벌 유전체 산업의 판도를 바꾸는 변수로 떠올랐다. 해당 법안은 미국 내에서 중국계 바이오기업의 활동과 데이터 접근을 제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미 하원에 이어 상원을 통과해 연내 입법 가능성이 높아졌다. 초안에는 유전체 분석 기업 BGI, MGI, 컴플리트지노믹스 등이 '우려 기업'으로 명시돼 있다. 사실상 미국 내 공공 프로젝트 참여나 현지 제약사와의 계약이 금지되는 셈이다. 미국 시장에서 중국 기업의 영향력이 약화될 것으로 전망되면서, 기술력과 데이터 관리 역량을 갖춘 한국 기업들이 대체 파트너로 부상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유전체 산업을 단순한 헬스케어 영역이 아닌 '국가 전략산업'으로 봐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유전체 데이터는 의료·제약·보험·AI 산업 전반의 기반이 되는 만큼, 국가 차원의 데이터 주권과 산업화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신동직 메디젠휴먼케어 대표이사는 "기업이 확보하는 검체와 분석 데이터를 보건복지부 또는 과학기술부에서 운영하는 인체유래물은행 및 국가바이오뱅크로 이관해 정부가 안전하게 보관하도록 하고 데이터 생산, 분석, 알고리즘 개발에는 민간기업이 참여해 분석 데이터 활용에 대한 우선권을 보장받는 구조를 제안하려고 한다"고 강조했다.
유전체 검사 받으려면
국내에서도 간편하게 유전체 검사를 받아볼 수 있다. 소비자직접의뢰(DTC) 검사 서비스가 확대되면서 병원 처방 없이 타액이나 면봉으로 채취한 구강세포를 보내면 체질, 영양, 피부 유전형 등을 확인할 수 있다. 검사는 주로 타액이나 면봉으로 채취한 구강상피세포에서 DNA를 추출해 진행되며 건강기능, 영양, 체형, 피부, 탈모, 수면, 카페인 대사 등 수십 가지 항목을 분석할 수 있다. 서비스 종류에 따라 항목은 20~100여 개로 다양하다. 가격은 간단한 체질형 검사는 3만~5만원대, 종합형 패키지는 10만~30만원대로 형성돼 있다. 소비자가 온라인으로 키트(채취 도구)를 주문해 시료를 보낸 뒤 1~2주 내 결과를 모바일 앱이나 웹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만 현재는 질병 예측이나 진단 관련 항목이 금지돼 있어 주로 건강관리·생활습관 개선 중심의 항목에 한정돼 있다.
[왕해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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