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만 들어도 끔찍한 ‘자살절벽’…돌 많이 쓰던 조선시대와 연관있다고? [서울지리지]

배한철 기자(hcbae@mk.co.kr) 2024. 9. 17.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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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정신을 떠받친 한양의 채석장
낙산(낙타산)의 좌룡정 활터. 남자들이 낙산 일원의 성벽에서 활을 쏘고 있다. 활을 겨누는 방향이 창신동 돌산이다. 창신동 돌산은 낙산의 자락으로 풍광이 수려했다. 하지만 오랜기간 채석장으로 이용되면서 황폐화됐다. [국립민속박물관]
좌룡정 활터 각석. 활터는 사라졌고 좌룡정 각자만 낙산 성벽에 남았다. [배한철기자]
“광화문의 선단석(縇端石·아치 밑을 받치는 돌)을 영풍정(映楓亭)에서 떼어왔다. 훈련도감(訓鍊都監·한성부 수비군)의 자원 부역군 725명이 끌고 왔다.”

1865년(고종 2)~1868년(고종 5) 경복궁 중건과정을 적은 <경복궁영건일기>의 내용이다. 영풍정은 종로 창신동 돌산에 있던 정자다. 19세기 편찬된 <동국여지비고>는 “동대문 밖 연미정동(燕尾亭洞)에 훈련도감 군마의 기예를 시험하는 곳이 있고 영풍정이 있다”고 했다.

창신동 돌산은 낙산(낙타산) 자락으로 예로부터 풍광이 수려해 도성 주변 명승지로 꼽혔다. 그러나 화강석의 질이 뛰어나고 무엇보다 도심과 가까워 채석장으로 널리 활용되면서 환경이 크게 파괴됐다. 현재 서울경찰청 기동본부와 창신아파트 서편에 산의 단면을 잘라낸 듯한 수직절벽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이곳이 채석장 장소다. 고종대 경복궁 주요 전각을 중건할 때 창신동 채석장의 돌을 가져다 썼다. <경복궁영건일기>는 광화문 선단석 뿐 아니라 영추문 홍예석(虹霓石·아치형 석재), 경회루 기둥도 창신동에서 가져왔다고 언급한다.

경복궁 주요 전각, 서울역, 한국은행 건물 창신동 채석장 돌로 건축
창신동 채석장 흔적. [배한철기자]
창신동 채석장 터의 무허가 건물들. 창신동 채석장은 폐쇄 후 방치돼 쓰레기 처리시설과 무허가 주택들이 생기면서 도심흉물이 됐다. [배한철기자]
도심의 대형 공사장들도 창신동 돌을 탐냈다. <경운궁중건도감의궤>에 의하면, 1906년 벨기에 공사관이 공사관을 신축하기 위해 영풍정 뒷산의 석재 사용허가를 요청했지만 경무청은 금처(禁處)라며 불허했다. 일제강점기에도 1912년 조선은행(한국은행)과 1925년 경성역(서울역), 1926년 경성부청(서울시청)·조선총독부를 지을 때 창신동 석재를 사용했다. 광복 후 시영채석장이 운영되다가 주민 민원이 제기되자 1961년 폐쇄됐다. 현재 암벽은 콘크리트로 덮여 있는 상태며 채석장 터 가까이는 쓰레기 처리시설과 무허가 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창신동 채석장 동편의 숭인동 동망봉도 채석장으로 쓰여 숭인주차장쪽이 절개돼 있다.

안암동 고려대 뒷산인 개운산(開運山)은 조선 초부터 채석장으로 활용됐다. <세종실록> 1420년(세종 2) 8월 17일 기사에 따르면, 왕릉 석실 덮개가 너무 무겁고 부피가 커 운반에 어려움을 겪자 상왕(태종)은 “두 개로 나눠 옮기라”고 명한다. 신하들이 이를 반대하자 상왕은 안암동 석처(石處·채석장)로 직접 거둥해 석공을 시켜 철퇴로 덮개 돌을 쪼개 둘로 만들어 버렸다. 안암동의 석처는 지형적 구조로 봤을 때 개운산으로 추정된다. 개운산은 돌산으로 모양이 북처럼 생겼다고 해서 북바위, 한자로는 고암(鼓岩) 또는 종암(鐘岩) 등으로 호칭됐다. 오늘날 종암동의 지명이 여기서 유래했다.

<경복궁영건일기>에 해창위계(海昌尉契) 돌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몇 군데 나타나는데 이 역시 개운산을 일컫는다. 개운산 동편의 숭례초 주변에 현종의 3녀 명안공주(明安公主·1665~1687)와 남편인 해창위(海昌尉) 오태주(吳泰周·1668~1716) 묘가 있어 일대를 이렇게 불렀다. 해창위와 명안공주의 묘는 안산 시사동으로 이장됐다.

숭인동 동망봉 채석장 모습. 창신동 채석장 동편 동망봉에도 넓은 절개면이 드러나 있다. [배한철기자]
고려대 지을때 종암채석장에서 돌 조달, 서울 북망산 길음에도 대형 채석장 존재
돈암동 개운초등학교 뒤편의 채석장 자취. 종암 채석장으로도 불렸던 개운산 채석장은 조선시대 뿐만 아니라 1960년대까지도 활발히 운영됐다. 인근 고려대의 건물을 지을때 개운산의 돌을 썼다. [배한철기자]
개운산 채석장은 종암 채석장이라고도 지금도 개운산 북쪽의 개운초, 개운산 남쪽의 종암중 주변에서 채석장 자취가 발견된다. 고려대 석조건물 건축 때 종암채석장의 돌을 이용했으며 채석장은 1960년대까지도 운영됐다.

북한산 칼바위능선 자락에 위치한 성북구 길음뉴타운 신안파크아파트, 길음중·길음초 일대에도 대형 채석장이 존재했으며 이곳에서는 비교적 최근인 1970년대 후반까지 채석이 이뤄졌다. 조선시대 건축용 석재가 채취됐고 일제강점기에는 길음동에 대규모 공동묘지가 조성되면서 묘지 비석이나 계단을 만드는 대리석을 생산했다. 채석장은 90도에 가까운 가파른 직벽으로 돼 있어 한때 생활고를 겪던 사람들이 절벽 위에서 투신하면서 ‘자살절벽’으로 불리기도 했다.

석재 수요 많았던 한양, 도성 주변에 크고 작은 채석장 산재
서대문구 홍은동의 옥천암 보도각 백불. 경복궁에서 직선으로 2.2㎞ 거리의 옥천암 일대도 채석장으로 이용됐다. 도성 가까운 지역의 돌은 궁궐 등 건물을 짓는데 주로 활용됐다. 성곽수축 등 대량의 석재는 동쪽은 노원, 서쪽은 녹번에서 조달했다. [배한철기자]
시멘트가 발명(19세기 중반)되기 전에는 석재가 최고의 건축자재였다. 조선시대 서울은 성곽은 물론 궁궐, 왕릉, 각 관청, 벼슬아치들의 고급 주택 등의 석재 수요는 지방의 다른 도시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다행히 서울은 지질구조가 암반인 데다 크고 작은 바위산이 곳곳에 산재해 양질의 화강석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서울의 주요 채석장은 어디에 있었을까.

국립문화재연구원이 조선왕조실록과 비변사등록(謄錄·업무일지), 승정원일기 등 총 79종의 문헌, 592건의 기사를 분석한 결과, 석재 공급처는 △궁궐(인경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덕궁, 대보단, 경복궁 등) : 창의문 밖, 우이동(우이천 계곡), 창의문 밖 사암동(獅岩洞·평창동), 옹암동(瓮岩洞·독바위역), 선암(禪岩·인왕산 선바위) 근처, 조계(북한산 구천계곡), 노원(수락산), 삼청동(삼청공원 동북쪽), 옥천암(홍은동), 영풍정(창신동), 해창위계(종암동), 납대울(불암산 아래 중계동), 상계, 손가정(孫哥亭·북한산 정릉3동), 동소문 밖, 안남동(安南洞), 사월리(沙月里), 불암(불암산), 홍제원 근처, 수마동(水麻洞·홍은동), 청수동(淸水洞·정릉4동), 한북문(漢北門·홍지문) 밖 △종묘(정전, 영녕전) : 조계, 창의문 밖, 노원 구내동(仇乃洞) △진전(眞殿·어전 전각) : 도성암(道成菴‧수유동), 조계, 우이동 △사묘(祠廟·사당) : 창의문 밖 서운사(棲雲寺) 근처, 노원 △성곽 : 성 밖 사동(寺洞‧홍제동 인왕중 일원) 근처, 성내 사동(寺洞), 소녹번(불광역), 대녹번(녹번역 남쪽), 안현(안산) 아래 동네 골짜기, 노원, 성밖 두모현(옥수동) △왕릉 : 조계, 노원 중계·상계, 불암, 사기막동(고양 효자동), 우이동, 중흥동(고양 북한동), 진관 삼천리동(은평구 진관동 삼천사 계곡), 가오리(수유동) 등이다.

조선 초와 중기에는 가까운 도성 주변에서 석채를 취재했지만 조선후기 이후 풍수지리에 입각해 설계된 한양궁궐을 중심으로 주변 사산(四山)의 지맥(地脈)을 보존하기 위해 부석(孚石·채석)을 엄격히 금지했다.

도성 주변 사산(四山) 지맥 보호 위해 채석 엄격히 금지, 궁궐은 예외
채석을 금지하는 표시인 ‘금표’. 지맥 보호를 위해 바위에 채석 금지를 새겼다. [국가유산청]
정조대 경복궁에서 700m 남짓한 서촌 명소 필운대(弼雲臺·이항복 집터)에서 돌을 캐다가 적발돼 논란이 됐다. <금위영등록> 1787년(정조 11) 7월 18일 기사에 따르면, 비변사가 정조에게 “필운대 근처의 석재를 떠낸 일이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니 매우 놀랍습니다”고 고했다. 정조는 “관련된 자를 엄히 다스리고 떠낸 곳을 즉시 메우라”고 명했다. 그러나 조선말까지도 중요한 전각이거나 돌이 무거워 불가피하게 도성 안에서 부석해야 할 경우 삼청동에서 채석했다. 1865년(고종 2) 경복궁 중건 때 경회루 돌기둥과 신무문 홍예석을 삼청동에서 부석했다. <경복궁영건일기> 1865년(고종 2) 5월 26일 기사는 “경회루 돌기둥 1개를 삼청동에서 떠내어 묶어서 끌어왔다. 금위대장 이경하(1811~1891)가 휘하의 병사 300명을 데리고 하루 반 동안 끌어서 궁 안으로 옮겼다. … 기둥은 48개이며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의 삼군영에서 각각 16개를 담당하여 떠서 가져왔다”고 했다.

삼청동 채석장의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 다만, <금위영등록> 1704년(숙종 30) 5월 20일 기사는 “노인들이 전하는 말로는 경회루(임진왜란 화재 이전 건물) 돌기둥을 삼청동 동쪽 비탈에서 떠냈다고 하였는데…”라고 했다. 이 기록으로 미뤄 말바위 전망대 아래쪽으로 짐작간다.

창의문 밖은 통칭해 서교(西郊)로 분류된다. 도성 근처 5리(2㎞) 내외 지역으로 조선 초·중기 석재 주요 공급지였다. 대표적인 부석처로 사동, 녹번, 옥천암, 옹암동, 사암동 등이 있다. <금위영도성개축등록>, <금위영등록>, <어영청등록> 등 군영 등록에는 성곽을 축성하기 위한 채석지로 사동이 오랜 기간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여지도>의 ‘도성도’에 표기된 사동(寺洞)은 현재 서대문구 홍제3동이며 인왕산 서북단의 지역이다.

돌산인 인왕산과 그 맞은편 안산 자락에는 채석처가 집중적으로 분포했다. 안산 동북 사면의 기원정사(홍제동 79-116) 뒤편, 인왕산 서쪽 사면의 환희사(홍제동 산 1-1) 진입로, 문화촌현대아파트(홍제동 463) 뒤편, 인왕산 남쪽의 인왕사(종로 무악동 산 2-13)와 인왕산 선바위(무악동 산 3-12) 절개지 암벽이 채석장으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물 마애보살좌상(일명 보도각 백불)이 있는 옥천암에서도 채석을 했다. <경복궁영건일기> 1865년 기록은 광화문 홍예석을 옥천암에서 부석했다고 했다. 백불 인근의 암반에서 채석 흔적이 관찰된다.

조선후기 이후 수락산·불암산과 우이, 구천계곡 등 북한산 계곡 석재 집중 채취
성곽 축성의 부석처로 녹번도 자주 나타난다. <금위영도성개축등록> 1700년(숙종 26) 2월과 7일 기사는 “숭례문 북쪽과 남쪽의 성곽이 붕괴된 부분을 녹번현 근처에서 돌을 가져와 개축한다”고 했다. <여지도>를 비롯한 여러 한양 지도에서 대녹번과 소녹번이라는 명칭이 확인된다. 지하철 3호선 녹번역 근처 레미안베라힐즈아파트(녹번동 283) 뒤편 등산로와 공원에서 채석장 자취를 찾을 수 있다.

옹암동은 녹번의 북쪽에 위치한 북한산 자락으로 지하철 6호선 독바위역 부근을 말한다. 북한산 족두리봉(수리봉) 부근에 독과 같이 생긴 독바위가 있어 옹암(瓮岩)으로 호칭됐다. 채석장은 불광사(불광동 25-1) 일원으로 보인다. 창의문 밖 사암동은 <창덕궁만수전수리도감의궤> 1656년 기록에 부석처로 기록돼 있다. 사암(獅岩)은 사자바위다. <동국여도> ‘연융대도(鍊戎臺圖)’를 보면 사암은 선혜청 신창(현 예능교회·종로 평창동 156) 뒤에 서 있다.

동대문 밖 채석장은 동교(東郊·동쪽 교외)로 언급되며 노원, 불암, 우이, 조계 등이 있다. 1617년(광해군 9) 인경궁(서촌의 궁궐) 영건 과정에서 규모가 큰 석재는 동교에서 부석했다는 내용이 나타난다. 18세기 후반부터는 동교가 서교(西郊)에 비해 훨씬 빈번하게 부석처로 등장한다. 동교 중에서도 노원의 돌을 제일 많이 썼다. 정조 11년(1787)부터 조선 말기인 순조, 현종, 철종까지의 도성 복원 석재는 도성의 방위에 상관없이 노원에서만 공급됐다.

노원 채석처는 불암산 서쪽 사면인 중계동, 수락산 남쪽 사면인 상계동 등을 말한다. 중계동 납대울 위쪽 학도암 부근에서는 지금도 채석 흔적이 발견되며 수락산 남쪽(수락산스포츠타운 계곡)에는 1960~70년대까지 채석장으로 활용됐던 채석장터가 존재한다. 노원지역은 도성에서 거리가 43리(17㎞) 이상 떨어져 있어 석재운송을 위해 많은 공역이 소요됐다. <숙종실록> 1704년(숙종 30) 3월 25일 기사에 따르면, 도성수축에 소요되는 돌을 노원과 주암(舟巖) 등지에서 가져오게 했다. 돌을 이동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사람들이 모두 원망했다. 따라서 석재 운송시 중랑천과 한강 수로를 이용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채석장으로 쓰였던 수락산과 불암산. 수락산 정상에서 바라본 수락산 능선 모습. 멀리 뽀족한 산은 불암산이다. 조선시대 노원채석장은 수락산과 불암산을 말한다. 성곽수축 등 대량의 석재가 필요한 공사장에서 주로 조달했다. [배한철 기자]
우이와 조계는 북한산 동편의 계곡들이다. 북한산 여러 계곡에도 부석처가 산재했다. 우이는 현재의 지명과 같으며 북한산 진달래능선 등산로 입구쪽 우이천 계곡에 채석처 터가 확인된다. 조계(曹溪)는 수유동 구천계곡을 지칭하며 돌의 품질이 좋아 궁궐과 왕릉의 석재를 이곳에서 많이 조달했다. 구천계곡은 경치가 아름다워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이 별장(松溪別業·송계별업)을 짓기도 했다. 남양주 진건읍 소재 사릉(단종비 정순왕후 능)의 석물도 조계에서 채석했다. 구천계곡 입구의 국립통일교육원 옆에 ‘사릉 석물 채석장 터(思陵石物採石場址)’가 2019년 8월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됐다.
수려한 경관을 자랑했던 명소들, 오랜기간 채석으로 황폐화 아쉬움
조계와 도성암 채석장은 동일한 장소로 이해되며 가오리 채석장도 조계 부근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정릉계곡의 청수동 채석장은 현재 지명이 사라졌지만 북한산국립공원 정릉사무소 옆에 청수폭포가 있어 청수동이 정릉계곡임을 알 수 있다. 정릉계곡의 암석에서도 채석 흔적이 드러난다.

옛 문헌들은 이들 지역이 모두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했다고 전하지만 오랜기간 채석장으로 이용되면서 지금은 그런 정취가 많이 사라져 아쉬울 따름이다.

<참고문헌>

1. 조선왕조실록

2. 조선시대 궁릉에 사용된 석재 산지. 국립문화재연구원. 2023

3. 도성발굴의 기록 Ⅲ: 종합 보고서. 서울역사박물관. 2016

4. 창신동: 공간과 일상. 서울역사박물관. 2011

5. 길음동. 서울역사박물관. 2010

6. 성북마을아카이브. 성북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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