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 킨텍스 PBA 스타디움의 공기는 오전부터 묘하게 팽팽했다. 대진표만 보면 “이변이 날 만한 구석”은 많지 않았지만, 시즌이 중반으로 접어드는 시점의 LPBA는 언제나 변수가 숨어 있다. 그럼에도 두 사람만큼은 흔들리지 않았다. ‘당구 여제’ 김가영(하나카드)과 ‘캄보디아 특급’ 스롱 피아비(우리금융캐피탈). 올 시즌 여자 프로당구의 흐름을 사실상 양분하고 있는 두 에이스가 나란히 16강 티켓을 거머쥐었다. 내용까지 보면 “역시 클래스는 폼이 아니라 기록으로 증명한다”는 말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먼저 김가영. 상대는 팀 동료 사카이 아야코(하나카드)였다. 같은 유니폼을 입는 선수끼리 치를 때 특유의 어색함과 심리전이 있는 건 당구도 다르지 않다. 구장이 익숙하고 루틴이 비슷한 만큼, 초구 배치나 끊어치기에서 ‘손이 먼저 갈 곳’을 서로가 너무 잘 안다. 그래서 보통은 흐름 싸움이 길어지기 마련인데, 김가영은 애초에 길게 끌 생각이 없었다. 세트 스코어 3-0, 스코어는 11-5, 11-9, 11-4. 첫 세트에서 장타보다 깔끔한 마무리를 택하며 박자를 잡더니, 두 번째 세트에선 접전 구간(7-7, 9-9)에서 스스로 템포를 올려 마지막 두 이닝을 털어 마감했다. 세 번째 세트는 아예 초반부터 포지셔닝을 자신 쪽으로 끌고 와 단숨에 11-4로 잘랐다. ‘선공-수비’ 균형이 맞는 날의 김가영은 작은 실수 한두 개가 나와도 즉시 턴을 회수한다. 오늘이 그랬다.
사실 김가영의 32강 완승은 전날 64강의 역전극에서 이미 예고된 그림이었다. 윤경남에게 초반 2:10까지 끌려갔지만, 21이닝 동안 25:13으로 뒤집고 올라왔다. 이게 김가영 특유의 경기 감각이다. 밀릴 때는 괜히 무리하지 않고, 기회가 오면 득점-수비 연결을 정석처럼 차곡차곡 쌓는다. 그래서 한 번 흐름이 넘어오면 상대가 끊을 타이밍을 찾기 어려워진다. 시즌 초반부터 개막전(우리금융캐피탈 챔피언십), 4차(SY 베리테옴므), 5차(크라운해태 한가위)까지 이미 세 번 정상에 올랐고, 이번 6차 ‘휴온스 PBA-LPBA 챔피언십’에서도 4번째 우승, 더 나아가 “3연속 우승”이란 상징까지 노릴 수 있는 페이스다. 다음 상대는 백민주(크라운해태). 장타 한 방이 있는 선수라 초반부터 페이스를 붙여야 안전하다. 하지만 지금의 김가영은 세트 초반부터 테이블을 넓게 쓰는 운영이 살아 있어, 긴 랠리가 되든 짧은 브레이크가 되든 대응력이 좋다.

스롱 피아비의 16강행은 결이 좀 달랐다. 정수빈(NH농협카드)을 상대로 세트 2-2(11-8, 9-11, 11-8, 4-11) 원점에서 승부치기 4-3으로 끝을 봤다. 이 매치의 키워드는 ‘심리와 체력의 줄다리기’였다. 1세트를 선점했지만 두 번째 세트 막판에서 뺏겼고, 다시 세 번째를 11-8로 챙겨 흐름을 당겼다가 네 번째에서 4점에 묶였다. 보통 이 구도면 승부치기에서 주저앉기 쉽다. 직전 세트를 내준 선수의 손이 더 무거워지는 게 인지상정이니까. 그런데 스롱은 이럴 때 오히려 단순해진다. 배치가 좋아도, 나빠도 공 아래로 무게를 낮추고 자신 있는 패턴 하나를 고른다. 스코어 4-3, 한 점 차로 잡아낸 승부치기는 그래서 더 묵직하다. 올해 2차(하나카드), 3차(NH농협카드 채리티)에서 이미 우승컵을 들어 올렸고, 이번 6차에서 시즌 세 번째 정상까지 시야에 들어왔다. 16강 상대는 최혜미(웰컴저축은행)와 김다희(하이원리조트)의 승자. 두 선수 모두 배치 대응은 좋은 편이지만, 속도 조절에서 스롱이 한 수 위다. 결국 초반에 본인이 ‘테이블의 주인’이라는 걸 각인시키면, 승부는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흥미로운 건, 두 에이스의 승리 방식이 다르면서도 한 가지 결론에선 만난다는 점이다. 김가영은 경기의 호흡을 설계한다. 점수를 내야 할 때와 지켜야 할 때를 초 단위로 구분해, 흐름의 길이를 본인이 조절한다. 반면 스롱은 끊김을 인정하고, 끊어졌을 때 더 빨리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데 집중한다. 전자는 “흐름을 만든다”, 후자는 “흐름을 되돌린다”. 서로 다른 방법이지만, 둘 다 결국 ‘실수를 지우는 속도’가 빠르다. LPBA에서 상위권이 상위권인 이유가 결국 여기에 있다.
이번 대회의 의미를 하나 더 보태자면, 시즌 중반 레이스에서 랭킹과 컨디션이 거의 일치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시즌 내내 기복을 보이던 선수들이 5~6차 대회에 들어서면서 루틴이 안정됐고, 상위권은 톱시드의 묵직함을 보여주고 있다. 대회 4일 차에는 PBA 128강 잔여와 LPBA 32강 잔여가 이어졌는데, 남자부는 초반부터 하이런 경쟁이 거칠어졌고, 여자부는 세트제 특성상 초구 선택부터 신중해졌다. 이런 사이클에서는 작은 디테일—초구 득점 후 포지셔닝, 키스 위험 배제, 수비 전환 각도—이 승부를 가른다. 김가영과 스롱은 이 디테일에서 거의 실수를 하지 않는다.

현장에서 본 두 사람의 표정도 인상적이었다. 김가영은 3-0을 확정하는 순간에도 크게 환호하지 않았다. “이제 시작”이라는 듯, 큐를 내려놓고 바로 다음 경기를 준비하는 루틴으로 들어갔다. 이게 ‘여제’가 오래 여제일 수 있었던 이유다. 스롱은 승부치기 마지막 공이 들어가자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팽팽한 줄다리기 끝에 자기 흐름을 되찾았다는 확신이 섞인 표정. 그 미소가 다음 라운드에서도 통한다면, 대진표 위쪽에서 다시 두 사람의 그림자가 겹칠 수도 있다.

남은 변수도 없지 않다. 김가영은 64강에서 보여준 것처럼 초반에 잠깐 흔들릴 수 있고, 스롱은 일정이 빡빡한 날 후반 피로도가 올라오면 승부치기에서 과감함이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런 약점 역시 경험으로 보완하는 법을 알고 있다. 김가영은 초반이 흔들리면 아예 리듬을 느리게 가져가고, 스롱은 막판에 오히려 선택지를 단순화한다. 그래서 둘 다 ‘졌을 때도 쉽게 지지 않는다’. 시즌 막판으로 갈수록 이 장점은 점수가 아니라 상금과 랭킹으로 바뀐다.

LPBA는 이제 16강부터 본격적인 토너먼트의 냉기가 돈다. 8강 문턱부터는 배치 운만으로 올라가긴 어렵다. 오늘처럼 김가영이 템포를 설계하고, 스롱이 끊김을 지워낼 수 있다면, 결승 주연의 자리는 또 한 번 두 사람을 향해 열릴 것이다. 올 시즌이 우리에게 확인시켜 준 사실이 하나 있다면, ‘강한 사람은 늘 강하게 이기지 않아도, 중요한 순간엔 꼭 이긴다’는 것. 오늘의 두 승리는 그 문장을 한 줄 더 굵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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