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 마켓워치] "돈은 우리가 댈게, 라인만 다오"…메모리 확보전 '점입가경'

/ 챗GPT의 도움을 받아 제작한 그래픽입니다.

메모리 물량을 확보하는 방식이 계약에서 '라인 선점'으로 바뀌고 있다. AI 투자 확대와 함께 메모리 수요가 급증하면서 범용 D램까지 쇼티지(공급부족)가 번지자 고객사들이 생산라인에 직접 개입하는 새로운 거래 구조가 등장했다.

메모리를 얼마나 안정적으로 확보하느냐가 AI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로 부상하면서 기존에 필요시 메모리를 구매하던 구조에서 벗어나 장기공급계약(LTA)이나 선수금 납부, 더 나아가 생산 전부터 생산라인을 선점하는 방식 등으로 진화하는 모양새다.

"계약만으론 불안"…라인 선점으로 진화한 메모리 확보전

27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메모리 쇼티지가 고착화되며 물량 확보를 위해 메모리 제조사와 고객사 간 협력 형태가 진화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대만의 범용 D램 제조사인 난야테크놀로지다. 최근 낸드 제조사들은 SSD(Solid State Drive) 생산에 필수적으로 탑재되는 DDR4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난야의 3자 배정 유상증자에 공동 참여했다.

업계에서는 이를 단순한 재무적 투자가 아닌 '라인 선점'으로 해석하고 있다. 지분을 통해 난야의 DDR4 생산라인을 자사 물량에 묶어두려는 전략이다. 특히 DDR4는 수익성이 낮아 주요 메모리 업체들이 HBM(고대역폭메모리), DDR5 등 고부가 제품으로 생산라인을 전환하는 과정에서 공급이 급격히 줄어든 대표적인 품목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단순 계약만으로는 물량 확보를 장담하기 어렵다. 공급사는 시장 상황에 따라 언제든 생산 비중을 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지분 투자 형태는 주주로서의 이해관계를 기반으로 생산 유지 압박을 가할 수 있어 사실상 물리적 구속력을 확보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이는 메모리 산업에서 보기 드문 변화다. 그동안 메모리는 규격화된 범용 제품을 대량 생산해 판매하는 구조였고 수요처 역시 시세 변화에 따라 재고를 확보해두거나 필요할 때 주문해서 물량을 확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다 쇼티지가 장기화될 기미가 나타나자 일부 하이퍼스케일러 고객들을 중심으로 보통 1년 단위의 '장기공급계약(LTA)'이 주된 공급 구조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최근엔 이마저도 공급 우선순위를 담보할 수 없는 환경으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메모리 공급 계약은 점차 더 장기화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실제로 마이크론은 최근 하이퍼스케일러와 5년 단위의 '전략적 고객 계약(SCA)'을 체결했다. 이는 기존 1년 단위 LTA와 달리 수년간의 물량과 공급 조건을 구체적으로 묶는 구조로, 메모리 공급 계약이 3~5년 단위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여기에 더해 앞서 언급한 난야의 사례처럼 자본 투입을 통해 라인을 확보하는 새로운 방식이 등장했다는 분석이다. 게다가 이 같은 흐름이 특정 사례에 그치지 않고 메모리 산업 전반으로 빠르게 확산되는 분위기다. 고객사들이 물량 확보를 위해 계약을 넘어 투자까지 병행하면서 거래 구조 자체가 점차 '수주형'으로 바뀌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파운드리 닮아가는 메모리…변동성 줄고 진입장벽 높아진다

/ 챗GPT의 도움을 받아 제작한 그래픽입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장기공급계약을 다양하게 진화시키고 있다. 단순히 일정 물량을 약속하는 수준을 넘어 선급금이나 공동 투자 등을 결합한 구조가 확산되는 추세다.

실제로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 등 주요 고객사로부터 대규모 선급금을 확보하며 설비 투자 부담을 분산하는 한편 안정적인 수요를 선제적으로 확보했던 경험이 있다. 이 같은 사례를 기반으로 이후 빅테크들을 포함한 다수의 고객사들을 유치하는 과정에도 다양한 기간과 형식의 장기공급계약이나 사업 협력이 이뤄졌을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 역시 이 같은 흐름에 맞춰 장기공급계약을 보다 적극적으로 확대하겠다는 방침이다. 전영현 DS부문장은(부회장) 최근 주주총회에서 메모리 사업의 변동성을 줄이고 안정적인 수익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고객사와의 장기 계약을 다양한 형태로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업황 사이클에 따라 실적이 크게 흔들리는 기존 구조에서 벗어나 수주형에 가까운 사업 모델로 전환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풀이된다.

파운드리 산업처럼 고객 주문에 맞춰 설비를 확충하고 물량을 생산해 공급하는 수주형 공급 구조는 이제 메모리 시장에도 대세가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차세대 HBM인 HBM4부터는 이런 흐름이 더욱 강화되며 고객 요구에 맞춘 맞춤형 메모리로 진화하고 있다. 설계 단계부터 공동 개발이 이뤄지면서 고객과의 결속도 역시 한층 강화되는 모습이다. 한마디로 한번 형성된 공급 관계를 쉽게 바꾸기 어려운 '락인(lock-in)' 구조가 만들어지는 셈이다.

시장에서도 이 같은 변화가 메모리 산업의 변동성을 완화할 것이란 기대감이 크다. 고객 투자 기반 생산이 확대되면 무분별한 증설과 공급 과잉 가능성이 낮아지고 이른바 '치킨게임' 양상도 완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반면 메모리 산업 진입장벽은 높아질 전망이다. 조 단위 선급금이나 지분 투자가 가능한 자본력을 갖춘 고객사와 이를 수용할 수 있는 기술력과 생산능력을 갖춘 제조사 간 거래로 시장이 재편되면서 결국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중심의 '그들만의 리그'가 더욱 공고해질 것이라는 관측에도 힘이 실린다.

메모리업계 관계자는 "이제는 메모리를 얼마나 싸게 사느냐가 아니라 아예 물량을 확보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가 됐다"며 "계약보다 자본이 우선하는 구조로 바뀌고 있다는 점에서 메모리 산업이 사실상 파운드리와 유사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말했다.

장소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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