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돼지우리에 던져버려?...밝혀진 반전 스토리!!
[이하경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죄인 심문기록으로 본 조선후기]
임금의 위폐를 지방 아전이 훼손
원래는 지방수령이 문책받는 사건
자신의 비리 탄로날까 봐 전폐 훼손
선정 베풀지 않으면 국가권위도 추락
현대 국가에서 훈장(勳章)은 국가가 개인이나 단체에 대해 공적과 업적을 표창하기 위해 주는 영전(榮典)의 하나다. 가끔 훈장의 수상을 거부하는 사례가 벌어진다. 국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다. 비슷한 사건이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왕의 위폐를 훼손하는 사건
오늘 살펴볼 사건은 영조 12년(1736년) 충청도에서 전패(殿牌)를 훼손한 최하징 사건이다.
전패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殿)’자를 새겨, 지방관청 객사(客舍)에 세운 나무 위패(位牌)를 말한다. 새로 부임한 수령은 첫 공식 행사로, 곧장 객사로 가서 전패를 모셔놓고 부임의례를 드리게 된다. 정월 초하루, 동짓날, 왕의 탄신일과 같은 기념일을 맞아 지방에서는 수령을 비롯한 모든 관원과 백성들이 모여서 전패를 모시고, 경배의식을 행하였다. 지방에서 왕에게 문서를 보내거나, 윤음(綸音)과 같이 왕으로부터 문서를 받을 때에도 전패를 바라보며 절을 하는 절차가 포함되었다.
이처럼 지방에서 행하는 각종 의례는 관아의 전패를 모셔놓고 인사드림으로써 시작하였기에, 전패는 중앙 정치주권자의 위엄과 권위를 상징하는 의물(儀物)이었다. 각 고을마다 이러한 의물을 세워두고 공식 행사에 앞서 의물에 대해 예를 표하도록 했던 것은, 전근대 국가권력의 특징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관료들이 공식적인 활동을 하기에 앞서, 나무 패를 모셔두고 절을 하고 예의를 갖추어야 하다니! 오늘날의 시각으로는 이러한 의례 자체를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의례에 참여함으로써, 고을의 수령과 백성들은 정치 지도자와의 관계 속에서 본인의 위치를 상기하고, 본인이 해야 할 일을 자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중앙으로부터 저 멀리 떨어진 외딴 지방에서도 중앙의 국가권력이 스며들도록 할 수 있었던 중요한 기제가 바로 이러한 의례였을 지도 모른다.
임금의 전패를 돼지우리에 던져버리다니!
그런데 조선후기에 들어서면, 이 전패를 훼손하는 사건들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조선시대에는 전패에 대한 보관과 관리를 특히나 중요하게 여겼다. 혹여나 누군가 전패를 훼손할 경우 왕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하여 죄인에게 극형을 내리고, 이를 제대로 감독하지 못한 수령을 파직하며, 해당 마을의 읍호를 강등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국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패를 훼손하는 사건은 19세기까지 이어졌다.
18세기 '최하징 사건(1736년)'은 당시 그토록 소중하게 다루던 왕의 상징물인 전패를 최하징이 몰래 훔쳐서 돼지우리에 던져버린 사건이다. 그런데 단순히 왕의 상징물을 훼손하여, 왕 권위에 도전하는 반역 시도와는 결이 달랐다.
최하징에 대한 심문기록은 1736년 10월 9일 의금부가 제출한 보고서로 시작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미 충청도 지역에서 자주 전패가 훼손되었다는 변고를 조사하기 위해 서울에서 경차관(敬差官; 조선 때 지방에 임시로 보내던 벼슬. 주로 전곡의 손실을 조사하고 민정을 살피는 일을 맡았다-편집자주)을 보내어 조사하고, 해당 사건이 형조에 이관되어 형조에서도 조사했다. 해당 조사를 통해 전패를 훼손한 자로 곡식 창고를 지키는 아전(衙前) 최하징을 지목했다.
추국은 시작되고...밝혀진 반전 스토리
왕의 의물을 훼손했으니 이 사안은 형조에서 곧바로 처리할 수 없었고, 영조는 이 사건을 의금부에서 추국을 진행하라고 명령했다. 의금부에서 관련자들을 잡아 와서 11월 4일 진시(辰時, 오전 7~9시)에 추국이 시작됐다. 첫 심문에서 27세 최하징은 경차관이 조사할 때, 매질을 견디지 못해서 거짓으로 진술한 것이라며, 본인은 억울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질 신문까지 등장했다.
최하징과 그가 부리던 이복동, 그리고 그의 사내종인 어둔, 이이귀 등과 계속해서 대질해 심문하도록 했다. 이러한 대질심문 끝에 결국 최하징은 자신의 잘못을 자백하기에 이른다.
“저는 충원현의 남창(南倉)을 맡은 아전이었습니다. 윗사람에게 보고하지 않고 제 마음대로 처리하여 곡식 가운데 나락 1백 석 남짓이 부족한데, 관아에 적발되어 틀림없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전패를 훔쳐내는 변고를 저지르면 우리 고을 수령이 파면을 당하니, 저는 죄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11월5일 최하징 결안)
즉, 최하징은 본인이 관리하던 창고의 곡식을 자기 마음대로 손댔고, 이 사안이 탄로나서 벌 받을까 두려워 이러한 일을 벌인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전패를 훼손하면 ‘수령이 파직을 당하게 되므로’ 본인이 책임지지 않아도 될 것이라 기대했다고 말했다. 최하징이 전패를 훼손한 것은, 자신의 상관인 수령을 벌 받게 하려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추국 결과, 최하징은 11월 5일 곧바로 군기시(軍器寺; 무기의 제조와 관리를 맡아보는 관아) 앞에서 처형당했다.
함부로 다뤄진 전폐, 약화하는 중앙권력
여기서는 다음의 지점에 주목할 수 있다. 우선, 각 고을 관아 객사에 모셔진, 왕과 다름없는 존귀한 전패가 일개 아전에 의해 훼손당했다는 점이다. 최하징의 자백에 따르면, 영조 11년 7월 27일에서 28일 사이 밤중에 최하징은 이복동, 이이귀, 어둔 등을 데리고 객사로 가서 이들에게 몰래 전패를 가져오도록 했다고 한다. 그리고 본인이 직접 전패를 가지로 장터로 갔다가, 사창(司倉)안에 있는 돼지우리 안에 전패를 던져버렸다고 한다. 의물을 몰래 빼내어 오고, 심지어 이를 돼지우리 안에 던져버릴 때까지, 누군가에 의한 제지도, 혹은 그 어떤 물리적인 충동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두 차원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만일 위 진술처럼 일개 아전이 전패를 쉽게 손에 넣고 함부로 할 수 있을 만큼 전패가 소중하게 다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즉, 중앙에서 전패를 세워 지방을 다스리고자 했던 그 의도와 달리, 지방에서 전패가 갖는 의미나 상징성이 상대적으로 약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권력이 지방으로까지 효과적으로 관철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반면, 여전히 전패는 왕을 상징하는 의물로 상당히 소중함에도 불구하고, 최하징과 같은 자들이 대범하게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최하징이 이러한 행위를 시도한 것은 본인의 범죄 발각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자신이 관곡을 자의적으로 유용한 사실이 이내 발각될지 모른다는 것, 그리고 발각될 경우 중앙으로부터 엄청난 처벌을 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상당했다는 의미다. 그 결과 전패를 훼손해서라도 요행을 바랄 만큼, 사실 최하징은 국가권력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울러 전패 훼손이 알려지고 나서 최하징이 의도한 바와는 다르게, 국가에서는 충원현 지역의 수령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사건의 진상을 정확하게 파악해 내고, 수령권에 도전하고 있는 최하징만을 극형에 처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하였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조선시대는 신분제 사회였기 때문에 지방의 수령과 그 하급 관리의 관계는 단순히 행정적인 차원의 위계질서에 국한되지 않는다.
“무릇 관의 하례(下隷)들이 관장에 대해서는 그 분수가 노비와 주인의 관계와 같다. 조금이라도 그 분수를 능멸하거나 범하면 사형의 죄를 변치 못할 것이다.”(영조실록1권, 영조 즉위년 9월 29일)
이는 영조가 영덕지방에서 현령(縣令) 홍정보가 개혁 정치를 펴자 이에 반대하던 서리(胥吏)와 노복(奴僕)들이 오히려 홍정보를 쫓아내려는 시도를 한 사건을 두고 한 말이다. 단순히 수령을 파면당하도록 하는 수준이 아니라, 하급 관리들이 무기까지 들고 가서 수령을 협박한 사건에 대한 왕권의 엄명이었다.
결국은 권력강화가 아닌 선정(善政)으로
학계에서는 18세기가 되면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왕의 대리인인 수령이 지방 곳곳에 가서 관 주도로 지방을 다스렸다면서, 이른바 ‘관(官)주도 지배체제’가 성립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더욱 강력해진 수령권에 대항해서, 최하징의 전패 훼손 사건이나 현령 홍정보에 대한 위협 사건과 같이 하급관리가 수령을 시해하고자 하거나 위협하는 범죄도 조선후기로 갈수록 더욱 증가했다.
그 결과 예전에는 전패를 훼손하는 일이 발생하면 관리 소홀의 책임을 수령에게 묻던 관행에서 벗어나, 영조 22년에 반포된 『속대전(續大典)』에서는 이제 전패에 변고가 생기더라도 직접적인 역모 사건이 아닌 한, 수령에게 관리의 책임을 묻지 않고 변고를 일으킨 개인만 벌하도록 규정을 만들었다. 즉, 더 이상 전패 변고가 발생한 고을의 읍호를 강등시키지 않고 수령 또한 파직하지 않도록 한 것이다.
이처럼 영조 9년 충청도에서 일어난 전패 훼손 사건은 조선후기 국가권력이 지방으로까지 어떻게 영향력을 뻗고 있었는지, 수령과 이서(吏胥; 관아에 속하여 말단 행정 실무에 종사하던 구실아치-편집자주)들 간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소동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국가 권력이 선정을 펼치지 않고 권위를 잃기 시작할 때는 그 상징물도 빛을 잃기도 한다.
※ 이하경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정치학 부교수는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서 조선시대 반역자 심문 기록을 분석하여 전근대 국가의 특성을 조망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정치사상 및 법제사 관련 교과목을 가르치고, 노무현재단 ‘민주주의 리더십 연구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 및 전근대 국가론이 주된 관심 영역이며, 주요 연구로는 『역사화해 이정표』 (공저), 『조선후기 사법기구』 (공저), “조선후기 추국장의 정치적 의미”, “조선후기 범상부도죄의 정치적, 법제사적 의미” 외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