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과 싸우는 과학자]② 원숭이 손짓 보면 신종마약도 보인다
동물 행동 분석해 마약 찾는 생체지표로 개발
“다양한 분야에서 같이 연구하려면 적극적 지원 필요”
지난달 6일 태국 치앙마이주 매아이 지역에서 군 순찰대와 마약 조직이 총격전을 벌여 6명이 숨진 사건이 있었다. 미얀마와 라오스, 태국 3국이 메콩강을 끼고 접한 산악지대인 ‘골든 트라이앵글’로 마약 생산지로 악명 높은 곳이었다. 태국군은 총격전 이후 주변 숲에서 신종 합성마약인 ‘야바’ 130만정이 든 배낭도 회수했다. ‘야바’는 메트암페타민과 카페인, 코데인 같은 환각제를 혼합한 마약이다.
정부가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했지만 좀처럼 성과가 나고 있지 않다. 전문가들은 가장 큰 문제로 신종마약을 꼽는다. 과거에는 대마, 필로폰 같은 대표적인 마약 몇 가지만 알면 진단과 단속에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여러 마약류를 섞거나 기존 마약류의 성분 일부를 바꾸는 식으로 새로운 마약을 만드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신종마약은 기존의 마약과 성분이 다르기 때문에 규제를 받지 않는 경우가 많다. 과학자들이 인공지능(AI)과 동물행동 연구로 신종마약을 찾는 데 나섰다.
권정태 한국과학기술원(KAIST) 뇌인지과학과 교수와 유승범 성균관대 교수, 이영전 한국생명공학연구원 국가영장류센터 책임연구원을 비롯해 23명의 과학자들이 신종마약을 찾아내기 위해 과학자들이 힘을 모았다. 이들이 도전하는 과제는 ‘인공지능 기반 마약류 동물행동 평가연구’다.
지난 4일 대전 KAIST 캠퍼스에서 만난 권정태 교수는 “마약류를 복용한 동물이 보이는 행동을 꾸준히 관찰해서 행동을 자세하게 분석하려 한다”며 “다양한 화합물에 따른 동물의 반응을 기록해 신종마약 분류에 적용하면 새로운 물질이 마약인지 아닌지, 얼마나 위험한 지를 빠르고 정확하게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과학자들이 마약 연구에 뛰어든 것은 국내에서 규제하기 어려운 신종마약이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태국군이 총격전까지 벌이면서 단속한 신종마약 야바는 태국에서 주로 생산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작년부터 국내에 빠르게 퍼지고 있다. 경찰청이 올해(1~7월) 압수한 야바는 1만3347.8g으로 작년 같은 기간보다 두 배 이상 늘었다.
신종마약을 규제하기 위해서는 마약류로 지정하는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이 과정이 짧게 몇 개월에서 길게는 1년 넘게 걸리기도 한다. 이렇게 마약류로 지정해도 시장에는 또 새로운 종류의 신종마약이 유행한다. 신종마약을 빠르게 찾아내는 시스템 없이는 마약과의 전쟁을 아무리 외쳐도 꽁무니만 쫓아다니는 셈이다.
권 교수는 “신종마약은 처음 나올 때만 해도 단순히 가루 화합물에 불과해서 이걸 마약으로 부를지 애매했다”고 말했다. 마약류를 지정하는 식품의약품안전처 입장에서는 과학적인 기준이 있어야 신종마약을 규제할 수 있는데 지금은 그런 기준이나 과학적인 근거를 찾는 게 쉽지 않다.
권 교수와 동료들이 신종마약에 대한 과학적 근거를 찾는 데 주목한 방법은 AI를 이용한 동물행동 추적 기술이었다. 마약을 복용한 사람은 뇌에서 이상 반응이 일어나기 때문에 정상적인 사람과 다른 행동을 보이기 마련이다. 복용하면 마치 좀비처럼 움직인다고 해서 ‘좀비 마약’으로도 불리는 펜타닐이 대표적이다.
권 교수는 마약을 복용한 동물이 보이는 행동 변화를 추적한 뒤 이 데이터를 AI에 학습시켜서 신종마약을 빠르게 분류하고 진단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고 있다. 권 교수는 “마약류를 복용한 동물이 보이는 행동을 꾸준히 관찰해서 행동을 자세하게 분석하려 한다”며 “다양한 화합물에 따른 동물의 반응을 기록해 신종마약 분류에 적용하면 새로운 물질이 마약인지 아닌지, 얼마나 위험한 지를 빠르고 정확하게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시스템 개발은 3단계에 걸쳐서 진행된다. 올해와 내년에는 설치류를 이용해 AI 기반의 마약류 행동평가 자동화시스템을 구축한다. 케타민, 합성대마, 코카인, 암페타민, 벤조디아제핀 등 5종의 기존 마약류를 이용해 마약을 복용한 쥐가 어떤 행동 변화를 일으키는지, 뇌의 전기신호에는 어떤 변화가 있는지 분석한다.
2단계에서는 사람과 같은 영장류인 원숭이로 실험할 계획이다. 카메라 10~15대로 약물 중독 진행 단계별로 어떤 행동 변화가 일어나는지 분석해 마약류 복용을 확인할 수 있는 행동 바이오마커(생체지표)를 발굴하는 게 목표다. 국가영장류센터에 있는 긴꼬리원숭이는 행동 패턴이 인간과 유사해 마약 중독의 행동적 영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모델로 꼽힌다.
연구진은 AI를 이용하면 사람의 주관적인 판단을 배제하고, 연구자나 연구실마다 같은 물질에 대해 다른 판단을 하는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밝혔다.
마약 제조용 AI에 대응하기 위해서도 AI가 필요하다. KAIST 생명과학기술대학장을 맡고 있는 김대수 교수는 “최근에는 AI로 화합물 분석을 하면서 신종마약 제조가 더 빨라지고 있다”며 “신종마약을 진단하고 찾아내는 데에도 AI를 사용해 대응 속도를 함께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지금 신종마약 분류는 거의 수작업처럼 이뤄지고 있다”며 “권 교수가 만드는 시스템 개발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권 교수는 “마약류를 지정하는 과정이 너무 오래 걸리는 게 문제”라며 “신종 화합물이 나왔을 때 이 물질이 마약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게 지금은 1년이 걸리기도 하는데, 이를 한두 달 안에 판단할 수 있는 장비를 만들려고 한다”고 말했다.
현재 마약류 지정은 세계보건기구(WHO)와 유엔 마약위원회(CND)에서 평가를 하면 이를 바탕으로 국내에서 마약류 관리법 시행령을 개정하는 식으로 이뤄진다. 마약류 지정이 워낙 까다롭고 시간이 오래 걸리다 보니 임시마약류를 별도로 지정해서 관리하지만, 이 과정도 시간이 적지 않게 걸린다. 임시마약류에 지정된 물질은 2011년 단 1종이었지만, 이후 13년 동안 263종으로 늘었다.
권 교수는 AI를 이용한 동물행동 패턴 분석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연구자의 참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현재 권 교수와 유승범 교수, 이영전 책임연구원 외에도 여러 실험동물의 뇌 영상 연구를 진행한 서민아 성균관대 생명과학부 교수, 고밀도 뇌파추적장치를 만든 최지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뇌과학연구소 책임연구원, 영장류의 시각 정보 처리 시스템을 연구하는 박수현 KAIST 교수도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
김대수 교수는 “마약 중독 연구를 위해서는 뇌과학, 동물행동학, 약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두 필요하다”며 “마약 연구에 의지와 전문성을 가진 과학자들이 많지만, 이런 중독 연구에 쓸 수 있는 연구비나 정부의 지원 자체가 너무 적은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권 교수는 “다양한 분야 연구자들이 함께 움직이려면 사회적인 관심과 재정적인 지원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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