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세잔, 브루벨! 왜 ‘악마’에 빠졌을까?

[김희은의 울림 깊은 러시아미술 이야기]

러시아 추상 미술의 시작

"세계 미술사에 세잔이 있다면 러시아 미술사에는 브루벨이 있다"

‘현대 미술의 아버지’ 폴 세잔(1839~1906)은 모더니즘 회화가 등장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작가다. 그가 없었다면 현대의 추상 미술은 없었을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그런 면에서 미하일 브루벨(1856~1910)은 '러시아의 세잔'이라 할 만하다.

브루벨이 등장하기 전 러시아 미술 언어는 소재를 복사하듯 묘사하는 사실주의가 대세였다. 그런 예술 환경 속에서 브루벨은 러시아에서 최초로 비재현적인 회화 언어를 개척했다. 그는 예술이 인간 정신을 살찌우는 자양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보이는 세계 이면에 숨겨진 영혼의 힘을 형상화하는 수많은 상징을 만들어낸다.

미하일 브루벨 자화상, 1905년, 골판지에 종이, 수채화, 목탄, 백색 도료, 파스텔, 러시아 박물관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최초의 상징주의자이며 아르누보 예술의 최고 정점을 이룬 화가 미하일 브루벨(1856-1910)은 러시아 모더니즘 발전에 원동력이 된 작가다.

예술의 자율성을 추구하고 회화의 내용, 기법, 역할 자체를 기존 시각과 다르게 본 브루벨은 세계 추상 미술의 뿌리가 된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이 탄생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단언컨대 브루벨이 없었다면 우리가 좋아하는 샤갈, 말레비치, 칸딘스키의 모더니즘은 탄생하지못했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붓 대신 나이프

브루벨의 새로운 도전은 터치에서부터 시작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19세기 러시아 미술은 '시대상의 반영'이라는 커다란 과업을 안고 있었기에 서사를 잘 표현할 수 있는 사실적 표현 기법, 즉 매끈하고 깔끔한 붓터치가 중요했다. 하지만 브루벨은 기존의 회화 질서를 완전히 깨버린다.

먼저 붓이 아닌 나이프 같은 걸로 꾹꾹 누른 듯한 불규칙한 터치를 사용, 그림 표면이 마치 큐빅을 박아놓은 결정체 같은 느낌을 주도록 채색했다. 상당히 역동적이고 강렬하며 입체적이다.

미하일 브루벨, 여섯 날개의 세라핌, 1904년, 캔버스에 유채, 321.5X222cm, 러시아 미술관, 상트 페테르부르크. 브루벨의 크리스탈 결정같은 터치가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하지만 브루벨이 처음 작품을 발표했을 당시 혹평을 면치 못했다. 사람들은 ‘괴물 같은 그림’ 이라 평하고 브루벨을 ‘끔찍한 그림을 그리는 데카당스 지도자’라 비난했다. 그의 작품이 러시아 화단에서 이해되기 시작하는 데 만도 7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기존의 틀을 깨고 거장으로 자리한다는 것은 그만큼 힘든 일이다.

브루벨은 화가로서의 여정은, 쉽게 인정받지 못하던 한 예술가의 독창성이 시간을 견디고 결국에는 러시아 미술사의 진보 즉 발전의 변곡점이 되는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브루벨의 이런 천재적 도전으로 인해 드디어 러시아 화단은 한 세기를 풍미했던 사실주의 화풍에서 과감히 탈피하고 모더니즘을 향해 화려하게 첫발을 내딛게 된다.

신비로운 보라색

특히 사물을 깨진 거울 조각처럼 여러 면으로 나눠서 그린 브루벨의 기법은, 훗날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사물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추상작업으로 나아가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다. 그의 기하학적인 형태 분석, 강렬한 색채를 통한 감정 표현, 그리고 형상 너머의 본질을 탐구하는 태도는 20세기 러시아 아방가르드를 선도한 말레비치(Malevich), 라리오노프(Larionov), 곤차로바(Goncharova), 로드첸코(Rodchenko), 샤갈(Chagall)등 모더니즘 회화 거장들에게 직접적인 영감을 주었다. 로드첸코가 브루벨의 드로잉을 따라 그리려 애썼다는 이야기나 샤갈이 브루벨의 신비로운 보라색, 푸른색에 매료되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브루벨의 예술 세계는 시기별로 1880년대, 1890년대, 1900년대로 구분할 수 있다. 1880년대 브루벨은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한 후 1884년 미술 사학자 프라코프의 주도로 키예프 키릴 성당의 12세기 모자이크 벽화의 복원 작업에 초청을 받는다. 이때, 브루벨은 러시아 이콘, 모자이크화 그리고 베네치아에 있는 산마르코 성당의 초기 르네상스 화가들의 표현 등을 깊이 연구했다. 이때 '영혼의 표현'이라는 주제에 몰두했다. 즉, 예술가로서 가장 큰 내면적 성장을 이루는 시기였다.

마침내 '악마' 시리즈

1890년대에 들어서며 드디어 브루벨은 대표 아이콘 ‘악마’ 시리즈를 시작하게 되는데 남성이면서도 여성이며, 천사의 모습을 하고도 악마의 모습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아르누보의 전형적인 인물을 만들어 낸 것이다.

브루벨의 '악마' 시리즈는 초기 혹평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최고의 예술 후원자 마몬토프는 ‘천재의 매혹적인 교향곡’ 이라 극찬하며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브루벨은 마몬토프의 영지 아브라함체보에 머물며 수많은 모자이크화를 탄생시켰고, 1905년 모스크바 메트로폴 호텔 벽면을 장식하는 ‘프린세사 그료자 – 꿈의 공주’ 작업에 착수했다. 또 이 시기 '위대한 작가' 미하일 레르몬토프(1814~1841) 시 <악마>의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에 참여하게 된다.

드디어 마몬토프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유명세를 얻은 브루벨이지만, 1901년 <상처입은 악마>, 1904년 <여섯 날개의 세라핌>등 여러 작품을 그리던 중 정신분열증이 심화된 후 1910년 세상을 달리한다.

미하일 브루벨 (1856-1910), 앉아 있는 악마, 1890년, 캔버스에 유채, 116.5 х 213.8cm, 트레챠코프 미술관, 모스크바

'절대 고독'이라는 벌

그러면 브루벨 하면 곧바로 떠오르는 작품, 러시아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작품 <앉아 있는 악마>를 살펴보자.

노을 지는 돌산에 앉아 먼 곳을 응시하는 서글픈 눈동자의 남자는 '악마'다. 어떤 말로도 위로받을 수 없는 고독, 세상 그 무엇과도 소통하지 않으려는 고집,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인내하는 비애 같은 감정이 악마가 앉아 있는 모습에 서려 있다. 깍지를 낀 채 웅크리고 있는 그의 모습은 비장하기까지 하다.

그는 천사였지만 천상에서 쫓겨나 악마의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다. '악마'라 명명되어 있지만 타인을 공격하는 잔인성은 전혀 읽어낼 수 없다. 악독하지도, 표독스러워 보이지도 않는다. 묵묵히 앉아 상처받은 자신의 영혼을 달래는 쓸쓸한 고독만이 화폭을 채울 뿐이다.

슬픔을 혼자 감내해야 하는 형벌을 받고 천상에서 쫓겨난 악마, 절대 고독의 뿌리에 발목 잡혀 안으로 잦아드는 모습이 바로 브루벨의 손에 탄생한 '악마'의 상징이다.

그림을 찬찬히 보고 있자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 고스란히 투영된다. 우리 현대인들은 군중 속에 휩싸여 분주한 삶을 살아가지만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외로움에 젖어 하루 하루를 보낸다. 그런 현실의 우리 또한 브루벨의 악마와 같은 형벌을 감내하고 사는 것은 아닐까? 원래부터 우리 인간은 '하늘의 형벌'인 절대 고독을 품고 살아야 하는 '천상의 천사'였는지도 모른다.

레르몬토프의 연작시 '악마'

악마에게는 천상과 지상의 삶이 모두 존재하기에 선과 악, 사랑과 미움, 열정과 냉담이 내면에 혼재한다. 현실 세상에서 바로 우리 인간 역시 늘 두 세계의 끊임없는 충돌에 부딪히며 살아가고 있다. 브루벨의 악마 모습이 우리이고, 우리가 악마인 이유다.

브루벨의 대표작인 악마 시리즈는 러시아 낭만주의 시인 미하일 레르몬토프의 연작시 <악마>에서 깊은 감흥을 받아 탄생했다. 브루벨은 <악마>라는 연작시에 삽화를 그리게 되는데, 당시 세계를 풍미했던 '데카당스*', '아르누보*'의 러시아적 퇴폐미가 브루벨의 손에 의해 새로운 빛깔로 탄생된다.

앉아있는 악마에는 기존 회화에서 잘 표현하지 않던 붉은색과 푸른색을 함께 씀으로써 서로 상반되는 심상이 자연스럽게 우러나게 했다. 즉 붉음의 역동성과 푸름의 차분함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새로운 상징이 만들어진 것이다.

또 그림 표면은 조각 조각들이 모여 있는 모자이크 느낌을 준다. 꾹꾹 누른 듯한 붓터치로 인해 화면이 꿈틀거리는 듯하고, 삽화는 흑백으로 표현되어 있으면서도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하다. 터치를 이루는 조각 조각들이 마치 음악의 선율처럼 리드미컬하다.

* 데카당스: ‘퇴폐 또는 쇠미 衰微’를 의미한다. 상징주의와 연관된 19세기 미술 및 문학운동으로 퇴폐적인 것을 특징으로 하며, 자연적인 것보다 인위적인 것의 우월성을 믿었다. 문학에서는 원래 로마제국 말기의 병적인 문예의 특징을 가리켰으 나, 19세기 말에 보들레르 와 베를렌의 영향을 받은 모리스 드 블래시, 로랑다 이아드, 로당바크, J. 모레 아스 등 상징파 시인들이 데카당(퇴폐파, 1886~89)이라고 자칭했고, 이후 그 들의 예술적 경향을 데카당스라고 칭하였다.

* 아르누보: '새로운 예술'이라는 뜻의 프랑스어에서 유래했다. 19세기 말기에서 20세기 초기에 걸쳐 프랑스에서 유행한 건축, 공예, 회화 등 예술의 새로운 양식으로, 식물 모티브에 의한 곡선의 장식 가치를 강조한 독창적인 작품이 많았으며, 20세기 건축이나 디자인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악마」를 완성하고 발표한다.

'절대 고독'보다 더한 고통

레르몬토프의 연작시 <악마>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주인공 ‘악마’는 천상에서 죄를 짓고 추방되어 천사였던 행복한 날들을 추억하며 외롭게 카프카즈 돌산에서 고독한 삶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약혼식장에서 기쁨의 춤을 추고 있는 '타마라'라는 지상의 여인을 보게 되고,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악마에게 허락되지 않은 인간과의 깊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악마는 타마라를 차지하고 싶은 욕심에 그녀의 약혼자를 죽여 버리고 여인을 열렬히 유혹한다. 두려움에 떨던 타마라도 결국엔 악마의 사랑을 받아들이지만 그와 사랑의 밤을 보낸 그녀는 곧바로 목숨을 잃게 된다.

악마가 지상으로 내려올 때 '절대 고독하라'는 벌을 받지 않았던가? 탐해서는 안되는 사랑을 취한 악마는 가장 혹독한 인간의 죄를 받는다. 신은 그에게서 타마라의 목숨을 거둬가버리고 '이별'이라는 고통 속에 그를 내던진다. '절대 고독'보다 더한 고통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라는 암시다. 그렇게 하늘에 빼앗긴 타마라를 잊지 못하던 악마는 카프카즈 지방을 홀로 유랑하며 고독하게 살아간다.

미하일 브루벨이 그린 삽화를 하나씩 보면서 레르몬토프의 연작시 <악마>를 좀 더 심도 있게 이해해 보자. 단순히 책 속의 그림이라고 하기에는 삽화의 예술성이 가히 천재적이다.

악마의 얼굴(레르몬토프의 시 '악마'의 삽화), 1890~1891년, 미하일 브루벨, 카드 보드에 검은 잉크.

검은 눈동자의 악마. 우수에 젖은 서글픈 눈빛이 악마의 공허한 내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절대 고독을 품은 인간의 모습을 화폭에 옮기면 바로 이런 모습일까? 공허한 눈빛과 꽉 다문 입술이 고독에 몸부림치는 악마의 슬픔을 대변하는 것 같다.

춤추는 타마라(레르몬토프의 시 '악마'의 삽화), 미하일 브루벨, 카드 보드에 검은 잉크, 트레챠코프 미술관, 모스크바.

지상을 떠돌던 악마는 어느날 작은 마을에서 왕자와 이웃나라 공주 타마라의 약혼식을 보게 된다. 악마는 춤추는 공주의 아름다움에 빠져 열렬히 구애하게 된다. 기쁜 표정으로 춤을 추고 있는 타마라와 한쪽에서 이들을 보고 있는 악마의 쓸쓸한 모습이 대조를 이룬다. 카드 보드에 검은 잉크로 그려진 삽화들이지만 모자이크 같은 터치, 화려한 장식적 패턴들로 인해 무채색의 그림이란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화려하다.

환희에 들떠 춤추는 타마라 공주의 모습을 황홀경에 젖어 바라보는 악마! 공주를 사랑하는 마음과 왕자와 공주의 약혼에 대한 질투심이 교차하는 오묘한 표정이 신비롭다. 브루벨의 천재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말은 탄 사람(레르몬토프의 시 '악마'의 삽화), 미하일 브루벨, 카드 보드에 검은 잉크, 트레챠코프 미술관, 모스크바.

그러나 아름다운 공주 타마라에게 불행이 닥친다. 타마라에 대한 사랑이 차고 넘친 악마는 공주의 약혼자를 죽여 버린다. 말 위에서 죽어가는 약혼자의 긴박함이 브루벨의 자유로운 터치에서 묻어난다.

타마라와 악마(레르몬토프의 시 '악마'의 삽화), 1890~1891년, 미하일 브루벨, 카드 보드에 검은 잉크, 트레챠코프 미술관, 모스크바.

타마라가 슬픔에 잠겨 있다. 충격에 휩싸여 흐느끼는 그녀에게 악마는 달콤하게 속삭인다.

“너무 아름다운 당신, 나를 믿어요. 나를 사랑해 주시오. 나는 당신을 위해 내 모든 것을 바치리다.”

진심을 다해 그녀를 위로한다.

“나는 악마요. 하지만 겁내지 마시오. 나는 당신 속에 있는 지나간 나의 고통을 사랑하고 나의 사라진 젊음을 사랑하오.”
“우리 이야기를 누가 듣겠어요!”“우리는 눈에 띄지 않을 거야. 신은 지상이 아닌, 하늘의 일로 바쁘니까.”

타마라와 악마(레르몬토프의 시 '악마'의 삽화), 1890~1891년, 미하일 브루 벨, 카드 보드에 검은 잉크

두려움에 떨던 타마라도 악마를 사랑하게 되고 영원을 약속하는 밤을 보내지만, 인간인 타마라는 곧바로 죽는다. 외로이 살아야 하는 신의 형벌을 어긴 악마에 대한 노여움의 표시로 신은 그렇게 타마라의 목숨을 앗아가 버린다. 신의 명령을 어긴 악마에게 다시 한번 혹독한 벌이 내려졌다.

누워 있는 타마라(레르몬토프의 시 '악마'의 삽화), 1890~1891년, 미하일 브루벨, 카드 보드에 검은잉크.

싸늘한 주검으로 누워 있는 타마라. 악마는 그녀의 영혼만이라도 함께하길 원했으나 신은 타마라의 영혼마저 거둬 가버리고, 악마는 쓸쓸히 지상에서의 고독한 삶을 영원히 이어간다. <끝>


※ 김희은은 20년 가까이 아트 딜러, 전시기획자, 큐레이터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서울과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그림 전문 '갤러리 까르찌나'를 운영중이다. 일반인들에게 그림 이야기를 전하는 도슨트 활동도 열심이다. 러시아 트레챠코프 국립 미술관과 푸쉬킨 박물관 전문 도슨트다. 저서로 <소곤소곤 러시아 그림 이야기>, <미술관보다 풍부한 러시아 그림 이야기>가 있다. 유튜브 채널 <갤러리 까르찌나>를 운영하며, 러시아 예술의 한국 대중화를 위해서도 애쓰고 있다.